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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책사 시점-19화 (19/191)

〈 19화 〉 이건 못 참지

* * *

귀공자처럼 생겨 재미없는 성격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유쾌한 놈이었다.

그 솔직한 반응에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날짜는 음... 내가 지금 몸이 안 좋아서 바로는 어렵고 넉넉하게 다음 주 즈음으로 그것도 네가 정해서 알려줘."

"시간도 내가 정해?"

"응. 불법은 안되지만, 서로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줘야지. 친구잖아."

내 말에 그가 깨달음을 얻은 듯 따라했다.

"그치. 불법은 안되지만,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도와야지... 천재 맞는데?"

그 말에 내가 미소를 지었다.

이 놈. 유쾌한 놈 맞았다.

생각보다 친구가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냥 웃다가 중요한 사실이 생각났다.

까먹고 말을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아, 익명 경매로 진행해야 해."

"익명으로? 가면을 쓰고 말인가."

"그래. 무조건 익명으로 진행해야 해."

"이유가 무엇인가."

"미하일 네가 만약 상인이라면 낙찰된 상단을 가만히 둘 거야?"

부드럽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미소를 띄던 그의 표정에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제서야 마냥 쉽게 볼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

"내가 상인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도 강탈할 거야. 불태워도 좋지. 철광석 25대는 그 정도의 가치를 지녔어. 실제로 지난 3일 동안 20명이 넘는 상인들이 여길 찾아왔었고."

"...낙찰받은 상단이 당분간 철광석의 시세를 주도하겠군. 이해했다."

처음으로 이 곳에 와서 미하일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경매를 주도한다는 것은 책임감도 커진다는 것이다.

만약 경매 중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미하일이 책임지는 비율도 커진다.

"그렇기 때문에 비밀 경매로 할 생각이야. 각자 원하는 낙찰가를 적고, 그 중 가장 높은 금액을 써낸 사람이 낙찰되는 것이지."

"...그건 담합 때문에 그런가?"

"그치. 공개 방식으로 하면 한 상단이 낙찰 받고 자기들끼리 나눠 가질 수도 있으니까."

그 말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이유이니 별 다른 문제 없이 넘어갔다.

잠시 묵묵히 바닥을 쳐다보던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얼굴엔 고민의 흔적이 명백했다.

"그럴 수도 있겠어. 그런데... 그 것을 예상하고 나한테 일을 맡긴 거야?"

"미하일."

"뭔가."

"큰 보상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야."

"...이해했다. 나도 마냥 받을 수는 없는 법이지."

대화를 할 수록 똑똑한 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단지 영지를 나오고 싶어 공증인에 지원했다는 말에 무시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조심해야 한다.

친한 척 중요한 일을 떠넘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는데, 생각보다 친구라는 말의 힘이 컸다.

"아무튼 고맙다. 나중에 장소와 시간을 알려줄게."

"고맙긴, 나중에 밥이나 사."

"밥?"

아차. 여기는 한국이 아니었다.

"밥을 핑계로 또 만나자는 거지."

"에어로크 왕국 특유의 인사법 같은 건가? 알았다. 내가 다음에 밥 한 번 사지."

'K ­ 인사법인데'

뱉을 수 없는 말을 입 안에 굴리며, 떠나는 그를 배웅했다.

같이 왔던 기사는 끝끝내 불편한 얼굴이었다.

문을 닫고 뒤를 돌아보자 마틴 경도 어두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련님."

"알아요. 저도 이렇게 까지 친해질 생각은 없었어요."

"..."

"하지만 오히려 좋습니다. 의도는 없었지만, 상황이 좋아졌어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원래 고용하려 했던 용병을 반만 고용하세요."

"...돌아가는 길에 습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더군다나 알만 왕국의 상인들이 저희들의 생각을 알아채면 노골적으로 방해 해올지도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요."

그제야 그가 내 뜻을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천재 맞으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도 봉급은 못 올려드려요. 후작님에게 아부 떠세요."

"..."

큰 짐이 덜어졌다.

계획에 수정이 필요했다.

­­­­­­­­­­­­­­­­­­­­­­­­­­

늦은 밤이었다.

4개의 달 중 3개가 보이지 않는 그믐달, 에어로크 왕국에서는 검은 밤이라고 불렀다.

에르딘 상단과 만나는 날이 오늘이었다.

상인을 데리러 간 마틴 경을 기다리며 나는 혼자 게임을 하고 있었다.

며칠 전 광장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보게 된 게임이었다.

일종의 바둑과 비슷한 형식이었는데, 신기하게 게임 판에 지형이 있었다.

판의 중앙엔 성이 있었는데, 한 명은 수성, 한 명은 공성을 맡아 겨루는 게임이었다.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부터 삼국지, 마블, 토탈 워 등 전략 게임은 가리지 않고 할 정도로 전략 게임을 좋아했던 나는 며칠 전부터 혼자 게임을 하고 있었다.

이 게임. 생각보다 복잡하고 중독성이 높았다.

이 세계로 넘어와 처음으로 가진 취미 생활이었다.

그렇게 게임을 하고 있을 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마틴 경이 오셨습니다."

"들어오게 해."

문 밖에 서있던 시아라가 인사와 함께 문을 열었다.

이번에도 마틴과 두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회색 로브를 깊이 둘러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 명은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이었고, 한 명은 키가 작고 뚱뚱한 체형이었다.

'엄지와 중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인사를 했다.

하마터면 보자마자 웃을 뻔했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으시죠."

"저희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이 자리에 앉으며 로브를 벗었다.

둘 다 40대로 보였는데, 머리가 벗겨져 있다.

'이런 시발'

반전 개그였다.

잠시 고개를 밑으로 숙여 표정을 관리하곤 입을 열었다.

"제 소개를 드려야겠군요. 아시다시피 이번에 상행을 나온 지그하르트 가문의 후계자, 지그하르트 카인입니다."

"북에르딘 왕국의 밀럼 상단주 카벤입니다."

'그럼 엄지를 닮은 이쪽이 남에르딘의 상인인가?'

"...헤르트 왕국의 보르딘 상단주 보르딘입니다."

"헤르트 왕국이요?"

깜짝 놀란 내가 마틴 경을 바라봤다.

그러나 대답은 앞에서 나왔다.

"...제가 마틴 경을 설득해 같이 데리고 왔습니다. 우선 저희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들어보죠."

카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저희 둘 모두 철광석을 사기 위해 알만 왕국까지 왔습니다. 저희 왕국과 헤르트 왕국 모두 철광석의 공급이 굉장히 모자란 상태입니다."

"...잠깐, 에르딘 왕국은 내전 중이니 그렇다 쳐도, 헤르트 왕국까지 철광석이 필요하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내 질문에 이번엔 보르딘이 대답했다.

"...북쪽에 있는 다나크 제국의 군대가 저희와 맞닿는 국경 지대 쪽으로 군대를 보내고 있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지금 헤르트 왕국은 전쟁 준비에 한창입니다."

"...다나크 제국이요?"

대륙의 북쪽에 위치한 다나크 제국은 알만 왕국과 에어로크 왕국, 헤르트 왕국까지 합친 것보다 클 정도로 거대한 제국이었다.

추운 기후에 토양이 척박해 식량은 적었지만,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어 말을 키우기 쉬운 환경에 강력한 기마병과 수많은 기사를 보유한 제국이었다.

이번엔 북에르딘 왕국의 상인 카벤이 대답했다.

"예. 사실 철광석 스물다섯 수레의 분량은 한 개의 상단이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물량이 아닙니다. 고민을 하고 있다 마침 친한 보르딘이 생각나 같이 오게 됐습니다."

"저희 둘이 돈을 모은다면 대금을 충분히 지불할 수 있습니다."

나야 알만 왕국에만 팔지 않으면 상관 없었다.

비록 헤르트 왕국이 낄 줄 은 몰랐지만, 어차피 전쟁 준비에 한창이라면 대금을 적게 받을 일도 없어 보였다.

"뭐... 파는 건 가능합니다. 그런데... 대금으로 지불할 돈과 식량은 가지고 계시겠죠?"

"...그게 문제입니다. 알만 왕국에서 철광석을 살 생각으로 왔기 때문에, 돈은 충분히 들고 왔지만 식량은 거의 싣고 오지 않았습니다. 알만 왕국은 저희 에르딘 왕국보다 소출량이 많습니다."

"..."

구황 작물을 사가기 위해선 돈도 필요했지만, 당장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식량도 사야 했다.

물론 돈으로 식량을 다시 사도 됐지만, 몇십만 명이 먹을 식량을 사는 것은 하루 이틀 걸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저희가 생각해 온 것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헤르트 왕국에는 저희 상단 소유의 식량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져가시면 어떨...."

"너무 멉니다."

내가 단호하게 끊어냈다.

그럴 바에 그냥 여기서 사는 게 빨랐다.

'차라리 반만 팔고 반은 알만 왕국에 팔아야 하나?'

그것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알만 왕국에 철광석이 돌게 할 수는 없었다.

25대 분량의 철광석이 일제히 알만 왕국에 풀리면 철광석의 시세가 폭락할 것은 당연했다.

자연히 우리 영지를 제외한 다른 영지들은 식량을 사기 위해 더 큰 돈을 써야 했다.

'그건 안돼.'

고민에 빠진 내 표정을 보던 카벤이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곳 시세의... 1.5배를 더 쳐드리겠습니다."

"1.5배요?"

"예. 지금 저희 왕국과 헤르트 왕국 모두 철광석이 필요합니다. 도련님이 알만 왕국에 팔면, 저희는 더 비싼 돈을 주고 그 것을 다시 구입해야 합니다. 그럴 바엔 좀 손해를 보더라도 지금 빠르게 사는 게 낫습니다."

옆에 있던 보르딘도 같이 입을 열었다.

"부탁 드립니다. 만약 허락해 주신다면, 지금 바로 전령을 보내 저희 상단의 모든 식량을 모으라고 시키겠습니다. 빠르면 사흘 안에 적재가 가능합니다."

"겸사겸사 바다 여행도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여행이요?"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마차에서 지루해 하던 시아라가 생각났다.

바다 여행을 한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을까.

조금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제서야 내가 흥미로워하자 희망을 찾았는지 엄지와 중지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예! 에어로크 왕국엔 바다가 없지 않습니까? 이 기회에 바다 여행도 좋은 추억이 되실 겁니다!"

"헤르트 왕국에 오시면 다양한 해산물도 마음껏 드실 수 있습니다!"

'...해산물!'

이 세계로 넘어오고 나서 한 번도 해산물을 먹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운탕에 소주가 땡기기 시작했다.

광어 회에 초장이 생각났다.

"...해산물은 조금 당기는군요..."

꿀꺽

그제서야 내가 흥미가 동한 표정을 짓자 두 손가락이 침을 삼켰다.

헤르트... 헤르트라...

"...좋습니다. 헤르트 왕국으로 가도록 하죠."

해산물이라.

해산물.

이건 못 참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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