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희망
* * *
"내일 출발이구나. 준비는 다 끝났느냐."
"예. 이제 출발만 하면 됩니다."
후작과 나는 집무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계획을 최종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나와 후작, 그리고 같이 가는 두 가신과 함께 회의를 한 후였다.
드디어 내일 출발이었다.
나를 보는 후작의 표정엔 걱정이 담겨있었다.
기억을 잃었다는 놈이 영지를 뛰쳐나가려고 하니 걱정이 안 될 리 없겠지.
"잘 할 수 있겠느냐."
"잘 해내고 오겠습니다."
"...그래. 마틴 재무관이 너를 잘 보좌해 줄 것이다."
"예."
거기까지 이야기를 마친 후 잠깐 침묵이 맴돌았다. 이제 슬슬 돌아가서 짐을 쌀까. 찻잔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후작에게 돌아간다고 말을 하려는데,
"...시아라는 데리고 갈 것이냐?"
"예?"
"네 전담 시녀 말이다. 데리고 갈 것인지 물었다."
시아라 얘기였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들은 바에 따르면 이 영지에서 국경까지 이 주, 또 알만 왕국의 수도까지 삼 주 정도 걸린다 했다.
가서 물건을 사고 팔 생각까지 하면 세 달 가까이 걸릴 상행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가기엔 너무 험난한 여정이었다.
"...놓고 갈 생각입니다."
그 말에 후작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입가엔 악동 같은 미소가 씨익 올라오는데, 본능적으로 불길함이 올라온다.
"이미 잡은 물고기는 놔두고 또 낚시하러 가느냐."
"예?"
"너도 동정 아니었느냐? 밤 기술이 화려한가 보구나. 얼마나 급했으면 문도 제대로 안 닫고 했느냐."
"...!"
'...시발'
방문이 열려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어쩐지 요 며칠 시녀들과 집사들의 시선이 이상했다.
"...아님, 네 시녀가 연기력이 좋은가?"
"그건 아닙......"
"크하하하!"
"..."
후작이 무릎을 치며 웃었다.
놀린 적은 많지만 놀림을 받는 건 어색했다.
할 말이 없는 나는 그가 웃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한참을 웃던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데려 가거라."
"예?"
"데려 가라는 말이다."
"...무슨 이유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기사단장도 이 사실을 모를 것 같으냐. 딸을 놓고 네가 혼자 나가면 그가 참으로 좋아하겠구나."
"..."
"그 놈과 나는 벌써 40년 가까이 친구 관계다. 너 때문에 그 놈과 사이가 어색해지는 건 싫다."
고민이 거듭됐다.
다른 여자를 만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나도 아직 이 곳의 분위기를 몰랐다.
혹시나 이 세계가 생각보다 흉흉하다면, 나도 내 한 몸 지키는 것이 힘들 터였다.
무슨 일이 생기면 지켜줄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으나 저는 세상 밖의 분위기를 모릅니다.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녀를 지켜줄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후작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다시 웃기 시작했다.
'왜 웃어?'
"어디 단 둘이 신혼여행이라도 가는 줄 아느냐. 철을 실은 수레만 15대다. 병사만 200명에 기사단도 함께 가는데 뭐가 위험하단 말이냐."
"200명이요?'
"그럼, 우리 후작 가문의 채굴량이 그 정도도 안될 줄 알았느냐. 에어로크 왕국에서 가장 많은 철광석이 나오는 곳이 우리 영지다."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클클클. 아니면 정말로 다른 물고기라도 낚아오려 했느냐."
"...아닙니다."
"괜찮다. 물고기를 낚는 것은 어디까지 네 능력이니 말이다. 단, 잡은 물고기들을 잘 관리할 수 있다면 말이지."
"..."
"아무튼 그렇게 알고 준비하거라. 내일 보자 꾸나."
"...예. 일어나 보겠습니다."
내일 상행을 떠나길 잘 했다. 쪽팔려서 당분간 저택 안에선 고개도 못 들고 다닐 뻔했다.
방으로 들어오자 시아라가 우울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내가 그녀를 놓고 간다는 말을 한 이후부터 계속 저 상태였다.
그녀도 충분히 사정을 이해했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은 다른 감정이기에.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뒤에서 안으며 속삭였다.
"시아라"
"응..."
"얼른 짐 싸."
"...뭐?"
"내일 같이 가자."
"정말로?"
"응. 정말로. 허락 받고 오는 길이야."
그녀가 내 말에 휙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동그란 눈이 어느새 반짝이고 있었다.
"갑자기 왜 마음을 바꿨어?"
"난 많아야 20명 즈음 가는 줄 알았는데, 병사만 200명이 함께 간대. 기사도 따로 있고."
"그렇게 많이?"
"응. 수레만 15대 움직인대"
"와... 나 마을 밖은 처음 나가 봐."
"나도 처음이야. 이제 얼른 준비 해."
"응!"
그녀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한 번 껴안고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놓고 갔으면 큰일 날 뻔했다.
날씨는 맑았고 구름 한 점 없었다.
내성과 외성의 사이에서 출발 준비를 마치고 잠시 기다리자 후작이 다가왔다.
"잘 다녀 오거라... 너는 지그하르트 가문의 후계자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느 곳이라도 너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예. 아버님."
내 말에 후작은 고개를 돌려 내 옆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마틴 경, 로그멜 경. 자네들을 믿네. 내 아들을 잘 보좌해주길 바라네."
그 말에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가 대답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커다란 덩치와 달리 순박한 얼굴이었다.
"맡겨만 주십시오. 무사히 다녀오겠습니다."
"예. 빠르게 다녀오겠습니다."
두 번째로 대답한 사람은 재무관 마틴 경이었다.
그 역시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곱게 다듬은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저번의 회의록 사건으로 원래의 재무담당관은 옥에 갇혔다.
그는 그의 뒤를 이어 새로 임명된 관리였다.
"아버님. 다녀오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한 나는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에는 메이드복을 입은 시아라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공식적으로 나를 수행하는 근무 중이었다.
그 것과 별개로 성 밖으로의 첫 여행인지 그녀의 기분이 설레 보였다.
"창문 열고 갈까?"
"그러자. 바깥 풍경을 보고 싶어."
시아라가 설레는 표정으로 창문을 열었다.
마차가 앞으로 천천히 가기 시작했다.
말을 타지 못해 걱정했는데, 다행히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후작가의 후계자가 마차도 없이 행렬을 이끄는 것도 이상할 듯했다.
그렇게 1대의 마차와 15대의 수레, 200명의 병사와 20명의 기사, 마지막으로 수레를 끄는 약 70명의 잡부까지 총 300여명의 행렬이 출발했다.
7월이라 조금 더울만 하지만, 후작 영지 자체가 산지에 있었기에 생각보다 선선했다.
영주민들의 주거 지역은 크게 두 군데였다. 후작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내성은 말 그대로 후작과 가신, 기사들이 살아가는 공간이었다.
보통 영주민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내성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내성과 외성 사이에는 상업에 종사하는 영주민들이 주로 살았다.
식당과 여관, 모험가 길드, 마법사 길드, 시장과 신전이 이 곳에 있었다.
외성 밖에는 농사를 짓거나, 광부를 업으로 삼고 있는 영주민들이 살았다.
마지막으로 성과 떨어져 독립된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도 있었다.
후작성에서 갈라져 나오는 길을 따라 가깝게는 2시간, 멀게는 하루거리 까지 여러 마을이 존재했다.
외성 밖으로 나오자 풍경이 달라졌다.
건물들의 키가 작아졌고, 대부분 1층 집이었다.
그리고...
"...?"
"뭐야...?"
시아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틴 경, 로그멜 경. 잠시 물어볼 게 있습니다."
나는 마차의 바로 앞에 가던 두 가신을 불렀다.
그들이 천천히 속력을 줄여 마차 옆에 섰다.
"무슨 일 이십니까?"
"...왜 이렇게 다들 말랐습니까?"
"..."
처음 내게 대답했던 로그멜이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마틴 경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춘궁기이기 때문입니다."
"...춘궁기요?"
"예. 여기 뿐 아니라 대부분의 영주민들이 굶고 있습니다."
"...보통 몇 월까지 굶주립니까."
"하곡이 모두 자라는 8월 중순까지는 이어질 겁니다."
"..."
이 곳은 고도가 높아 다른 곳보다 기온이 낮았다.
자연히 7월이면 수확하기 시작하는 보리 같은 하곡들이 늦게 성장했다.
불과 한 달 전에 구슬로 봤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움푹 패인 볼이 더 패어있었다.
구슬로 본 풍경과 두 눈으로 본 현실이 달랐다.
그제야 주변 숲의 나무들이 보였다.
...나무들의 껍질이 모두 벗겨져 있었다.
"..."
6.25전쟁 직후의 대한민국을 직접 보면 이런 느낌일까.
나는 창 밖을 쳐다보는 시아라를 향해 눈을 돌렸다.
그녀도 기대 밖의 풍경으로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제야 이 상행의 중요성을 새삼 느껴졌다.
'성에서 그녀와 놀고 있을 때가 아니었어.'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탐관오리가 생각났다.
백성들이 굶어 죽든 말든 자신의 배만 부르면 끝인 돼지들이 떠올랐다.
'지금이라도 바꾸면 된다.'
일주일 전 대전에서 있었던 회의가 생각났다.
낭비하던 예산을 찾아 정리하고 추가적인 여유금을 만든 나를 보며 놀라던 후작과 가신들이 생각났다.
심지어 식량난을 해결 할 수 있다는 말에 영지의 모든 철광석을 내 손에 맡겼다.
'후작도 이 식량난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거야. 못한 것일 뿐.'
그 때, 그동안 묵묵부답이었던 로그멜 경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도련님. 저도 기사가 되기 전까지 이 곳에서 살았습니다. 매일이 고통이었습니다.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먹을 걱정 뿐이었습니다."
"..."
"이번 상행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습니다. ...도련님께서 직접 나서주신 것을 모든 영주민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은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제야 창문 밖 사람들에게 다시 시선이 갔다.
외성에 사는 사람 모두가 이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기대가 보였다.
나에게 기댄 희망이었다.
"...서류 상으로 봤을 때와 직접 바라보는 영지는 괴리감이 얼마나 큰 지는 깨달았습니다. 조금 부끄럽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저희에겐 희망이 됩니다. 삶을 바꿔주리라는 의지가 보이니까요."
"..."
"정말로 도련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상행이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천천히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이 곳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뜨거웠다.
아주 뜨거운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채굴한 철광석을 나에게 맡겼다. 저들의 미래를 나에게 맡겼다.
'이 한심한 새끼야.'
창문을 닫았다. 방금 전까지 희희낙락거린 스스로가 부끄러워 저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갑자기 느릿한 마차가 원망스러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