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23화 (23/191)

〈 23화 〉 선물

* * *

시아라와 함께 그곳으로 가니 두 명이 마주 앉아있었고 몇몇의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뭐야? 내가 매일 하던 게임이네?'

포르투 왕국에서 처음 봤던 바둑을 닮은 그 게임이었다.

요즘에도 할 일이 없을 땐 항상 게임을 했는데, 시아라는 흥미를 못 느껴했고, 마틴 경은 나를 대신해 할 일이 많은지 시간이 없어 나 혼자 했던 게임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이미 성 문이 뚫린 것이 명백히 패색이 짙어 보였다.

"허... 그렇게 둔다고?"

"저러면 졸이 다 죽을 텐데."

"...조용히 좀 해!"

"자네가 똑바로 두면 가만히 있지."

"맞네. 훈수를 안 둘수가 없구만 그래."

"...이, 이익!"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이 주변 사람들의 훈수에 화가 났는지 버럭 화를 내더니, 이내 순순히 패배를 시인했다.

"...내가 졌네."

"아이고 오늘도 술값을 주는 구만. 내일 또 할까?"

승자의 비아냥에 더 이상 참기 힘들었는지, 그는 품에서 동전 두 개를 꺼내 상대에게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일은 내가 이길 거야!"

"내일도 술 사줄라고?"

"으아악!!"

그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게임을 진 사람은 말을 할수록 놀림만 받는 것을 깨달았는지, 한 차례 괴성을 지르고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이거 완전 이세계판 탑골 공원인데.'

이긴 사람이 계속해서 게임을 하는 구조인지 방금 승리했던 사람이 아직 자리에 앉아 사람들한테 말했다.

"자, 또 누가 올 텐가?"

몸이 동했다.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시아라. 나 한 판만 해도 돼?"

"응. 카인도 자주 했잖아."

전략 게임 특성 상 혼자 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들 한 두 해 서양 바둑을 둔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내 실력을 한 번 검증해 보고 싶었다.

나는 천천히 자리로 다가갔다.

"응?"

그제야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어로크 사람인가?"

"바로 알아보시네요."

"젊은 사람들은 모를 수도 있지. 아무튼, 한 판 하러 왔는가?"

"예. 흥미가 생겼습니다."

"규칙은 간단하네. 동화 두 개를 걸고 내기 게임. 승자가 공성과 수성 둘 중 하나를 먼저 고르지."

"알겠습니다."

"좋네. 나는 이번에도 공성을 하지. 이거 맨날 하던 사람들이랑 하다가 새로운 사람이랑 하려니 설레는 구만."

그것과 별개로, 여기서 지면 똑같이 조롱 당할 것이 분명했다.

시아라 앞에서 쪽팔림을 당하긴 싫었다.

"그럼. 바로 시작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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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3연승이야."

"생각보다 잘하는데?"

"저 영감탱이가 지는 걸 오랜만에 보는구먼."

'후우...'

처음의 긴장과 달리 생각보다 수월했다.

그저 검은 머리의 나를 신기하게만 보던 사람들의 눈이 점점 동그래졌다.

세 번을 내리 이기고 아무도 도전을 하지 않아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나와 한 번 해보지."

동시에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오랜만에 오신 것 같은데?"

"전부 다 질 줄 알았는데, 자존심은 챙기겠어."

"외국인 청년. 조금 긴장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잘하는 사람인가?'

확실히 연륜이 많아 보였다.

눈가엔 주름이 자글자글했고, 수염은 길게 길러 가슴까지 내려와 있었다.

특히 머리부터 눈썹, 수염에 옷까지 전부 흰색으로 뒤덮여있어 검은 머리에 검은 옷을 입은 나와 정반대였다.

이러면 분위기 상 깔 맞춤을 해야 편­안했다.

나는 처음으로 검은색 돌을 집으며 말했다.

"제가 공성을 하겠습니다."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 친구 뭘 좀 아는군."

노인도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네. 내가 수성을 하지."

긴장이라곤 없어 보였다.

마치 손주의 재롱을 쳐다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이었다.

대결을 앞둔 사람의 눈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저 눈빛을 깨트리고 싶었다.

나는 천천히 돌을 집어 들었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내리 5연패를 당했다.

"역시 우리 공원의 자랑!"

"자네도 이 분은 못 이기는 구만!"

'뚫을 곳이 아예 없어.'

벽이 느껴졌다.

나는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노인은 실제로 수성을 하는 장군이었다.

마지막 판엔 오기가 생겨 모든 돌을 움직여 한쪽 성 문만 두들겼다.

그리고 전 판보다 더 철저하게 쳐 발렸다.

'뭐 이렇게 잘해.'

처참하게 발리니 차라리 속이 시원했다.

노인하고 계속해서 서양 바둑을 두면 실력이 금방 늘 듯했다.

'하지만... 이제 가야지.'

이제 슬슬 일어날 때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내일도 오고 싶은데.'

하지만, 내일은 올 수 없었다.

내일은 시아라와 수도 구경을 해야 했다.

'시아라? 시아라??'

'헉!'

이제서야 나를 기다리는 시아라가 생각났다.

빠르게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심심한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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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다른 사람들이랑 하는 건 처음이라... 네 생각을 못했어."

"괜찮습니다. 그러실 수도 있죠. 제 생각은 안 하셔도 됩니다."

"..."

왜 존댓말을 하고 그래.

생각보다 많이 섭섭한 듯 했다.

붙잡은 내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지만, 입술이 뾰로통했다.

그렇게 두 손을 잡은 채 수도의 밤 거리를 걸으며 숙소로 돌아가고 있을 때, 저 멀리 의류점이 보였다.

"시아라. 저기 좀 들렸다 가자."

"네?"

"존댓말은 그만 하고. 내일도 나오려면 로브 사러 가야지."

"...응."

옷 가게는 마감 시간이 다가왔는지 한가했다.

우리가 들어서자 아줌마로 보이는 주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머. 멀리서 오신 분들인가 봐? 뭐 사러 왔어요?"

"로브 두 개만 사려고요."

"로브? 잠시만 기다려요. 꺼내줄게."

그렇게 잠시 주인을 기다리며 옷을 천천히 둘러보는데, 내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이 있었다.

"시아라."

"응?"

"이거 한 번 입어봐."

"...이걸?"

발목까지 내려오는 하늘색 원피스였다. 치마 부분이 가볍게 주름이 잡혀있어 산뜻한 느낌이 들었다.

시아라에게 잘 어울릴 듯 했다.

"예쁘지 않아? 사죄의 의미로 이거 사줄게. 이제 화 풀어."

내가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옷을 건네자, 그제야 그녀가 웃으며 옷을 들고 사라졌다.

그렇게 시아라가 사라지고 혼자 의류점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내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 ㅜㅑ'

'빨간색?, 검은색?,'

역시 국룰은 빨간색이다. 나는 조용히 옷을 들고 카운터로 갔다.

마침 주인이 로브 두 개를 들고 나왔다.

"로브 두 개랑 이거랑 지금 옷 하나 입어보고 있거든요. 그거까지 세 개 살게요."

"어머. 이건 손님 취향?"

"당연하죠."

"여자친구분이 거부해도 환불은 안돼요~"

주인이랑 수다를 떨고 있을 때, 시아라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역시나 몸의 선이 가늘고 피부가 하얘서 그런지 원피스가 잘 어울렸다.

"와, 진짜 예뻐 시아라."

"저, 정말...?"

"그거 입고 가자. 이미 계산했어."

"보기도 전에?"

"응. 안 봐도 예쁠 텐데."

노골적인 내 칭찬에 시아라는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어머. 생긴 건 차갑게 생겼는데 말 잘하네?"

주인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이제 가자."

"응..."

저녁이라 사람도 별로 없어 우리는 로브를 입지 않고 숙소로 걸어갔다.

시아라가 행복해 보였다.

밥을 먹고 나선 제대로 된 구경도 못했었다.

이제야 처음으로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는 듯 했다.

"그렇게 좋아?"

"응. 헤헤... 옷 사줄 줄은 몰랐어."

"뭐가 힘든 일이라고. 다음에 또 사줄게."

"히히"

내 말에 더욱 기뻤는지 그녀가 뽀뽀를 했다.

그녀가 먼저 뽀뽀를 한 적은 처음이었다.

'이런 도발엔 약한데'

나는 그녀의 귓가에 다가가 살짝 속삭였다.

"그 뒤는 돌아가서 하자."

"...그냥 고마워서 한 건데...?"

"아무튼 네 잘못이야."

드디어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방문을 열었다.

'문부터 잠가야지.'

후작에게 놀림을 받은 이후로 습관적으로 문을 항상 확인했다.

없던 버릇이 생겨버렸다.

이미 오는 길에 준비는 끝났다.

벌써 분신은 화가 나 있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생각보다 늦으셨습니다."

그런데 방에 들어오니 마틴 경이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마틴 경?"

"예. 급한 일이 생겨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급한 일이요?"

"예. 헤르트 왕국의 상인 보르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 다나크 제국과의 전쟁 준비로 군량을 징발해서 식량 수급에 차질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그러면 식량 선적까지 얼마나 걸린답니까?"

"7일 안에 완료하겠다고 합니다. 나흘이 늘어났습니다."

'나흘이라...'

생각보단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7일 정도면 휴가로 딱 적당할 듯 싶었다.

옆에 시아라를 쳐다보니 그녀는 오히려 좋은 듯 기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한 가지 더요?"

"헤르트 왕국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그는 품에서 편지를 꺼내 나한테 건넸다.

붉은 바탕에 금색 수실이 꾸며진 고급스러운 편지봉투였다.

"내용은 읽어보셨나요?"

"안 읽어봤습니다. 수령만 하고 보관 중이었습니다."

천천히 봉투를 뜯었다.

사자 모양이 각인된 실링왁스가 떨어졌다.

나는 천천히 편지를 읽어 내렸다.

"무슨 내용입니까?"

"...이틀 후에 무도회가 열리는데 참석해달라는데요?"

"무도...회를 말입니까...?"

"..."

"아무래도 대량의 철광석을 판 것이 왕궁의 귀에 들어갔나 봅니다."

마틴 경은 천천히 왕궁의 의도를 분석하며 말을 이어갔다.

"거기에 폐쇄적으로 유명한 에어로크 왕국의 후작 가문 후계자가 직접 왔으니 호기심이 생겼을 겁니다.."

"..."

"이번 상행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지속해서 상행을 할 예정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장기적인 관점에서 교류를 맺을 좋은 기회입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 인간아...'

...나는 춤 같은 건 출 줄 몰랐다.

산 속에 숨어 교류를 일체 하지 않는 야만인 이미지가 있는 에어로크 왕국이었는데, 내가 쐐기를 박게 생겼다.

'좆 된거 같은데'

"...마틴 경."

"예?"

"...아닙니다..."

원래의 카인은 분명히 춤을 배웠을 것이다.

마틴 경에게 춤을 출 줄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마틴 경과 로그멜 경, 시아라까지 넷이 함께 갈 것이니 준비해 두세요."

"예. 미리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마틴 경이 방을 나갔고, 나는 침대에 쓰러졌다.

커졌던 분신은 이미 쪼그라든지 오래였다.

시아라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카인... 춤 기억 나?"

"시아라."

"응?"

"혹시... 춤출 줄 알아?"

"...나도 잘 몰라."

망했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거듭했다.

'다리에 붕대를 하고 가? 아니야. 더 이상해.'

'솔직하게 말하면? ...야만인 취급 받기 딱 좋아.'

안 갈 수는 없었다. 마틴 경의 말대로 이건 좋은 기회였다.

춤 따위로 거절할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이런 시부레. 뭐 방법이 없나?'

그 때, 시아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카인. 그런데 우리 왕국이랑 헤르트 왕국이랑 춤이 같을까?"

"...! 그거야!"

맞다. 그 생각을 못했다.

대륙의 서쪽 끝 에어로크 왕국과 동쪽 끝 헤르트 왕국의 사교 춤이 같을 리가 없었다.

한 방에 고민이 해결됐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껴안았다.

"꺅!?"

"우리 시아라 천재야? 천재야!"

"자, 잠시만! 깜짝 놀랐잖아."

"일로와."

나는 그녀의 얼굴에 사정 없이 뽀뽀를 날렸다.

그녀가 당황해하며 이리저리 얼굴을 피했지만, 몸이 꽉 붙잡혀있어 의미 없는 몸짓이었다.

그렇게 한참 뽀뽀를 하다 보니 죽었던 분신이 다시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선물이 생각났다.

"맞다. 시아라 선물이 있어."

"서, 선물?"

그녀가 필사적으로 얼굴을 피하며 대답했다.

"응. 선물. 저 가방 열어봐."

"아까 우리가 사온 옷들 아니야?"

"얼른 열어봐."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내 품에서 벗어나 옷가지가 담긴 베낭을 열었다.

거기엔 내가 그녀 몰래 산 선물이 숨겨져 있었다.

그녀가 한 손에 고급스러운 박스를 들고 나에게 말했다.

"와... 무슨 선물이야?"

"열어보면 알아."

"히히... 고마워. 얼른 열어볼게."

그녀가 설레는 표정으로 박스를 천천히 열었다.

'내가 고마워.'

박스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그녀가 순식간에 굳었다.

얼굴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이게 선물...이야?"

"맘에 들어?"

"..."

그녀의 손엔 아까 그녀가 옷을 갈아입을 때 몰래 샀던 빨간 속옷이 들려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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