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7화 (17/191)

〈 17화 〉 눈곱만큼도 줄 생각 없습니다

* * *

"...저는 알만 왕국과 거래를 할 생각이 없습니다. 제 목표는 바다 건너 에르딘 왕국입니다.

"...뭐?"

"알만 왕국의 수도를 지나 3일 정도 더 가면 대륙에서 가장 큰 무역 도시인 포르트 항구가 있는 것은 아실 겁니다. 그 곳에서 에르딘 왕국의 무역 상을 만날 예정입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보는가."

상행을 떠나기 전 나는 시아라의 도움을 받아 틈틈이 대륙의 지도를 보며 각 나라의 문화와 경제를 공부했다.

깊은 내용까진 시아라도 알지 못했지만, 기본적인 내용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됐다.

알만 왕국에서 뱃길로 일주일 정도 가면 헤르트 왕국이 나왔고, 거기서 다시 일주일 정도 뱃길로 움직이면 에르딘 왕국이 나왔다.

바다 건너 에르딘 왕국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 내전이 한창이었다.

왕국 대부분이 평야로 이루어져 식량은 넉넉했지만, 산지가 적어 무기를 만들기 위한 철광석이 모자랐다.

그들은 결국 알만 왕국에서 비싼 값에 철과 말을 사 충당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철광석을 팔고 식량을 사올 생각이었다.

요컨대, 중간 과정을 뺀 직거래였다.

"가는 길이 위험함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위를 최대한 늘리기 위해 모든 철광석을 가져온 겁니다.

"..."

철광석의 가치는 헤아릴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인원이 적을수록 사고가 발생할 확률이 높았다.

혹시라도 모를 습격에 대비해 인원을 최대로 늘려왔다.

계획엔 없었지만, 만약 아슬란 백작이 여기서 상행에 참여하고 싶다고 한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었다.

병력이 많을수록 상행은 안전했다.

하지만 먼저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나와 백작 중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이 아쉬운 사람이 될 게 뻔했다.

최대한 그에게서 많은 것을 빼 먹어야 했다.

나는 속마음을 숨긴 채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내 계획에 귀가 솔깃했던 후작은 내 얼굴을 보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 연기를 잘 하는구먼."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아쉬운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겠지. 나도 이번 상행에 함께하고 싶다네."

"으음... 갑작스럽군요. 지금 바로 답변을 드리기 어려울 듯 합니다."

"...내가 최대한 지원해 줄 테니 그만 튕기고 본론이나 들어가지."

역시 아무나 귀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의 의미를 꿰뚫고 있었다.

그를 속이기에는 아직 내 내공이 부족한 듯 했다.

"...흐흠. 티가 났습니까?"

"내가 도박판에서 백작 위를 딴 줄 아나?"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얼마까지 지원 가능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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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도시에서 3일을 쉬고 난 뒤, 다시 알만 왕국을 향해 행렬이 움직였다.

이 곳에 도착하기 전보다 훨씬 긴 행렬은 장관이었다.

350명의 병사와 무려 25대의 수레, 100명이 넘는 잡부들까지 약 500여명이 움직이는 대행렬이었다.

국경지대의 성을 나온지 2일 째 되는 날 저녁이었다.

온 사방이 평야였기에 쉴 곳은 많았다.

마차에서 나와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옆에서 밥을 먹던 로그멜 경이 말을 꺼냈다.

"내일부터는 완벽히 알만 왕국의 영역입니다."

"...조금 긴장하고 있어야겠군요."

"예. 평소 저희 왕국을 오가던 상단이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

"오늘부터 불침번을 조금 더 멀리까지 세워주세요. 인원도 늘려주시고요."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는 로그멜 경의 표정에 약간의 긴장감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덩달아 나도 긴장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밥을 다 먹고 마차로 돌아오자 시아라가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왔어?"

피곤한지 그녀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응. 내일부터 알만 왕국의 영역이래. 시아라,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마차 안에서 나오지 마."

"...설마"

"설마가 사람 잡아. 이렇게 행렬이 많으니까 혹시 모르지만, 대비해서 나쁠 건 없어."

"...알겠어."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랬다.

수 백의 사람이 함께 움직였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단순히 수레를 부수고 도망치는 것 즈음은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전혀 다른 걱정을 해야만 했다.

"..."

"..."

"어떻게 할까요?"

"...일단 이야기는 들어봐야겠습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은 5명의 상인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에도 상인으로 보이는 십 수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나와 마주 보고 있는 사람들의 힘에 밀린 건지 뒤에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가져오신 분량을 제가 모두 매입하겠습니다!"

"무슨 소리! 도련님! 제가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값을 잘 쳐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알만 왕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포킨 상단을 운영하는 분의 대리자입니다! 저희가 가장 비싸게 매입하겠습니다!"

평야로 접어들었을 때, 저 멀리 엄청난 수의 수레와 마차가 나란히 주차 되어 있는 것을 봤다.

아무것도 없는 이 곳 에 사람들이 몰려있을 이유는 없었기에 자연히 병사들에게 주의를 주고 천천히 접근 중이었다.

그 때, 지그하르트가문의 깃발을 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었다.

...지금 이 곳에서 팔 수는 없었다.

아무리 잘 쳐준다 하더라도 아르덴 왕국과의 이득의 반도 안되는 금액일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바로 거절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돈을 들고 왔지만, 내일은 칼을 들고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봐선 백이면 백이었다.

아무리 400명이 넘는 병사들이 있다고 하지만, 큰 피해를 입게 되면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아무런 호위도 없이 알만 왕국을 가로지르는 것은 자살 행위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최악은 아니었다. 정말 최악은 이들이 처음부터 칼을 들고 오는 일이었다.

아직은 대화의 길이 남아있었다.

이들이 아직 힘을 합치지 않은 지금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여러분들의 뜻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곳에서 팔 수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차분히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여기서 철광석과 맞바꿀 식량과 금을 가져오신 분이 계신다면 거래를 응하겠습니다."

"..."

내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25대 분량의 철광석을 바꿀만한 식량은 아무리 싸게 쳐도 수레만 100대가 넘었다.

거래가 될 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100대가 넘는 식량을 움직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툭 터놓고 말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이 곳에서 한 분과 계약을 한다는 것은 그 외 모든 분들과 적이 되는 것을 압니다."

"..."

"만약 여기 계신 분들이 저희가 가는 길을 방해하기 시작하면, 저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것이 현명합니다."

25대 분량의 철광석을 매입 한다는 것은 알만 왕국에서 철을 유통하는 가장 큰 상단이 됨을 뜻했다.

자연히 계약을 따지 못한 상인들은 죽을 힘을 다해서라도 막아야 할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저와 계약한 상단도 안전하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

"저는 포르투 항구로 가고 있습니다. 그 곳에서 공평하게 공개 경매를 할 생각입니다."

"경매 말씀이십니까?"

"예. 그 곳에서 알만 왕국의 공증을 받아 경매를 할 생각입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으음..."

내 말을 들은 상인들이 각자 생각에 빠졌다.

사실 이들도 무작정 칼을 들고 달려드는 것이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병사의 숫자만 400명에 기사까지 있었다.

하나의 상단에서 공략하기엔 너무 많은 호위였기에, 필연적으로 다른 상단들과 힘을 합쳐야 했다.

그러면 자연히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파이가 적었다.

에어로크 왕국과의 사이가 나빠지는 것을 감안하고 공격할 생각이었지만, 내 말대로 자신들이 철광석을 탈취한다고 해도 또 다른 상단의 습격을 받을 확률이 높았다.

그들에게도 강제적인 탈취는 최후의 선택이었다.

이런 일이 생길 것은 예상했기 때문에 호위를 최대한 데려왔다.

하지만 너무 많은 병사는 알만 왕국의 경계를 살 수 있었다.

알만 왕국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나는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가장 많은 수를 데려왔다.

고민에 빠져있는 그들에게 쐐기를 박기 위해 나는 한번 더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신 분들이 각 상단의 대리자임을 압니다. 저는 어차피 포르투 항구로 갈 생각이니 상단에 연락을 취하면서 같이 움직이는 건 어떻습니까?"

"같이...말입니까?"

누군가가 말했다.

"알만 왕국에서 철광석을 원하는 상단이 여러분만 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럼,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군요."

"..."

"지금 여기서 계약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부분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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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시간이 갈수록 행렬이 길어졌다.

500명 가까이 되던 인원에 또 다시 60명이 넘는 인원과 십 수대의 마차가 행렬의 끝에 달라붙었다.

다행히 잘 넘겼다.

최악의 경우 다시 돌아가야만 했는데, 다행히 그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포르투 항구까지는 안전하게 갈 수 있게 되었다.

돌아오는 건 또 다른 문제지만.

마차 안에 앉아 가만히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틴 경이 말을 돌려 내 곁으로 다가왔다.

창문 가까이 붙은 그가 나지막이 이야기를 꺼냈다.

"도련님의 기지에 감탄했습니다. 정말 다행히 고비를 넘겼습니다."

"뭘 요. 한 것도 없는데요."

"한 게 없다니요. 사실 저도 경매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대단한 순발력이었습니다."

"급하게 생각한 거라 통할지 자신이 없었는데, 운이 좋았네요."

"비록 공개 경매로 어느 정도 물량은 알만 왕국으로 넘겨야 하겠지만, 에르딘 왕국과 거래할 분량은 남을 듯 합니다."

"경매 안 할 겁니다."

"...예?"

"알만 왕국에는 단 한 수레도 안 줄 생각입니다."

경매는 거짓말이었다.

나는 경매로 알만 왕국에 팔 생각이 눈곱 만큼도 없었다.

설사, 알만 왕국의 상단들이 에르딘 왕국보다 비싸게 산다고 해도 난 팔 생각이 없었다.

'헤르트, 에르딘 왕국과 교류를 해야 한다.'

원교근공, 내가 바라는 계획이었다.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진 행렬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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