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검은 머리
* * *
"와아!"
시아라가 탄성을 질렀다.
10일간의 뱃길 끝에 헤르트 왕국의 남수도가 보였다.
해안가를 따라 엄청난 수의 배가 정박해 있었고, 그 뒤로 도시가 보였다.
조금 높은 언덕 위에 왕궁이 있었는데, 알만 왕국의 수도보다는 왕궁이 작아 보였다.
저곳이 헤르트 왕국의 남쪽 수도 헤르트였다.
신기하게도 헤르트 왕국은 영토가 두 개로 나뉘어 있었다.
자연히 수도도 두 곳이었다.
왕국 사이에 뱃길로 하루거리의 바다가 있었고 북쪽은 다나크 제국, 남쪽은 파딘 제국과 붙어있었다.
오랜 역사 동안 양 제국의 침입을 받은 헤트르 왕국은 남쪽의 파딘이 침략하면 수도를 바다 건너 북쪽으로 옮겼다.
반대로 북쪽의 다나크 제국이 침략을 할 땐, 수도를 바다 남쪽으로 옮겼다.
지금은, 북쪽에 있는 다나크 제국과의 전쟁 준비로 수도가 남쪽으로 옮겨진 상태였다.
항구에 정박한 우리는 바로 숙소부터 잡았다.
열흘 간의 항해로 피곤했던 나는 숙소에서 하루 종일 쉬고 싶었다.
그 때, 반짝거리는 눈으로 창문 밖을 구경하던 시아라가 나를 쳐다봤다.
이미 여관에 오기 전부터 그녀는 수도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카인! 시장 가보고 싶지 않아?"
"...살짝 피곤한데 내일..."
그녀의 미간이 팔 자로 휘어졌다.
눈은 속상함을 담고 있었다.
"...삼 일 후에 다시 돌아간다며..."
"...그치."
"내일 하루 놀면 모레는 배에 타야 하는데..."
"..."
"알겠습니다. 도련님..."
...존댓말은 반칙이지
"옷 갈아입어! 가자!"
내 말에 순식간에 표정이 풀리더니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헤헤. 응!"
"...연기력이 점점 느는 것 같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그녀가 흥얼거리며 나들이복을 꺼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선 메이드복이 시선을 끌었기 때문에 보통 옷을 갈아입고 나갔었다.
신난 그녀가 옷을 벗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카인. 나가서 기다려줘."
"그냥 갈아입어."
"얼른 나가."
"싫은데"
"나가."
"..."
왕국의 수도를 구경하는 것은 나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리엔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모든 것이 구경거리였다.
우리는 먼저 항구 방향으로 걸어갔다.
헤르트로 온 가장 큰 목적인 회가 먹고 싶었다.
'매운탕같은 음식도 있을까.'
소주도 생각났다.
얼큰한 찌개도 생각났다.
시아라와 천천히 부둣가로 나가자 큰 식당이 하나 보였다.
관광객들을 주로 상대하는 곳인지 인테리어가 괜찮았다.
"저기로 갈까?"
"그래!"
뭐든지 좋아 보였다.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는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줍은 표정은 자주 봤지만, 이렇게 기뻐하는 표정은 처음 보는 듯 했다.
'조금 미안하네.'
사실, 이렇게 단 둘이 놀러 나온 것도 처음이었다.
여기까지 두 달 가까이 오면서 하루도 그녀를 위해 시간을 내주지 못했다.
'...내일도 나와야겠네.'
주말에 쉬지 못하는 가장의 느낌인가.
하루 종일 자고 싶은데 와이프의 등쌀에 아이들과 공원에 나온 기분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식당에 들어섰다.
자리에 앉아 한 번 기도를 하곤, 경건한 마음으로 메뉴판을 펼쳐 차근히 살펴보았다.
'있다!'
회가 있었다.
무슨 생선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회가 있었다.
'매운탕도 있으면 욕심이겠지.'
...있었다!
한국의 매운탕은 아니었지만, 생선을 얼큰하게 끓여 낸 스튜를 팔고 있었다.
당연히 소주는 없었지만, 화이트 와인은 팔고 있었다.
'아쉬운대로 와인이나 한잔 할까.'
"난 스튜랑 회 먹을게. 시아라는?"
"난... 생선 튀김이랑 샐러드."
"술도 한 잔 할까?"
"...지금 낮인데?"
술 얘기에 그녀가 눈썹을 오므리며 대답했다.
거기에 화이트 와인이었다.
첫날 밤에도 우린 화이트 와인을 먹었었다.
평소에 술 먹자는 이야기는 우리의 암묵적인 신호이긴 했지만, 지금은 정말 아니었다.
"그러니까. 낮인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평소에도 야한 것만 생각하는 거야?"
"..."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오히려 내가 뻔뻔하게 나와서 일까.
그녀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역시 놀리는 맛이 좋다.
"좀만 참아. 이따 숙소 들어갈 때 한 병 사가자."
"그런 소리가 아니라...!"
"싫어?"
"...얼른 시키기나 해..."
더 이상 말해봤자 손해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챈 시아라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을 돌렸다.
"뭐를? 화이트 와인?"
"너어..."
"푸흐흐"
음식 맛은 훌륭했다.
생선 스튜는 매운탕 같은 느낌이 아니라 조금 아쉬웠지만, 그런대로 맛은 좋았다.
회는 방어 회처럼 보였다.
붉은 빛의 생선이 두툼하게 썰어져 나왔는데, 식감이 아주 좋았다.
시아라는 스튜만 조금 맛보고 튀김이랑 샐러드만 먹고 있었다.
"시아라. 회는 못 먹어?"
"카인은 먹어본 적 있어?'
"나? 엄청 많...았으면 좋겠는데 한 번도 없어."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다 변명하기 바쁠 뻔했다.
나는 자주 먹었지만, 카인은 한 번도 먹은 적이 없다.
"좀 징그러워... 못 먹겠어."
붉은 회를 아무렇지 않게 먹는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하긴 18년 동안 한 번도 못 먹어봤으면 그럴 만 하지.'
정말 아쉽게도 이 회는 내가 전부 먹을 수 있었다.
식당을 나온 우리는 발걸음을 돌려 시장을 구경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혹시나 길을 잃을까 시아라의 손을 꽉 잡고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제야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처음 식당을 갈 때는 배가 고파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 주위를 조금 둘러보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보면서 가고 있음을 알았다.
'뭐야. 인셉션도 아니고.'
시아라도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내 손을 더 꽉 잡아왔다.
'왜 그러지?'
복장도 평범했고, 행동도 평범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리를 흘낏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무언가 신기한 것을 본 사람들처럼.
'뭐가 신기하지? 아...!'
그제야 사람들의 머리가 보였다.
여기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 검은 머리는 나와 시아라 둘뿐이었다.
포르투 항구에서는 경매 날 전까지 병을 핑계로 밖을 안 나갔었고, 그 전까진 마차만 타고 있었다.
배에서도 같은 에어로크 왕국의 사람들만 있었기에 몰랐었는데, 이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식당에서도 사람들이 흘낏거렸던 것 같기도 했다.
'설마 검은 머리가 한 명도 없겠어.'
동물원의 코끼리가 된 느낌에 기분이 영 별로였다.
시아라도 시선을 느꼈는지 기분이 나쁜 얼굴이었다.
'아니, 에어로크 왕국 사람 처음 봐?'
검은 머리가 한 명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주변을 더 크게 둘러보기 시작했다.
분명 한 명은 있겠지.
'있다!'
저 멀리 검은 머리의 사람이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시아라의 손을 잡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한 명도 없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코끼리 쳐다보듯이 보는 거야.'
다시 자신감이 생겼다.
주변의 시선 따위 무슨 상관인가.
다시 시장 구경이나 해야겠다.
'...'
"아 여기서 뵙는군요. 우연입니다."
"예... 마틴 경, 로그멜 경..."
검은 머리가 네 명이 되었다.
주변의 시선이 더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에라이 시발.'
"일단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죠."
시장을 빠져나와 잠시 걷자 한적한 공원이 보였다.
우리는 벤치에 잠시 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제야 나는 궁금했던 점을 물어봤다.
"마틴 경. 에어로크 왕국을 제외하면 검은 머리가 희귀한가요? 신기한 동물 보듯이 쳐다보던데요."
"희귀한 게 아니라 없습니다."
"...없다고요? 혼혈인 경우도 있지 않나요?"
"우리나라와 외국인이 결혼해도 검은 머리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조금 어두운 갈색이나, 붉은색 정도가 나옵니다."
"그게 무슨..."
'무슨 열성 유전자도 아니고.'
"거기에 우리나라는 아시다시피 굉장히 폐쇄적입니다. 마땅한 관광지도 없어서 외국인들도 잘 찾아오지 않죠. 그래서 외국인과의 결혼도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럼 여기 있는 동안 계속해서 이런 시선을 받아야 한다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에겐 처음 보는 머리일 테니까요. 애초에 상인이 아닌 도련님 같은 귀족 자제분이 알만 왕국을 넘어 헤르트 왕국까지 나온 경우는 없습니다."
"당분간 로브를 쓰고 다녀야겠습니다."
"그것이 돌아다니기 편하실 겁니다."
나는 시아라를 쳐다봤다.
마틴 경의 말에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어떡하지 시아라. 기껏 예쁜 옷을 가져왔는데, 가려야 해서."
내 위로에 그녀가 일부러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보단 낫습니다."
"오늘은 일단 돌아가는 길에 로브를 사고 내일 또 나오자."
"내일도요?"
"응. 오늘은 거의 못 놀았잖아. 내일 또 나오자."
그제야 그녀가 진짜 미소를 지었다.
"헤헤. 감사해요."
"크흠. 그럼 저희는 들릴 곳이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런 나랑 시아라가 눈꼴 시려웠는지 마틴 경과 로그멜 경이 불편한 얼굴을 하곤 자리를 벗어났다.
뭐 어떡해.
꼬우 면 여자친구 데려왔어야지.
그렇게 가신 둘이 떠나간 후에 우리는 조금 더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 때, 내 눈에 공원 구석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무언가를 구경하는 모습이 보였다.
'뭐 하고 있는거지?'
"시아라. 저기 가볼래?"
"저기?"
가신들이 사라지자 다시 자연스럽게 그녀가 말을 놓았다.
"응. 뭐 하고있나 궁금해서. 같이 가보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