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헤르트로
* * *
검증을 끝낸 우리는 상위 5개의 종이를 들고 다시 단상으로 가고 있었다.
그 때,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이번 경매가 끝나면 바로 낙찰 받은 곳으로 떠나는 거야?"
"아니, 헤르트 왕국에 한 번 들렸다 갈 것 같아. 여기까지 온 김에 잠깐 여행이라도 하고 가야지. 미행도 뗄 겸"
안 그래도 남들에게 흘려야 하는 정보였다.
잘 됐다 싶어 냉큼 대답했다.
"미행이라...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까지 할까"
"무조건."
내 확신을 담은 대답이 미하일도 부정은 할 수 없었는지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 나는 말을 돌렸다.
"너도 일이 끝나면 바로 영지로 돌아가??"
"이번 일이 잘 마무리 됐으니 집에 돌아가야지. 솔직히 난 아까 낙찰 종이를 확인한 순간부터 죽다 살아난 기분이야."
그 말에 미하일을 쳐다보자 그가 십년감수했다는 듯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생각보다 금액이 너무 커서?"
"...단지 집 밖을 나오고 싶어서 지원한 일인데, 만약 무슨 사건이 터졌으면 내가 감당 못할 일이었어."
'이미 터졌어. 아무도 모를 뿐이지.'
아니다. 아무도 모르니 사건이 터진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다시 한 번 그에게 미안했다.
그는 갑자기 나를 향해 돌아보더니 조금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마 이렇게 큰 규모의 상행을 허락 받지 못할 거야.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 중이야."
"...그게 아니야. 미하일."
"응?"
"가문의 후계자가 직접 나설 만큼 상황이 안 좋은 거야. 에어로크 최남단에서 알만 왕국 동쪽 끝까지 올만큼."
"......"
"미안하면 다음에 밥 사."
내 말에 조용했던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한 내 목소리에 조금 사라진 듯 했다.
"그 말...다시 들어도 꽤 괜찮은 말이야. 고맙다."
우리 둘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단상으로 거의 도착했다.
이제 나는 갈 시간이었다.
더 이상 지체하면 뒤를 잡힐지도 몰랐다.
나는 여기서 멈춰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제 가볼게. 너 혼자 올라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이 경매를 너 혼자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면 다음엔 나처럼 상행을 나올지도 모르지. 얼른 올라가."
"카인..."
"난 이제 바로 떠날 거야. 미행이 붙기 전에 가야지."
"...무슨 말인지 알았어. 다음에 다시 보자."
나는 그와 잠시 포옹을 했다.
미안하다. 이용만 해 먹어서.
"이제 갈게. 너도 올라가 봐."
"그래. 조심히 가라."
단상의 밑에서 나와 미하일은 서로 뒤돌아 걸어갔다.
'이제 끝이다.'
그가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빠르게 대기실로 달려갔다.
시아라와 마틴 경은 이미 출발할 준비를 마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벌컥 열며 외쳤다.
"바로 출발합니다. 어서 나오세요."
"예."
멀리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미하일이 생각보다 잘 하고 있는 듯 했다.
철광석에 아직 미련을 못 버린 사람들은 경매가 끝나고 난 뒤 내가 어디로 가는지 분명 사람을 붙여 놓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경매가 끝나고 난 뒤에 난 헤르트로 가는 배가 출발한 이후일 것이다.
빠르게 달려 항구로 나가니 이미 철광석을 실은 배는 출발을 했는지 보이지 않았고, 여객선만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선상 위에서 우리를 발견한 로그멜 경이 뒤쪽을 향해 출발 지시를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우리는 달리던 발걸음을 멈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시아라를 쳐다보자 그녀도 이런 경험은 없었는지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시아라도 고생 많이 했지.'
팔자에도 없던 동쪽 끝 포르투 항구까지 상행을 오면서 고생을 많이했 었다.
내 부탁으로 생전 안 해본 낙찰 종이 밑장 빼기까지 한 그녀였다.
"시아라"
"네?"
"정말 고생 많이 했어. 당분간은 맘 편히 쉬어도 돼."
"...감사합니다."
"마틴 경도 수고 많으셨어요. 헤르트에서 며칠 있어야 할 테니 그동안 쇼핑이라도 마음껏 하세요."
"감사합니다."
천천히 배를 향해 걸어갔다.
길고도 길었던 포르투 여행이 끝이 났다.
'빨리 돌아가고 싶다.'
첫 여행 치고는 너무 오래 집을 비웠다.
헤르트에서 식량과 돈을 받아 영지로 돌아가면 한동안 푹 쉬고 싶었다.
서서히 노을 지는 석양이 바다에 비쳐 온 사방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아 참, 시아라."
"예?"
사방을 물들인 석양을 보며 감탄에 빠진 그녀가 나를 돌아봤다.
"오늘... 술 한잔 할까?"
"..."
석양 때문인지, 내 말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역시 이 얼굴이 제일 귀여워.'
나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길고도 길었던 포르투 여행이 끝이 났다.
배에 올라타자 저번에 만났던 북에르딘의 상인 카벤과 헤르트의 상인 보르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곧 바로 모여 석반 안의 회의실로 모였다.
나와 마틴 경, 로그멜 경, 카벤과 보르딘 네 명이었다.
먼저 카벤이 입을 열었다.
"우선, 저희에게 철광석을 팔아주신 것은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와 보르딘은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뭐... 거래를 한 것 뿐인데요."
"그래도 꼭 다시 감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경매를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원래부터 알만 왕국에 팔 생각이 없었지만, 굳이 오해를 풀 필요는 없어 보였다.
민망해진 나는 화제를 돌렸다.
"헤르트 왕국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현재 다나크 제국과 국경에서 대치 중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다나크 제국 때문에 식량 수급에 차질을 빚지는 않겠죠?"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다나크 왕국과 대치하는 곳과 저희가 가는 항구는 거리가 멉니다."
"그 건 다행이군요. 도착까지 며칠 정도 걸릴 예정입니까."
"뱃길로 10일 정도 가면 도착입니다. 지금 저희가 가는 항구에 이미 식량을 모으고 있습니다. 아마 도착하셔서 3일 정도만 기다리시면 다시 출발하실 수 있을 겁니다."
"딱 적당하네요."
별일 없는 한 3일 정도 휴가를 보내고 다시 승선하면 되돌아오면 될 듯 싶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다시 모이기로 하죠."
"예. 그 동안 푹 쉬시길 바랍니다."
회의를 마치고 나는 객실로 돌아갔다.
꽤 신경을 써줬는지 방은 꽤 넓었고 가구도 고급스러웠다.
한 쪽엔 큰 침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자 시아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반겼다.
"오셨습니까."
"네. 오셨습니다."
"..."
그녀가 나를 흘겨봤다.
"회의는 잘 끝났어?"
"응. 10일 정도 가면 도착한대."
"...꽤 오래 걸리네."
"그치? 그동안 푹 쉬어."
"할 게 없는 걸."
"바다 구경도 하고 나랑 할 일도 많아."
"할 일?"
"게임 해야지."
그 말에 그녀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으응... 그 게임 너무 어려워..."
"그럼 술 한 잔 할까?"
"..."
내 말에 결국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헤르트의 술도 마셔봐야지.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너..."
"마시기 싫어?"
"...그건 아닌데."
반응이 너무 귀여웠다.
시아라는 아직 이런 쪽에 수줍음이 많았다.
"일단 지금까지 고생했으니까 푹 쉬고 이따 저녁에 마시자."
"응..."
그 말을 하며 침대에 누웠다.
푹신한 이불이 몸을 감쌌다.
오전부터 긴장으로 굳어있던 몸이 이제야 풀리는 것 같았다.
쏟아지는 피로감에 눈이 감겼다.
"카인, 카인 일어나. 저녁 먹어야지."
잠결에 시아라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오랜만의 숙면이었다.
천천히 눈을 떠 창문 밖을 보니 이미 어두컴컴했다.
생각보다 오래 잔듯했다.
기분 좋은 수면 감에 내 옆에 서있던 그녀를 껴안았다.
시아라가 침대 위로 넘어졌다.
"카인... 밥 먹어야지."
"조금만 이러고 있을게."
"..."
시아라가 품 안으로 들어왔다.
슬립을 입고 있을 땐 몰랐는데, 생각보다 옷이 두꺼웠다.
부드러운 살을 느끼고 싶었다.
그녀의 등 뒤로 손을 넣어 단추를 풀었다.
"옷이 너무 불편해."
"지, 지금은 안돼...!"
그녀가 황급히 내 손을 막았다.
"밥, 밥부터 먹자. 식잖아..."
"음..."
너무 상황이 없긴 했다.
다시 손을 빼 시아라를 껴안았다.
"5분만 있다가 먹자."
"알겠어..."
드디어 그녀가 얌전해졌다.
기분 좋은 촉감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저 멀리 탁자 위에 저녁밥과 술이 차려져 있었다.
'술?'
시아라가 저녁과 같이 챙겨온 듯 했다.
'부끄러워 하더니, 먼저 가져왔네.'
다시 시아라를 쳐다보니 시아라가 내 눈을 쫓고 있었다.
귀여운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술 가져왔네?"
"...헤르트 술도 마셔보고 싶을 뿐이야."
대답은 당당했지만, 얼굴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자기가 챙겨 왔으면서 왜 부끄러워해.'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손을 간질였다.
"우리 주변 객실에 누구 누구 있어?"
"...아무도 없어."
"잘됐네."
그 말에 얼굴이 더 벌게졌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그녀가 조심스레 호응해왔다.
오랜만에 맛보는 시아라의 입술은 부드러웠다.
포르투 항구에 있을 때는 하루 하루 긴장을 놓을 수 없어서 하지 못했었다.
천천히 입을 열어 혀를 집어넣었다.
그녀의 혀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하고 있는데, 시아라가 잠시 입을 떼고 말했다.
"저녁... 식어..."
"밥이 중요해?"
"술... 마셔야지..."
"맨 정신으로 하고 싶은데."
"아, 안돼...!"
시아라가 자신을 올라타고 있는 나를 밀어내려 했다.
그녀가 부끄러워 하는 모습을 보자 조금씩 흥분되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더 놀려주고 싶었다.
"왜 안되는데?"
"저, 저녁 식으면 맛 없잖...아..."
"푸흐흐"
너무 귀여운 변명 아닌가.
몸에 힘이 더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미안해."
"괜찮...아."
갑작스레 키스해서 미안하다고 한 줄 알았나 보다.
그게 아닌데.
천천히 시아라의 등 뒤로 손을 넣으며 말했다.
"못 참겠어. 미안해."
"아, 안 미안해도 돼. 지금 멈추면...! 안 미안해도 돼...!"
"미안해."
그녀의 입을 포개며 더 이상 말을 못하게 닫았다.
그녀가 약하게 반항했다.
저녁은 조금 이따 먹어야 할 듯 싶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