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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책사 시점-12화 (12/191)

〈 12화 〉 허벅지 볼래?

* * *

사실 생각해보면 태어날 때부터 1살로 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했다.

아무런 의심도 없었던 스스로가 더 어이가 없었다.

'허...여태 까지 삽질했네.'

마지막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던 적이 몇번이었던가.

이젠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휴가 첫 날, 나 때문에 잠을 설친 그녀는 어제도 나와 따로 잤었다.

오늘 아침의 일로 그녀의 기분도 별로였다.

평소 같았으면 다음을 노렸겠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 동안의 삽질로 더욱 그랬다. 무언가 방법이 필요했다.

뜨거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가 당황하며 말했다.

"왜... 왜 그래... 또 장난치려는 거지...!"

"시아라."

"...왜"

"우리 둘이 술 마신 적 있어?"

"둘이? 아니 한번도 없어."

"그럼... 지금 한 번 같이 마셔볼까?"

전혀 뜻 밖의 말이었을까. 설마 내가 술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는지 눈동자에 놀람이 떠올랐다.

"지금?"

"응. 휴가 마지막 날이기도 하고, 나도 기억 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고 싶어서."

"..."

"기억 잃은 날 보면서 혼자 슬퍼할 때마다 나는 미안함에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 내 잘못인 것 같아서."

원래부터 마음이 여린 그녀다. 자책하는 내 말에 그녀가 슬픈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아니야! ...그런 생각 하지 마."

"그러니까 오늘 나랑 술 마시자. 다음에 이 날을 회상할 땐 나도 같이 추억 할 수 있게."

"...알겠어. 마시고 싶은 술 있어?"

결국 그녀가 넘어왔다.나는 웃으며 말했다.

"하나도 기억 안나. 그냥 시아라 네가 준비해줘. 기다리고 있을게."

"...미안해. 얼른 다녀올게."

조금 약한 소리를 했더니 그녀가 수락해줬다.

그녀가 거절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에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녀를 보내고 나는 욕실로 들어왔다. 그녀가 오기 전 할 일이 많다.

합법이다.

합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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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와인병이 열렸다.

그녀는 화이트와인 한 병과 위스키 한 병, 간단한 과자와 과일들을 씻어왔다.

순혈 한국인인 나는 소주가 먹고 싶었지만, 이 곳에선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여자들이 좋아했기에 와인도 가끔 마셨던 나는 그녀의 안주 선택에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시아라 술 많이 먹어봤어?"

"아니? 집에서 몇 번 먹어본 게 전부야."

"그런 것 치곤 안주를 잘 챙겨와서."

그 말에 그녀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화이트와인을 좋아하시거든... 집에서 항상 차려드렸던 안주랑 비슷하게 가져왔어."

헥슬러 경의 점수를 딸 좋은 정보가 들어왔다.

비스킷을 한 입 깨물면서 머리 속에 기억하며 말을 이었다.

"익숙한 걸로 가져온 거야?"

"응... 사실 술도 화이트와인 밖에 안마셔 봤거든. 헤헤"

귀여운 대답에 웃음이 나왔다.

혹시나 그녀가 술을 잘 마시면 어떡하나 고민했는데, 반응을 보아하니 그런 것은 아닌 듯 했다.

와인잔을 들어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자, 짠"

"짠?"

내 행동을 따라하면서도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오늘도 슬립을 입고 있었다.

살짝 들린 팔 사이로 매끈한 겨드랑이가 보였다.

안주가 따로 없다.

나는 대답 대신 가볍게 잔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와인잔이 부딪히는 묵직하면서도 맑은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이게 뭐야?"

"이제 너랑 나랑 술 마실 때마다 할 거."

"...술 잔이 깨지지 않을까?"

"이 술 다 마시기 전엔 안 깨져."

"푸훗"

향이 꽤 좋았다.

잠시 냄새를 맡다가 입을 대 한 입 마셨다.

과일 향이 진하고 달달한 것이 도수가 높은 포트와인 종류 같았다.

거진 두 달 만에 마시는 술이었다.

여전히 소주가 생각나긴 했지만, 충분히 만족했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지난 한 달 간의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콧노래가 나와 조금 흥얼거리자 시아라가 나를 보며 살포시 웃었다.

"기분 좋아 보여."

"오랜만이라 그런가 봐. 기분이 좋네."

"와인은 괜찮아?"

"응. 잘 골라 왔는데? 맛있어."

"그래? 아빠가 좋아하던 술이라 가져왔어."

"...이걸?"

"응... 그런데 자주는 안 드시고 가끔? 좀 비싼 가봐. 아껴 드셨었어."

웬만한 소주보다 도수가 높은 와인이었다.

어지간한 주당이라는 소리다.

"시아라 너도 마셔봤어?"

"아니? 한 번도 안 주셨는걸..."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나 덕분에 뜻 밖의 소원 성취 중이었다.

"먹고 싶은 만큼 마셔. 또 가져오면 되지."

"근데... 나 술은 잘 못 마셔... 헤헤"

"취하면 어때. 다섯 걸음만 걸어가면 침대인데."

"싫어... 방에 가서 잘 거야."

"내가 괴롭혀서?"

"응."

그동안 장난을 많이 치긴 했다. 마주 앉아 그녀와 술을 먹고 있으니, 새삼 미안한 감정이 올라왔다.

"미안해. 내가 좀 심했지? 앞으로 좀 자제할게."

"으음... 그 정돈 아닌데... 싫은 건 아니고 그냥..."

"자, 사과의 의미로 짠."

"푸훗, 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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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화이트와인을 다 비우고 위스키를 마셨다.

둘 다 낮은 도수의 술이 아니었다.

전의 몸 보다 주량이 낮은지 조금씩 시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도 발그레한 얼굴로 식탁에 턱을 기대고 있었다.

"이제 슬슬 정리할까?"

"으응? 아직 이거 남았는데?"

"시아라 취한 것 같아."

"아냐. 나 아직 멀쩡해."

"..."

지구나 여기나 술주정은 다 비슷한가 보다. 나에겐 술에 취했다는 소리로 들렸다.슬슬 자리를 정리할 생각에 주변을 바라보는데 그녀의 고개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어지러워?"

"으음... 살짝? 헤헤"

"일로 와."

"응?"

"일로 와서 기대."

"...또 장난 치려구."

"안 할 테니까 옆에 앉아."

내 옆의 의자를 빼 탁탁 치자 그녀가 헤실 거리며 넘어와 어깨에 기댔다.

향수 냄새와 살 냄새가 확 풍겨왔다.

그녀가 다리를 꼬아 앉자 슬립이 말려 올라갔다.

하얀 허벅지가 눈을 유혹했다.

달빛 때문인지 더 하얗게 보였다.

어차피 나에게 기대고 있는 그녀의 눈치를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한참 시아라의 매끈한 허벅지를 쳐다 보고 있었는데, 그녀가 다리를 덮은 슬립을 살짝 들어 올렸다.

허벅지가 조금 더 드러났다.당장이라도 그녀를 들어 침대로 던지고 싶었다.

'...미쳤네.'

"카인..."

아무런 말도 없이 앞만 보고 있던 시아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황급히 시선을 떼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위스키잔에 손을 대며 대답했다.

"왜?"

"...그렇게 보고 싶어?"

그리곤 그녀가 다시 한번 슬립을 걷어 올렸다.

이젠 거의 속옷이 보이기 직전이었다.

조금만 고개를 숙여도 보일 듯 했다.

"헤에... 정말 보고 싶구나?"

'...어떻게 알았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시아라는 앞을 보고 있었는데...

'이런 미친'

맞은편에 있는 와인잔으로 시아라의 웃고 있는 얼굴이 비쳤다.

그녀는 처음부터 나를 보고 있었다.

"..."

할 말이 없어진 채로 가만히 위스키를 마셨다.

오늘 그녀를 울리고 나서 최대한 기분을 건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데 한 번에 물거품이 돼버렸다.

그때 그녀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입을 열었다.

"...왜 오늘은 예쁘단 말 안 해줘?"

"...응?"

"뽀뽀도 안 해주고... 안아주지도 않고..."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어깨를 기대고 있었기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서운함이 묻어 나는 목소리였다.

"아, 아니 오늘 네 기분이 별로였으니까..."

"그럼 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화를 내서 싫어졌어?"

"그런 거 아니야."

"방금도 원래 같았으면 그걸 어떻게 안 쳐다봐. 하면서 뻔뻔하게 나왔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부끄럽지만 기분은 좋았는데... 나를 좋아하는 게 보여서 좋았는데..."

"..."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내 장난 때문에 울었던 오전 일 때문에 오히려 조심한 건데 그녀는 다르게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떼곤 손을 들어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그리곤 바닥을 쳐다보며 처연하게 말했다.

"...제가 술을 마셔서 실수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도련님에게 화를 내는 제 모습에 정이 떨어진 거겠죠...? 웃으면서 받아줬어야 했는데 그러질 않아서... 그래서... 오늘 저한테 말도 안 걸고... 장난도 안치고... 하신 거죠?..."

술잔을 가만히 내려놨다. 술을 마셔서 그럴까. 그녀의 말에 화가 났다. 이렇게 자기 비하가 심할 줄은 몰랐는데.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내 쪽으로 돌렸다.

여전히 시선은 올라올 줄 몰랐다.

"나를 봐. 시아라"

"...죄송해요... 저는 도련님을 걱정하는 마음에..."

"후우..."

그녀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가 빨개져 있었다.

"도련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듣고 싶지 않아."

"...꼭 말씀드려야 해요."

화가 점점 올라왔다. 술을 마셔서 그럴까. 언성도 같이 높아졌다.욕을 먹어도 내가 먹어야 한다. 오늘 장난도 내 잘못이고, 그녀가 화났던 것도 내 잘못이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떠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나부터 봐."

"..."

"날 봐!!"

더 이상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강하게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소리쳤다.

그 말에 움찔한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눈물이 가득 맺혀있을 거라 생각했던 두 눈이 멀쩡했다.

"카인... 화 났어...?"

"...?"

그녀의 귀와 얼굴은 불그스름 했지만 울고 있지 않았다.

눈에 눈물도 맺혀있지 않았다.

오히려 눈꼬리가 약간 휘어있는 것이 장난을 치다 혼나는 아이 같아 보인다.

'...장난?'

마주 보고 있던 그녀가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나두 장난치려 한 건데... 화 낼 줄 몰랐어... 화 많이 났어...?"

뒤통수가 얼얼했다.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한 짓이 있으니 화낼 수도 없었고, 안 내자니 기분이 묘했다.

고민하고 있는 내 표정을 본 시아라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으응... 화 내지마~ 방금도 살짝 무서웠단 말이야..."

"..."

"...허벅지 볼래?"

응 이라 하기엔 뭔가 지는 기분이 들어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짐승인지라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벅지로 시선을 내렸다. 그 모습을 본 시아라가 살짝 부끄러운 듯 눈을 찡긋거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헤헤... 변태."

"..."

그녀가 천천히 슬립을 들어 올렸다.

얇은 천 안에 숨어있던 하얀 허벅지가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화 좀 풀렸어?"

"..."

허벅지엔 마법이 걸려있었다. 장난에 넘어갔다는 민망함도 이유를 알 수 없던 분노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보여줘?"

"...응"

"드디어 말했다아... 흐흥. 마지막이야?"

그녀가 나를 보며 배시시 웃고는 다시 슬립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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