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8화 (8/191)

〈 8화 〉 키스하고 싶다고?

* * *

"이거 날짜별로 분류해 줄래?"

"응."

시아라가 일을 돕기 시작한 지 이주가 지났다. 그리고 시아라는 생각보다 일을 잘했다.

어릴 적부터 시녀 일을 해서 그런지 확실히 일머리가 좋았다.

물론 장부를 직접 들여다보며 대차변을 감사하는 일은 여전히 내 일이었지만, 애초에 시아라에게 그런 걸 바라지도 않았다.

"배는 안 고파?"

"응. 카인은?"

"조금. 이것까지만 마저 하고 먹자."

"그럼 지금 가서 챙겨올게."

역시, 센스가 좋다. 현대였으면 비서로 이름 좀 날렸겠는데.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또 빵 먹겠네.'

후작가의 장남으로 빙의한 건 정말 최고의 행운이었다. 적어도 끼니 걱정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쌀이 너무 그리웠다.

갓지은 밥과 김치찌개, 삼겹살...

좀만 더 버텨보자.

분명 책에서 나온 내용으론 알만 왕국이 모든 대륙의 중심부라고 했다. 혹시 쌀이나 고추가루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알만 왕국으로 상행을 허가받으면 그것부터 구할 생각이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을 때쯤, 시아라가 점심을 들고 나타났다. 역시 오늘도 빵이다.

서류를 책상에 집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시아라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 가고 놀았어?"

"쉬었다고 표현해줘."

고향 생각하느라 일 못했어.

자연스럽게 빵을 하나 집어 들며 간이 식탁에 앉았다. 집무실에서 하는 식사도 이젠 익숙해졌다.

"그나저나 시아라."

"응?"

"우리 몇 살이야?"

현대에서 먹던 빵 맛이랑 많이 다르다. 달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다. 그나마 매끼 나오는 고기나 스튜와 함께 먹으면 먹을 만 했다.

"...열여덟 살."

"생각보다 어리네."

쓰읍.

못 건든단 소리네.

내심 아쉬움을 감추고 다시 빵을 베어물었다. 한 입 먹을 때마다 입안의 수분을 모조리 뻇기는 기분이다.

이 세계에서 성인이 몇 살이냐.

잘 모르겠다.

한국처럼 20살 부터 성인일지, 아니면 외국처럼 18살부터 성인일지.

어쩌면 예전 중세 처럼 15살, 16살만 되도 결혼을 하고 성인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안 돼.'

이 세계에서 법적으로 성인인 것과 내가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다.

18살이면 고2다.

한국이었다면 교복을 입고 있었을 아이를 건든다는 건, 내 가치관이 흔들리는 문제였다.

한국도 아니고 뭐 어떤가 싶은 마음이 잠깐 들었다. 어쩌면, 이 세계에서 오래 살다 보면 가치관이 바뀔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세계로 넘어온 지 고작 한 달 지났다.

그래도 키스까진 괜찮겠네 싶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앓느니 죽지.

본편도 못 가는 데 키스만 해서 뭐 하려고.

오늘따라 빵이 퍽퍽하다.

"...혹시 기억이 돌아온 건 없어?"

"아직."

"..."

점심 다 먹고 물어볼 걸 그랬다. 속상했는지 그녀가 빵을 내려놓고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날 얼마큼 좋아하는 거야.'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알고 있었을까. 바로 옆에 있던 소꿉친구가 자신을 이렇게나 좋아했다는 사실을.

천천히 빵을 내려놓았다. 차라리 잘 됐다. 벌써 2주째 애매한 관계였다. 물론, 그녀는 마음을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 시선에는 전혀 아니었다.

"시아라. 날 좋아하지?"

"...응."

갑작스러웠는지 그녀의 눈이 조금 커지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놀랐다. 수줍음이 많아 보이길래 아니라고 잡아뗄줄 알았는데.

"...나도 알고 있었어?"

"...아니."

그럼 지금 나한테 고백한 건가? 괜히 마음에 찔린다. 정작 저 고백을 받을 사람은 여기 없으니.

부끄러운지 그녀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그렇게 부끄러워할 거면서 어떻게 좋아한다고 말을 꺼냈을까.

"...호, 혹시... 기억나는 거... 있어?"

"...아니."

"그렇구나..."

집무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애매한 관계를 끝내려다 정말 애매해졌다.

그때, 잠시 주저하는 듯 하더니, 그녀의 입이 다시 열렸다. 부끄러움과 슬픔이 공존하는 눈빛이 나를 바라봤다.

"...내가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

"혹시나 카인이 예전 기억을 떠올릴까 해서... 적어도 나와 함께했던 추억이 떠오르면... 다른 것도 하나둘 기억나지 않을까 해서..."

입맛이 썼다.

이렇게 순수한 아이를 상대로 거짓말을 쳤다는 사실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녀가 아무리 고백을 해도 기억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기억을 잃은 게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다 입을 열었다. 어쨌든, 한 번 시작했으니 끝은 봐야 하니까.

"아마... 나도 널 좋아하지 않았을까."

"...응?"

"예전의 나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너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뭐?"

"너처럼 예쁜 애가 옆에 있는데 안 좋아하는 게 더 힘들지 않았을까."

남자로서의 확신이었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이 남색가가 아닌 이상 확실했다.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였던 미모의 소녀. 싫어할래야 싫어할 수가 없는 관계였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슬픔에 잠겨있었다. 아니, 더욱더 슬픔에 잠기고 있었다.

"...만약 아니라면?"

"뭐?"

"나중에 네가... 기억을 되찾았는데 나를 안 좋아했다면?"

그럴 일은 없다고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솔직하게 모든 걸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그녀에겐 당연한 의심이었다.

갑작스레 펼쳐진 이 상황에 조금 머리가 아파왔지만, 어쨌든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지금 눈앞의 여인보다 이 몸에 대해 잘 알고 나를 믿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녀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어야 했다.

그리고 어차피 기억을 잃은 컨셉을 잡은 이상,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이렇게 의심을 지울 만한 경험을 해야 했다. 결국 터질 일이 터진 것이다.

이 일을 잘 끝내면 다시는 내 정체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다.

"그땐 어떻게 할 거야? 만약 카인의 기억이 돌아왔는데 나를 안 좋아했었다면... 그땐 다시 친구로 돌아가는 거야?"

어려운 질문이었다.

다시 한 번 그럴 일은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 끝까지 올라왔던 말을 눌렀다.

"이젠 어떡해...? 카인 너를 좋아하는 티를 내야 해?... 아니면 다시 숨겨야 해...?"

"시아라"

"끝까지 들어줘"

처음으로 듣는 단호한 말투였다.

"그 때 가서 카인 네가 나를 피하면... 지금 네가 나를 좋아해도 그 때 피하면.... 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를 것 같아."

"..."

"차라리 지금부터 거리를 벌려야 할까? 일은 그만 두고 네가 기억이 돌아올 때 까지 기다릴까?..."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너를 좋아할 수도 있잖아."

"아닐 수도 있잖아. 기억을 잃기 직전까지도 우린 친구 사이였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 문제는 지금의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문제였다.

'시아라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좋아하는 게 맞았다.

'적어도 호감은 있지.'

사실, 시아라는 싫어하는 것이 더 어려운 여자였다. 한 남자를 오랫동안 짝사랑할 만큼 순수한 마음에 외모도 뛰어났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도 청순한 얼굴과 사슴 같은 눈망울, 자 대고 그은 듯 예쁘게 그어진 눈썹과 얇은 입술까지 모자란 부분이 없었다.

중간중간 느껴지는 사려 깊은 성격도 좋았다.

솔직히 닳고 닳을 정도로 여성 편력이 심했던 나에겐 오히려 과분한 여자아닐까. 순수한 그녀의 마음을 받아줄 만큼 내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다.

만약, 현대에 있을 때 시아라같은 여자를 만났다면 나는 그녀와 그대로 결혼했을 것이다.그녀보다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려울 테니까.

'나에겐 과분한 여자야... 오히려 좋아.'

"시아라"

"...응"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의 나는 네가 좋아."

"...그래도"

이런저런 말보다 그녀는 내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애매한 관계를 여기서 매듭짓고 가야만 앞으로 그녀를 보기에도 편했다.

지금 그녀는 내 마음을 알지 못해 망설이고 있었다.

드르륵

자리에서 일어나 말 없이 그녀를 안았다.

그녀가 움찔하고 떠는 게 느껴졌다.

"카인..."

"과거의 나도, 지금의 나도 결국은 나야. 지금 이 감정이 내가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아."

"...흑"

'마가 꼈나...'

시아라를 볼 때마다 울렸다.

물론 지금의 눈물이 슬픔의 눈물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내가 좋은 남자가 아닌 것도 맞았다.

말 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반대 손으론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잠시 주저하더니 천천히 팔을 들어 나를 감싸 안았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귄다.

사귀다 보면 사랑하게 된다.

뭐가 정답일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시아라에겐 첫 번째 문장만이 정답일 것이란 사실이었다.

시아라를 사랑하느냐.

아직은 호감의 단계 아닐까.

두 번째 문장 앞에 서서 첫 번째 문장을 연기했다. 그리고 그게 통했다.

아름답고 섬세한 여자다. 또 할 말은 할 줄 아는 여자였다. 이런 여자를 싫어하는 게 더 힘들지 않을까.

그나저나...

지난 며칠 동안 골머리를 썩혔던 문제가 드디어 해결됐다.

'가장 큰 산을 넘었다. 장부도 거의 다 확인했고 마무리 정리만 하면 돼.'

이주 후에 있을 후작과의 대면 날 준비 중인 자료를 건네고 알만 왕국으로 출발하면 그 때부터 제대로 된 시작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왜?"

내 품에 안겨 울던 그녀가 갑자기 나를 밀어냈다.

어느새 눈물은 그쳤고 벌게진 두 눈만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그 모습이 부끄러운지 그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보지 마..."

"이미 내 가슴에 눈물 자국이 흥건..."

퍽!

"억!"

분위기 좀 풀어보려고 장난을 쳤다가 가슴을 한 대 맞았다. 깜짝 놀라 가슴을 문지르며 그녀를 바라봤다.

"이제 친해졌다고 때리는 거야?"

"...맞을 짓 했잖아... 손수건 좀 줘."

"싫어"

그리곤 손을 들어 처음 울었던 그 때처럼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 말에 의아해 하던 그녀는 곧 가만히 서서 내 손을 받아주었다.

"...코도 흥 할까?"

짝!

"억!"

기어코 장난을 더 쳤다가 한대 더 맞았다.

이 여자 손이 좀 맵다.

그렇게 장난을 치고 있으니 돌연 웃음이 나왔다.

잘 마무리 돼서 정말 다행이다.

"푸흐흐..."

"......큽...크흡."

내 웃음에 그녀도 자연스럽게 따라 웃었다.

울다가 웃는 것이 자존심 상했는지 미간이 살짝 모으라졌다. 미모가 좋으니 그 모습도 예쁘다.

이제 그만해야 하는데 장난기가 또 도진다.

일부러 과장되게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시아라!"

"흐흥...어?, 왜?"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나는데! 확인해보게 일로 와봐."

짜악!!

­­­­­­­­­­­­­­­

똑똑

"들어와."

다음 날 점심이 지나고, 약간 상기된 듯한 표정의 시아라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왔어?"

"응..."

"일로 와"

수줍게 웃는 그녀의 팔을 붙잡고 품에 안았다. 이제는 공식적으로 합법이다.

작은 그녀의 체구가 품에 쏙 들어왔다.

"아, 안돼..."

"돼!"

꼼지락거리며 빠져나가려는 그녀를 꽉 잡고 붙들었다. 오전 내 일을 하느라 받았던 스트레스가 한번에 풀린다.

"숨, 숨 막혀..."

"키스도 하고 싶다고?"

"...그건 안돼."

한참을 그렇게 안고 있다가 그녀를 풀어주었다.

그녀를 보며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건 이 세계는 내가 살던 세계보다 훨씬 보수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어제 그렇게 마무리를 하고 그녀를 껴안았을 때, 그녀가 기겁을 하며 숨을 참는 걸 보고 느꼈다.

원나잇이 난무하고 사귐과 동시에 진도가 나가는 현대에서 살던 나와는 정반대의 가치관이다.

그러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정말 싫거나 부담스럽다면 말할 성격이니까. 부끄러워 하면서도 정색을 하며 밀어내지는 않았으니 포옹 까지는 괜찮다 싶었다.

그때 수줍은 표정으로 땅을 쳐다보던 그녀가 할 말이 있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이제 안는 거 금지야."

"싫은데?"

칼 같이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조금 당황하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

"...카인 나는 공식적으로 시녀야."

"내 소꿉친구이기도 하지."

"아니 그 뜻이 아니고... 너는 후작 가문의 후계자고, 나는 시녀일 뿐이야..."

"그래서?"

"지금 나는 너무 행복하고 좋지만... 영주님이나 우리 아버지가 알면 반대할 거야."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생각해보니 후작의 후계자와 시녀는 신분이 맞지 않는다.

아무리 현대에서 살아왔다 하더라도, 우리의 사이가 이루어지기 힘든 사이라는 건 알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우리..."

"쓸데없는 소리 하면 영주성 한가운데에서 키스할 거야."

"...어?"

"하고 싶어졌어?"

"아니! 그게 아니고오...안 된다니까아... 당분간은 비밀로 해야 해..."

"내가 후작이 될 때 까지?"

"응..."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녀와 나는 하루 종일 붙어 있었고, 관계를 숨긴다고 해서 그녀를 보기 힘들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근데 이런 시대라면 정략결혼을 하지 않나?'

"시아라."

"응?"

"나 혹시 결혼 상대 정해져 있어?"

"...아니 없어..."

"그럼 다행이네. 난 내가 기억 못하는 줄 알았지"

"있었는데 카인 네가 거절했어...그것 때문에 가주님과 크게 다퉜는데 이 것도 기억 안나겠지?"

좋아하는 거 맞았네.

그러니까 약혼 상대를 거부하지.

어제의 그 의심이 확신이 됐다. 그러나 변하는 건 없다. 그녀는 이미 내가 잡았고, 원 주인이 돌아올 일은 없으니까.

미소를 지으며 시아라를 바라봤다.

역시 내 말이 맞다는 듯 자신 있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너가 좋아서 그랬던..."

"자긴 칼이랑 결혼 할 거라고..."

"..."

"..."

"어디 참한 칼 한 자루가 있었나 보네. 난 기억 안나. 나 아니야."

뻔뻔한 내 말에 시아라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카인. 성격 진짜 이상해졌어."

"또 그 소리하네."

"원래는 안 그랬는..."

"키스하고 싶다고?"

"..."

나는 다시 그녀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역시나, 아직은 어색한 듯 숨을 참는 게 들려온다.

포옹도 이렇게 어려워하는데 키스는 언제 하나.

하긴, 본편도 못 가는데 키스만 해서 뭐 하나 싶다.

"몰라. 진짜 기억 안나."

"그래두..."

곱게 올린 그녀의 머리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일단 너 말대로 우리 사이는 비밀로 하자."

"응... 고마워..."

"뭐가 고마워. 네가 얘기한 건데, 웬만한 건 다 들어줄 수 있어."

내 말에 그녀가 수줍게 웃었다. 예쁘긴 진짜 예쁘다. 사슴 같은 눈망울이 정말 예뻤다.

"그러니까 일단..."

그 말과 함께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자 그녀의 눈이 깜짝 커지더니 숨을 들이마셨다.

"안... 된... 다니까... 너무... 빠르다니..."

굳이 대답은 하지 않았다. 천천히 조금 더 가까이 가자 그녀가 파르르 눈을 떨며 살며시 감았다.그와 동시에 입술이 살짝 벌어졌는데, 그 안으로 분홍 빛 혀가 보였다.

안 된다면서 입은 왜 벌려. 필사적으로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아 너무 귀엽다.

정말 키스를 할까 하다가 그녀의 입을 지나쳐 귓가로 다가갔다.

"...일단 일부터 하자. 많이 밀렸어."

"...?"

그녀의 눈이 파르르 떨리더니 살짝 떠진다. 결국 웃음이 터졌다.

"큭큭큭... 안 된다더니... 기대했어?"

짝!

­­­­­­­­­­

"...시아라. 차 좀 마실래?"

"저는 괜찮습니다. 도련님."

"..."

책상에 앉아 서류를 바라보기 위해 눈이 반 즈음 내려앉아 있고, 고민을 하고 있는지 한쪽 볼이 바람에 빵빵하게 올라와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라 나도 모르게 또 장난을 치고 말았었다.

결과는 지금 보이는 그대로.

'이번엔 제대로 삐졌네.'

그 모습도 귀엽게 느껴졌다. 어쩜 저렇게 반응이 좋을 수가 있지.

놀리는 맛이 일품이었다.

어떻게 풀어주지.

종이 위를 돌아다니던 펜을 멈추고 잠깐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곧, 자연스럽게 스킨십 할 수 있는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조금 미안하긴 한데...

"시아라."

"...네"

"여기 정리가 덜 되어있는데, 일 제대로 안 할 거야?"

그녀가 정리한 서류를 들어일부러 목소리를 가라앉혀 정색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냉정한 내 말에 사과는 했지만, 기분이 상한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에 서운하지 미간이 팔 자로 꺾이며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어떡해... 너무 귀여워'

시무룩한 얼굴로 가만히 서류를 보던 그녀의 눈에 습기가 조금씩 차오르는 게 보였다.

'아이고, 많이 서운한가 보네'

이제 더 이상 지켜볼 때가 아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 뒤로 걸어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책상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그녀를 뒤에서 안았다.

눈물을 글썽거리는 와중에도 움찔하고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시아라"

"..."

"시아라"

"...네"

목소리에서 물기가 느껴졌다. 내가 뒤에서 안아주자 더 서러웠는지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어떡해... 난 네가 너무 괴롭히고 싶어."

"..."

"정말 성격이 나빠졌나 봐. 시아라만 보면 장난치고 싶고, 괴롭히고 싶어."

"가셔서 일...하십시오. 도련님..."

그녀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빨개진 그녀의 귀가 맛있어 보였다.뒤에서 바라보다 입술로 살짝 물었다.

"흣?!"

생각보다 반응이 격했다.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바람에 부딪힐 뻔했다.

다시 그녀의 귀를 살짝 물고 속삭였다.

"시아라... 화 내지마."

"알...겠으니까 조금 떨어지..세요. 도련...흣!"

...어쩌다 보니 그녀의 약점을 알게 됐다.

그럼 뭐 하는가. 정작 본 편은 가지도 못하는데.

"화 풀 거지?"

"하읏... 네... 알겠으니 이제 그만 좀..."

그제야 나는 잘근거리던 입술을 떼고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그녀가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눈에는 살짝 눈물이 맺혀있었는데 얼굴은 사과처럼 빨갰다. 눈이 역삼각형으로 휘어지며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야...! 너...진짜 성격 나빠졌어...!"

야? 야?? 야???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녀가 아차 싶은지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야가 아니고..."

이미 늦었다.

나는 다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왜, 왜, 왜 또 오는 거야!"

"자, 잠시만...! 하읏... 내가... 잘못했...흐읏..."

짝!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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