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6화 (16/191)

〈 16화 〉 어디까지 간을 보는 거야

* * *

저 멀리 국경 지대가 보였다.

에어로크 왕국의 유일한 평야 지대에 있는 성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이 주 동안 이동에 이동을 반복한 끝에 에어로크 왕국의 국경까지 도착했다.

처음 삼 일간은 끝 없는 내리막길의 반복이었다.

끝도 없이 내려가는 마차에 기가 질렸었다.

'얼마나 높았던 거야.'

"왕국의 서부와 북부는 저희 영지가 있는 남부보다 더 높다고 합니다. 우리 영지는 동쪽의 평야 지대를 제외하곤 가장 낮은 편이라는 거죠."

내 질문에 대한 로그멜 경의 대답이었다.

그 말을 듣고 더욱 기가 질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옆에서 졸고 있는 시아라를 깨웠다.

할 일이 없다지만 엄연히 근무 시간이었다.

자는 모습이 귀여워 가만히 내버려 뒀었지만, 일어나야 할 때였다.

"시아라. 이제 거의 다 도착했어. 일어나."

"으응...? 아니야. 나, 나 안 잤어"

"일로 와봐."

"응?"

"침부터 닦고 다시 말해보자."

"...!"

내 말에 시아라가 빠르게 고개를 돌리곤 입을 가렸다.

내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는지 귀가 빨갛게 변하는 게 보였다.

얼굴을 돌린 채 입가를 더듬대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 안 흘렸는데?"

"맞아. 뻥이야."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안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이렇게 놀리는 맛이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또 장난쳤어..."

"시아라."

"왜..."

그녀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그녀의 토라진 얼굴을 싱글거리며 바라보던 내가 다시 말을 걸었다.

조금 더 놀리고 싶었다.

"선택지를 두 개 줄게. 하나 선택해봐."

"선택지?"

"1번. 나에게 애교 부리면서 뽀뽀 해주고 넘어가기."

"..."

"2번. 나중에 시녀장님에게 혼나기."

"...헤헤."

그 말에 시아라가 움찔거리더니 베시시 웃으며 나에게 다가와 뽀뽀를 했다.

시녀장이 무섭긴 한가 보다.

생각해보면 이 곳에 온 첫 날에도 나를 깨우러 왔던 그녀는 뒤이어 들어온 시녀장의 모습에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였었다.

"...말 안 할 거지?"

"한 번 더 해주면."

"진짜 비밀이야...?"

"왜 이렇게 귀여워."

나이는 성인이었지만 아직 소녀티가 나는 그녀였다.

행동 하나하나가 귀여웠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창 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성이 한층 가까워져 있었다.

잠시 후 행렬이 가까이 도달하자 성문이 열렸다.

문 안에는 여러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가신 둘과 함께 모여있는 그들에게 갔다.

인파의 정 중앙에 한 눈에 봐도 높아 보이는 사람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 키가 컸고, 옷 안으로도 근육들이 느껴졌다.

굳게 다문 입술과 시원하게 뻗은 눈썹이 누가 봐도 군부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지르하르트 후작 가문의 장남, 지그하르트 카인입니다."

"어서 오게. 나는 이 성의 영주인 아슬란 백작이네."

생각보다 거물이었다. 조금 더 공손하게 말을 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슬란 백작님. 이렇게 직접 환대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큰 상행은 우리에게도 흔치 않은 일이지.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 하지. 자네와 할 말이 조금 있네"

할 말? 할 말이 있다고?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생각은 나중에 하고 일단 대답부터 했다.

"알겠습니다. 행렬을 정리하고 바로 따라가겠습니다."

"으음, 그렇게 하게."

말을 마친 그가 사람들을 이끌고 먼저 뒤돌아 갔다.

나는 빠르게 몸을 돌려 두 가신에게 명령을 내렸다.

"로그멜 경. 우리 행렬이 너무 커서 성 안으로 들어오기 힘들 겁니다. 성 밖에 숙영지를 펼쳐 주시고 대기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마틴 경은 저와 함께 내성으로 가시죠. 아슬란 백작님과의 대화 중에 조언을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두 가신에게 말을 마친 나는 다시 마차로 돌아갔다.

시아라가 마차 안에서 대기 중이었다.

마차를 나간 내가 말도 없이 사라지면 걱정할 터였다.

문을 열어 고개만 집어넣은 후, 시아라에게 말했다.

"시아라. 나 내성에 다녀올게. 이 곳에서 기다리고 있어."

"같이 안 가도 되는 거야?"

"응. 아슬란 백작님과 대화만 하고 바로 올 거야."

"알겠어. 잘 하고 와."

"뽀뽀해주면 힘이 날 것 같은데."

"...어휴."

"흐흐. 금방 다녀올게."

"응. 이야기 잘 하고 와!"

마차를 다시 나오니 마틴 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가죠."

"...예."

나를 쳐다보는 그의 표정이 묘했다.

할 말이 있는 얼굴이다.

"뭔가 생각할 게 있으십니까?"

"시아라양과 사이가 좋으시군요."

"뭐... 좋은 편이긴 합니다."

그 날 밤의 일을 저택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람도 나와 시아라의 사이를 알고 있을 것이다.

괜히 민망해진다.

유일하게 모르는 사람은 시아라 뿐이었다.

부끄러움이 많은 그녀가 그날 밤의 일을 저택 내 모든 사람이 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기절을 하리라.

마틴 경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고민을 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에 잠긴듯한 얼굴이었다.

"마틴 경."

"예."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셔도 됩니다. 저를 위해 하시는 말씀임을 알기 때문에 기분 나쁠 일은 없습니다."

내 말에 그가 잠시 주저하더니 한결 편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일이 시녀에게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였습니다. 저희들과 있을 때는 상관없지만 알만 왕국에선 조금 자제하셔야 합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저희의 상행을 바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바라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국경을 벗어나면 행동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울이셔야 합니다."

그제야 에어로크 왕국을 순회하며 철광석을 직접 수입하는 알만 왕국의 상인들이 생각났다.

그들에겐 철광석 매매의 가장 큰 고객이 사라진 셈이었다.

그들이 이 상행을 방해하기 위해 무슨 짓을 저지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조언 감사드립니다."

"지나친 간섭일까 고민했는데 다행입니다."

"덕분에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외국은 우국이 될 수 있었고, 적국이 될 수도 있었다.

만약 알만 왕국에서 이 상행이 실패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나와 시아라의 관계를 알게 된다면, 표적이 시아라로 향할 것이 뻔했다.

나에 대한 모든 정보는 숨길수록 이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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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마틴 경은 성 내의 응접실로 안내 받았다.

'할 말이라는 게 뭐지?'

이 곳을 넘어가면 바로 알만 왕국의 영역이었기에 이 곳에서 쉬면서 며칠 정비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백작을 만날 예정은 없었다.

하녀가 내온 차를 마시며 생각에 빠져있었다

"...아마 백작은 이번 상행을 기회로 보고 있을 겁니다."

내 옆에서 차를 마시던 마틴 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단을 운용하지 않고 이렇게 직접 움직인 경우는 전례가 없습니다. 성공만 한다면 큰 이득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백작도 상행에 참여하기를 바란다는 뜻인가요?"

"높은 확률로 그렇습니다. 다만, 실패했을 때를 염두에 두어 저희처럼 모든 철광석을 움직이진 않을 듯 합니다."

"저희와 함께 이번 상행에 참여해 지속할 수 있는 지 가능성을 보겠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가능만 하다면 지금보다 몇 배의 수익이 나올 테니까요."

거기까지 이야기를 마치자 갑자기 궁금증이 떠 올랐다.

"왜 지금까지는 아무도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까? 예상되는 수익을 생각하면 충분히 해볼 만한 일인데 말입니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저희 후작령은 채광량이 높아 다른 곳에 비해 상황이 괜찮은 편입니다. 만약 이번 상행이 실패해도 힘들어도 버틸 힘이 남아있습니다."

"...그럼 다른 영지는..."

"예. 한 번만 실패해도 영지가 파산하고 기아로 죽는 사람이 쏟아질 겁니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겁니다."

"..."

"알만 왕국에 식량을 대부분 의존하는 기형적이고 불평등한 구조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도전할 용기가 없었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죠. 아직은 정말 죽을 만큼 어렵진 않으니까요."

흉년이 든 해에는 철광석을 급하게 처분해 식량을 마련한다.

그렇게 한 번 떨어진 시세는 다시 오르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이 몇 번 반복되면 점점 더 싼 값에 더 많이 팔아야 똑같은 양의 식량을 마련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다.

당장 영주민들이 굶어 죽고 있는데 느긋하게 원인을 해결할 방법 따위를 고민하고 있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렇게 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의 시작이다.

당장 우리 영지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국가 차원에서의 해결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님께서 들어오십니다."

그 말에 마틴경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기다리자 아슬란 백작이 들어왔다.

"미안하군, 내 가신들과 할 일이 생겨서 조금 늦었네."

"괜찮습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일단 자리에 앉지."

"예."

그렇게 자리에 앉자 백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자네를 불렀는지 궁금하겠군."

"조금은 그렇습니다."

"...그것에 앞서 이번 상행에 철광석을 얼마나 팔 생각인지 알려줄 수 있는가?"

"수레로 15대 분량입니다."

"허..."

생각보다 많은 분량이었는지 후작의 기가 질린 듯 했다.

"...왕국으로 보낼 세금을 제외하곤 전부 가져온 건가?"

"그렇습니다."

"...지그멜 후작님께서 자네를 매우 신뢰하고 계신가 보군."

"하하... 저도 설득하는데 애 좀 먹었습니다. 쉬운 결정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쉬운 결정은... 결코 아니지..."

거기까지 말한 후작이 잠시 내 눈치를 살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했다.

"음... 혹시 어떤 방법으로 후작님을 설득했는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더 들어볼 것도 없었다.

백작은 지금 상행에 끼고 싶어했다.

'내 말을 듣고 말을 꺼내거나, 안 꺼내겠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백작이 이번 상행에 함께 한다면 나에겐 큰 이득이었다.

"저는 이 왕국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움직였습니다."

"...근본적인 해결?"

"그렇습니다. 알만 왕국에 식량을 의존하는 이 불공평한 관계를 끊어내고자 합니다."

"...그게 가능하다는 건가."

"제 계획으로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혹시... 그 계획도 말해줄 수 있는가."

'어디까지 간을 보는 거야. 이 양반이'

생각보다 뻔뻔했다.

하지만 그렇게 까지 낯짝이 두껍진 않은지 살짝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아니야...결국 아슬란 백작도 개미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무임승차를 하겠다는 태도는 뻔뻔스러웠지만, 식량난의 해결을 위해 나를 부른 사람이었다.

어쨌든 뜻을 함께하는 동지였다.

하지만 계획은 극비였다.

만약 알만 왕국에서 알게 된다면 온 힘을 다해 이번 상행을 방해할 것이 분명했다.

말을 할지 말지 고민에 빠져 있던 그 때, 마틴 경이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군에겐 말해도 된다는 뜻이겠지.

주위를 잠시 둘러본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알만 왕국과 거래를 할 생각이 없습니다. 제 목표는 바다 건너 에르딘 왕국입니다.

"...뭐?"

"알만 왕국의 수도를 지나 3일 정도 더 가면 대륙에서 가장 큰 무역 도시인 포르트 항구가 있는 것은 아실 겁니다. 그 곳에서 에르딘 왕국의 무역상을 만날 예정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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