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25화 (25/191)

〈 25화 〉 머리핀

* * *

"역시 올 줄 알았네."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그 검은 머리를 까먹는 게 더 이상하지."

"...그렇네요."

"그래서, 오늘도 한 판 하러 왔나?"

"예. 한 수 배우겠습니다."

하면 할수록 빠지게 되는 게임이었다.

보드 위에서 진행되는 전쟁 게임이었는데, 이름은 크렉스필이었다.

이름을 정확히 몰라 늘 서양 바둑이라고 스스로 칭했는데, 어제 노인과 대결을 하며 처음으로 이름을 들었다.

오늘의 목표는 단 한 번의 승리였다.

노인과 카인은 자연스럽게 마주 앉아 게임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제는 여자아이와 함께 오지 않았었나?"

"..."

밤새 너무 괴롭히는 바람에 몸살이 났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오늘은 숙소에서 쉰다고 하더군요."

카인은 말을 돌리며 천천히 병사를 배치 시켰다.

이번 판은 반격 없이 단단하게 틀어 막아 볼 예정이었다.

"으음..."

노인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배치를 바꿔 투석기를 전면 배치했다.

'망했다.'

뒤늦게 투석기를 부수려 했지만, 이미 성벽은 무너지고 있었다.

"...제가 졌습니다."

"지금 배운 교훈으로 다음에 더 나아지면 되네."

"이번엔 제가 공성을 해보겠습니다."

"그러게나."

나는 노인이 했던 배치를 똑같이 따라했다.

오늘 카인의 목표는 단순했다.

전술을 베끼고, 전략을 모방한다.

노인이 자신보다 잘 하는 것은 당연했기에 부끄러움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실력이 늘어나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길을 택했을 뿐이었다.

"으음...?"

배치부터 똑같이 모방하자, 노인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노인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전 판의 나와 똑같이 배치를 두었다.

'일부러 그러는 건가?'

카인은 자연스럽게 전 판의 노인처럼 투석기를 앞으로 전진 배치시켰다.

성 문을 공격하려던 그 때, 갑자기 성 문에서 기병들이 뛰어나왔다.

미처 손쓸새도 없이 순식간에 투석기가 박살이 나버렸다.

"..."

투석기가 망가지면, 방법은 육탄 돌격 하나 뿐이었다.

하지만, 전 판의 카인이 그랬듯이 모든 성 문은 이미 단단하게 틀어막혀 있었다.

보나 마나 공성은 불가능했다.

"...제가 졌습니다."

카인이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하지만, 노인은 한 없이 날카로운 눈으로 카인을 쳐다볼 뿐이었다.

노인이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배치를 왜 그대로 따라했지?"

"실력이 늘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부끄러운 짓이라는 건 모르는 건가?"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부끄러울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노인장이 저보다 잘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제가 부끄러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뭐?"

카인의 말에 노인이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갑자기 크게 웃었다.

'뭐가 웃긴 거야?'

냉랭한 표정을 짓더니 이번엔 갑자기 웃는다.

카인은 노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 진정한 노인이 나에게 다시 물었다.

"자네는... 그럼 앞으로 계속 그럴 생각인가?"

"당연하지요. 그리고 오늘부터 돌아가면 철저하게 복기해야지요."

당당하게 말했다. 똑같은 방법으로 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내가 한 번은 이기고 돌아간다.'

에어로크 왕국으로 돌아가기 전 한 번은 이기고 싶었다.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하자 갑자기 노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거 대충 둘 수 없게 만드는구나."

고마운 이야기였다.

"그래주시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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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카인은 길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힘껏 걷어찼다.

7연패를 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진짜 안 봐주고 하네.'

어제보다 더 처참하게 발렸다.

자신의 말을 지키려는 듯 노인은 카인이 생각지도 못한 전술로 성벽을 함락 시켰다.

'...똑같이 안 당하면 돼.'

숙소로 가는 길엔 어제 갔었던 시장을 지나야 했다.

여기저기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시아라는 일어났으려나?'

오늘 시아라와 같이 연극을 보러 가기로 했었는데, 본의 아니게 약속이 취소됐다.

'...미안하네.'

그 때 마침 카인의 눈에 노점에서 머리핀을 팔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천천히 노점상을 향해 걸어갔다.

시아라의 화를 풀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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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라 나 왔어."

"..."

천천히 카인을 방 문을 열고 들어섰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도 자나?'

천천히 침대로 걸어가니 그녀가 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곧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시아라를 가만히 쳐다보며 고민하고 있던 그 때,

'...얼레?'

어째 시아라의 얼굴이 조금 빨갰다.

사실, 시아라는 카인이 들어오기 전부터 깨어있었다.

지금 그녀가 자는 척을 하는 것은, 카인을 마주 보기 민망했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이 어제 밤에 엉엉 울며 애원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기분 좋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저택에서 같이 일하던 친한 언니들의 이야기와 비교하면 무언가 이상했다.

카인이 잘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자신의 몸이 음란해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젯밤 카인은 난폭함 그 자체였다.

평소에 그는 자신이 지친 기색을 내보이면 늘 잠자리를 멈췄었다.

그가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바로 어제까진 해결해줄 방법도 몰랐고, 잠자리 후엔 그럴 정신도 없었다.

하지만 어젠 자신이 아무리 애원을 해도 멈추지 않았었다.

결국 마지막엔 끝도 없이 올라오는 절정에 어린애처럼 울 수 밖에 없었다.

평소에도 그는 어제처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는 카인이 자신을 배려해 늘 성욕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에 미안했다.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냥 넘어가면 다음에 또 그럴 거 같아...'

카인과의 잠자리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한 가지 문제점은, 그와 할 때마다 지나치게 진이 빠진다는 것이었다.

온 몸을 휘감는 야릿한 감각에 그녀는 정절에 도달할 때마다 혼이 쑥 나가는 기분이었다.

'다음에 또 어젯밤처럼 하면...'

그때도 자신은 엉엉 울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카인의 모든 성욕을 받아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카인에게 참으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어젯밤 그의 성욕을 알아버린 이상, 그 것은 너무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그녀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 때, 카인이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젠 일어날 타이밍마저 놓쳤다.

카인이 자신을 깨우면 자연스럽게 일어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카인은 그저 가까이 다가오고만 있었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마침내, 그가 자신의 얼굴 앞에 선 것이 느껴졌다.

'이제 흔들어 깨우겠지...?'

카인이 허리를 숙이더니 이불 위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무언가 불안했다.

천천히 얼굴로 다가온 그가 속삭였다.

"자는 것 같은데... 또 해도 되지?"

'...허억!'

"안돼!"

시아라가 눈을 번쩍 뜨며 자신의 가슴에 올려진 손을 꽉 붙잡았다.

눈에서 다급함이 보였다.

그럼 그렇지.

카인은 알고 있었다는 듯 킬킬거리며 말했다.

"푸흐흐. 잘 잤어?"

"..."

"도련님 오셨는데 자는척한 벌이야."

설마 카인이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그녀었다.

민망함이 두 배가 되었다.

"저녁 먹어야지. 얼른 일어나."

"...응."

시선을 땅에 둔 채 간신히 대답한 그녀가 일어나 욕실로 갔다.

카인은 밑에서 받아온 음식들을 식탁에 펼쳤다,

오늘 저녁은 고기 스튜와 파스타 같은 요리였다.

잠시 앉아서 기다리니 흐트러졌던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욕실에서 나왔다.

"시아라. 앉기 전에 잠깐 나한테 와봐."

"...왜?"

"얼른 와봐. 선물이야."

카인이 옆에 있던 작은 상자를 꺼내며 말하자 그녀가 갑자기 긴장된 표정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

"...오늘도 선물을 가져왔어?"

그제야 시아라의 표정이 이해됐다.

'귀여워.'

오늘도 속옷일까 긴장한 듯 했다.

그것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지만, 오늘까지 그녀를 괴롭히면 정말 며칠 동안 쓰러져있지 않을까.

"오늘은 속옷 아니야. 얼른 와봐."

"..."

그녀가 다시 발걸음을 옮겨 카인의 앞으로 왔다.

"잠시 눈 감아봐."

"...꼭 감아야 해?"

"얼른. 밥 식어."

"...응"

카인은 박스에서 작은 물건을 꺼냈다.

아까 노점상에서 산 머리핀이었다.

가지런히 정돈된 그녀의 옆 머리에 조심스럽게 끼웠다.

달깍

"...으응?"

"이제 눈 떠도 돼"

"이게 뭐야?"

"머리핀이야. 돌아오다가 네 생각이 나서 샀어."

카인의 말에 시아라가 거울을 향해 다가갔다.

노란 꽃이 달린 작은 머리핀이 그녀의 머리에 끼워져 있었다.

"...고마워. 예쁘다..."

"맘에 들지 모르겠네."

"정말 마음에 들어. ...고마워 카인."

조금 분위기가 풀어진 듯했다.

카인은 사과하기 좋은 타이밍이 왔음을 느꼈다.

"...어젠 내가 미안했어. 다음부턴 안 그럴게."

"..."

시아라는 대답할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사실 내심 기쁘기도 했다. 그만큼 자신을 사랑한다는 거니까.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카인과, 어제의 카인을 비교하면 어젯밤이 백 배는 더 나았다.

그렇다고 괜찮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와 할 때마다 엉엉 우는 모습을 보여주긴 싫었다.

그렇게 속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카인이 다시 말을 꺼냈다.

그녀가 아직 화가 안 풀렸다고 생각한 듯 했다.

조금 시무룩한 목소리였다.

"...아직 화가 안 풀렸어? 미안해..."

시아라는 지금이 앞으로의 관계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인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여기서 이대로 끝난다면 그는 앞으로 절대 어젯밤처럼 행동하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에 카인이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를 만든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모두 그녀가 초래할 미래였다.

그것 만큼은 죽어도 싫었다.

지금은... 조금 더 용기를 내야 할 때였다.

시아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 다음엔..."

"...응?"

"다음엔... 그... 입으로..."

"...입?"

"...입...으로... 먼저... 해줄게..."

"..."

"..."

세상에 이런 일이.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아?'

그 부끄럼 많고 소극적이던 그녀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나?'

시아라의 얼굴은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만큼 붉어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붉지 않은 부분은 노란 머리핀 뿐이었다.

카인은 무엇이 그녀의 생각을 바꿨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부끄러움에 입을 앙 다문 채 머리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은 카인의 음심을 동하기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럼."

"...응?"

"지금 해도 돼?"

"아, 안돼!"

"안돼?"

"나 진짜 죽어..."

카인의 강렬한 눈빛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여자로써의 기쁨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자신을 그렇게 쳐다보는 것이 기뻤다.

그녀는 용기를 내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밥 먹을까?"

"응..."

그렇게 카인과 시아라는 식사를 시작했다.

다행히 아직 스튜는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애매한 분위기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카인이 입을 열었다.

"내일 연극 보러 갈까?"

"내일? 내일... 무도회 열리는 날인데?"

"저녁에 시작하니까 낮에 보고 오자. 시아라 오늘 하루 종일 숙소에만 있었잖아."

"...그럴까?"

자신 때문에 하루 종일 침대 신세를 진 그녀였다.

생각보다 시아라가 화가 나 보이지 않았지만, 미안한 마음은 여전했다.

'...머리핀 때문인가?'

서로 다른 생각이 교차하는 밤이었다.

두 사람은 아까보다 조금 더 풀어진 분위기에서 저녁을 먹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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