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9화 (9/191)

〈 9화 〉 일주일 후에 출발할 것이다.

* * *

"도련님,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

집사장의 말을 듣고 마지막으로 손에 들린 종이 뭉치를 확인했다.

두툼한 서류를 들고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대전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의 강당만 한 크기였는데, 정면엔 정복을 입은 후작이 나를 보며 앉아있었고, 좌우에 역시 정복을 입은 가신들이 도열해 있었다.

대전에 들어올 때부터 집중된 시선이 정면을 향해 가로질러 걸어가는 나를 따라왔다.

이런 집중된 시선을 받으며 걷는 것은 처음이라 발이 꼬일 것 같았다.

'살짝 긴장되네.'

마침내 후작의 앞까지 도착한 나는 고개를 숙였다.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아버님."

"준비는 모두 끝났느냐."

"아버님과 여러 가신분들의 도움으로 한 달 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래. 한 번 보자꾸나."

이제부터 시작이다.

알만 왕국행을 설득하기 위한 마지막 3요소, 로고스(Logos)의 피날레였다.

자연히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긴장감을 조절하는 것도 발표자의 실력이다.

'이 정도 긴장감까진 괜찮아.'

아니, 조금은 더 심하게 긴장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자리는 오랜만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봐 대기 중이던 집사 둘을 불러 서류를 나눠주었다.

"가신들에게 세 장씩 나누어드리면 된다."

그리곤 후작에겐 내가 직접 앞으로 걸어갔다.

후작과 눈이 마주쳤다.

후작은 등받이에 등을 기대 편안한 자세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후작은 나를 보며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지었다.

굳게 다문 입술의 끝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제가 만든 보고서입니다. 제 설명과 함께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주일 후에 출발할 것이다."

"...네?"

"목소리를 낮추거라. 원래 너에겐 비밀로 하려 했던 것이니."

후작은 그 말을 하곤 양 옆으로 도열한 가신들을 한 번 훑고는 말을 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서류를 보기 바빴는지 이 곳을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 한 달 간 네가 쉬지 않고 일 한 사실은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 것 만으로도 이미 네 진심이 통한 것이지."

"..."

"그러니 긴장하지 말 거라. 네 표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전쟁에 나가는 장수인 줄 알겠구나. 여긴 출병식이 아니다."

말을 마친 후작이 씨익 웃었다.

"...알겠습니다."

나름 긴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주어진 상황에 표정이 굳었었나 보다.

빠르게 얼굴을 풀었다.

"그래. 이제야 좀 보기 좋구나."

"감사합니다. 아버지."

"푸흐흐..."

긴장이 싹 달아났다.

회계감사의 최종보고 발표 자리에서 대학교 과제 발표 수준으로의 긴장감 하락이었다.

그제야 사람들의 표정이 보였다.

이 곳에서 긴장한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을 듯 했다.

천천히 대전의 중앙으로 내려온 나는 모두의 시선이 모이길 잠시 기다렸다.

"..."

보고서를 받아 든 사람들이 하나 둘씩 서류에서 시선을 떼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보고서를 받아 대충 읽었던 대열은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된 것을 느끼곤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먼저 이 자리를 만들어주신 영주님과 가신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영주님의 장남 지그하르트 카인입니다."

자, 이제 시작이었다.

한 달 간의 준비 끝에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

이미 알만 왕국으로의 상행은 결정 되었지만, 이 자리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 보고서엔, 내가 그리는 후작령의 미래 중 기반을 다질 초석이었다.

그렇기에 더 꼼꼼하고 치밀하게 준비했다.

남부 전선의 국방, 알만 왕국과의 교역, 영주민들의 삶을 바꿀 경제, 식량, 문화...

한 달 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현대인의 보고서였다.

이 내용을 후작과 가신들에게 설득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먼저 보고서 첫 장부터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미 보고서의 첫 장을 읽어본 사람들은 아직도 경악의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거다. 저 모습이 내가 보고 싶었던 표정이었다.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할 현대인의 지식을 담은 결정체였다.

현대인의 시선으로 봤을 때 지금의 영지는 개선할 부분 투성이였다.

나는 이 영지의 이름을 뺀 모든 것을 바꿀 생각이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회의 중 하나가 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오늘 이 사람들의 눈이 트이게 할 생각이었다.

­­­­­­­­­­­­­­­­­­­­­­­­­­­

대전을 나와 하늘을 바라보자 수 많은 별들이 빛나며 지상을 비추고 있었다.

이 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세 개의 크고 작은 달이 산 위에 걸려있었다.

지구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 모습에 압도된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춰 별을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 이 곳에 온 뒤로 밤하늘을 본 적이 없었다.

헤아릴 수도 없는 별들이 어두운 밤하늘에 가득했고, 수 많은 별똥별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침 일찍 시작됐던 회의는 밤 늦게서야 끝이 났다.

'잘 마친 건지 모르겠네...'

생각보다 반응이 거셌다.

보고서 한 문장, 한 문장에 사람들은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고, 내 설명에 더 커진 눈으로 다음 문장의 설명을 기다렸다.

난생 처음 고기를 먹은 사람의 표정이 그랬을까.

피식.

'후작의 표정이 웃겼지.'

눈이 동그래진 호랑이는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었다.

'어쨌든 내일부턴 휴가다. 늦잠이나 늘어지게 자야겠다.'

저택에 들어와 방 문을 열면서 성격이 급한 나는 정복의 상의부터 풀어헤쳤다.

얼른 씻고 잠부터 자고 싶었다.

아침부터 서있었기 때문에 발바닥이 퉁퉁 부었다.

으레 정복이 그러하듯 딱딱한 신발 때문에 오후 즈음부터는 서 있는 것이 고역이었다.

하다못해 평소에 자주 신었었다면 신발이 발에 길들여졌을텐데, 이 곳에 와서 정복이 입은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목은 쉬었고, 어깨부터 허리, 발까지 안 아픈 부위가 없었다.

머리는 이미 활동을 멈춘 듯 했다.

사실 오늘 제일 고생한 게 머리였기에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잠을 자고 싶을 뿐.

상의를 다 벗고 이제 바지를 벗으려는데, 갑자기 내 방 한 쪽에 있는 작은 문이 열렸다.

"으어아악! 뭐야!"

"왔어?"

"오, 오늘 출근했었어?"

저 방문이 열릴 줄 꿈에도 몰랐던 나는 황급히 벗던 바지를 다시 주워 올렸다.

시아라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방 문을 닫고 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내 방엔 작은 방이 하나 더 있었는데 시아라는 평소에 거기서 지냈다.

그 방은 영주 직계 가족의 방마다 있는 방이었는데, 전담 시녀를 위한 방이었다.

"어제 집에 갔었잖아... 당분간 안 가도 되는데?"

"아니 오늘부터 3일 동안은 휴가니까 출근 안 해도 된다고 했잖아... 내가 말 안 했었나...?"

그 말에 시아라는 약간 뚱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이 왜 그러지? 휴가 가는 게 싫은가...? 그게 말이 돼?

"...카인은 쉬는 날 나랑 같이 있는 게 싫어?"

'얌마! 일어나!'

활동이 끝난 머리를 다시 흔들어 깨웠다.

여기서 한번 더 말 실수를 안된다.

벌써부터 고달픈 미래가 보이는 듯 했다.

"조,좋지! 너무 좋지!"

"근데 왜 집 보내려고 해?"

이미 과로로 멈춰버린 뇌를 깨워 다시 굴리기 시작했다.

지금 말 한마디에 삼 일간의 휴가가 천국 행과 지옥 행 둘 중 하나로 달려간다.

"시아라도 오랫동안 못 쉬고 내 일 도와줬으니까... 피곤할 것 같아서..."

"난 괜찮아. 그리고 난 이 주도 안 도와줬는데?"

"그 연약한 몸으로 이 주 동안 야근했으면 충분히 무리한 거야."

"카인..."

잘 달랬나...?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야."

힘이 다해 속도가 떨어져 가는 뇌를 억지로 다시 한 번 크게 돌렸다.

하지만 이미 오늘 힘을 다한 뇌는 도통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단 게 땡긴다.'

뭐라고 하지? 뭐가 정답이지?

지금 내 몸과 머리가 바라는 것은 오직 숙면뿐이었다.

이미 힘을 다한 뇌를 대신 해 몸이 대답했다.

"...우리 오늘 같이 잘까?"

"...뭐?"

그녀의 눈초리가 빠르게 굳어갔다.

'시발...'

이래서 몸이 말하게 두면 안됐다.

원초적인 말만 나왔다.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했다.

"아,아니 손!, 손만 잡고 잘게."

"..."

"...싫어?"

"그냥 삼 일 동안 같이 있자고 하면 되는데... 카인 중간이 없는 거 아니야?"

"..."

시아라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나를 째려봤다.

아아, 평소엔 이러지 않는데, 머리는 오로지 잠을 자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녀의 살짝 붉어진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창을 통해 들어오는 은은한 별 빛에 비춰 그 모습이 첫날 밤 신부의 모습과 닮아 보였다.

나도 모르게 바지만 입은 채 그녀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그녀를 안고 싶었다.

시아라의 피부를 느끼고 싶었다.

머리가 아닌 몸에서 나오는 의지였다.

그녀는 갑자기 다가오는 나를 보더니 뒷걸음질을 쳤다.

"갑...자기... ? 오지 마..."

하지만, 그녀가 도망갈 곳은 없었다.

꽈악.

여린 몸이 품에 쏙 들어왔다.

언제 안아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육체였다.

"...오늘 너무 힘들었어."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작게 속삭였다.

진이 다 빠졌던 몸이 다시 활력을 찾는 것이 느껴졌다.

"...고생했어. 카인..."

가슴팍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마치 몸에 대고 하는 말 같아 온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근데 나 바지만 입고 있는데?'

평소의 시아라였으면 지금보다 훨씬 부끄러워 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시아라."

"...응?"

"내가 이렇게 벗고 있는데 안 부끄러워?"

"...응?"

그녀가 가슴에 묻었던 얼굴을 들어 의아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한 달 전까진 매일 보던 몸이었는데?"

"..."

이 것도 머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면 당연히 깨달았을 사실이다.

올려다 보는 두 눈과 입술이 확대되어 보인다.

오늘 따라 빨간 입술이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이렇게 더 있다 간 큰 실수를 할 것 같았다.

이미 내 분신은 준비가 끝나 있었다.

'...안돼 미친 놈아.'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억지로 떼어 그녀에게 떨어졌다.

샤워라도 좀 하면 흥분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나 이제 씻을 건데 잠시 방에 들어가 있을래?"

"...? 후훗. 카인... 부끄러워?"

그녀의 눈꼬리가 곱게 휘더니 나를 보며 살포시 웃었다.

부끄러워 하는 아이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표정에 다시 한번 분신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 나는 한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그럼 너도 벗자. 일로 와. 벗겨 줄게."

"...!"

그녀가 내 말에 몸을 돌려 황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단정한 메이드복이 펄럭거렸다.

문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귀가 새빨개져 있었다.

'저기가 예민한 부위였지...'

저번에 알아낸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녀를 들어간 방을 쫓아 들어가고 싶었다.

'안된다고 미친 놈아.'

미성년자를 건드리는 건 가치관의 문제였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몸을 돌려 바지를 벗곤 욕실로 들어갔다.

'...아따 이놈, 크네.'

풍채가, 사람도 아닌 부위를 보고 풍채라는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다만, 풍채가 당당했다.

역시 검은 머리라도 서양인의 몸이라서 그럴까.

떡 벌어진 활배근에 두꺼운 골격을 볼 때마다 동양인에게서 나올 수 없는 축복 받은 몸이라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분신의 크기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지난 한 달 간, 의사와 상관없이 발기가 된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커진 것은 처음 봤다.

이런 걸 여자의 몸에 넣었다가는...

'반으로 갈라지겠는데.'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