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7화 (7/191)

〈 7화 〉 이제 좀 진정이 됐어?

* * *

"그 뿐이 아니야... 나는 여기 있는 누구도 생각이 나지 않아. 가신들도, 동생들도 그리고... 부모님도..."

"네...?"

"사실대로 말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 네 행동이 나를 잘 아는 듯 해서 말하는 거야... 도와 달라고."

나의 말에 눈물이 가득 들어 찬 사슴 같은 눈망울이 더욱 동그래졌다. 앙 다물었던 입술이 벌어졌다.

입이 벌어지자 분홍 빛의 혀가 살금 보인다.

순간 본능적으로 방 밖의 인기척을 살폈다.

'안돼 미친놈아.'

순간적으로 치민 욕정을 다시 가라앉혔다. 아직 현대의 물이 빠지지 않았다.

이 세계의 분위기가 어떤지, 남녀 사이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모르기에 섣불리 움직여선 안됐다.

지금은 의심을 벗겨야 할 때였다.

슬픈 표정을 지으며 살짝 쓰게 웃음 지었다.

그리곤 후작에게 했던 거짓말을 다시 내뱉었다.

"아무래도...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 같아..."

"..."

눈물이 흘러 붉어진 두 눈에 다시 한번 의심이 차 올랐다. 말 한마디로 믿기엔 너무 어려운 말이었다.

"그래서... 알만 왕국으로 가겠다고 한 거야. 사실 철광석도 중요하지만 이게 만약 병이라면 치료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 저택 내에서 내가 장부만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가문의 장자가 보름 동안 누워있던 것도 큰 사건인데 와병을 깨고 나온 날 영지의 모든 가신들이 모였었으니 보통 큰 사건이 아니었다.

그제서야 첫 날 바지도 제대로 못 입던 카인이 떠오른 시아라는 다시 한번 눈물이 차 오르기 시작했다.

"흑, 흐윽...... 카인... 걱정 했잖아..."

'카인? 도련님이 아니고?'

뜻 밖의 정보였다. 그녀와 이 몸의 원주인의 관계를 알아낼 중요한 단서였다.자연히 내 말이 조금 빨라졌다.

"...나를 카인으로 불렀어?"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흐윽..."

"미안해..."

"카인과 나는 어릴 때부터 같이 놀았어... 그리고 카인의 요청으로 내가 전담 시녀가 됐고..."

"..."

그랬구나. 그래서 나를 이름으로 불렀구나.

중요한 단서의 시작이다. 그녀가 나를 의심했던 이유도 깨달았다.

'어릴적부터 친했던 소꿉친구인데 이상한 점을 바로 찾을 수밖에...'

"카인에게 검술을 가르치던 기사단장이 우리 아버지인데...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응... 미안해..."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낯선 여자였기에 보통은 이렇게 행동하지 않지만, 그녀는 자신을 잘 아는 듯 했다.

역시 그녀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거부는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볼은 또 왜 이리 말랑거리는지.

손바닥에 닿은 볼 살이 말랑말랑 한 것이 나도 모르게 다시 한번 방 밖의 인기척을 확인했다.

"이제 좀 괜찮아?"

그녀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남자의 스킨십이 익숙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스킨십은 심리적인 거리감을 줄여준다.

품 속에 손수건이 있었지만 굳이 손으로 닦아 준 것은 나에 대한 경계심을 희석 시키기 위한 의도이기도 했다.

얼굴이 붉어진 채로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 보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수줍은 소녀를 보는 듯 했다.

의자에 앉아있느라 올라간 치마 사이로 가려져 있던 검은 스타킹에 절로 시선이 갔다.

"시아라"

"응..."

"내가 여기서 일 한 뒤로 평소에 뭐 하면서 지냈어?"

"...아침엔 카인의 방을 청소하고, 빨랫감을 세탁하고... 중간 중간 차를 타다 전해주고... 그리고 보통 옆 방에서 대기 하고..."

"옆 방에서?"

옆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다. 나도 그녀가 불편했던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찾지 않은 것도 있었다.

눈 앞의 이 메이드와 친해 질 방법이 떠 올랐다.

"시아라... 그러면 내일부터 나와 할게 있어."

­­­­­­­­­

다음 날 점심이 지나서야 그녀가 내 집무실로 들어왔다.

어제 너무 두루뭉술하게 넘어 가서 그랬는지 그녀는 약간 긴장돼 보였다.

오늘 오전에 그녀를 위해 미리 내 책상 맞은편에 수직 방향으로 책상을 하나 더 가져다 놓았다.

새로 놓인 책상엔 서류가 잔뜩 쌓여 있었다.

후작가에 있는 재무부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장부를 작성한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도둑에게 재물을 맡겨 놓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시아라는 다르지. 그녀는 오늘부터 훌륭한 내 조수가 될 것이다.

겸사겸사 사이도 가까워지면 일석이조다.

"시아라 왔어? 밥은 잘 먹었어?"

"...응"

"여기 와서 앉아 볼래?"

"..."

문 앞에 서서 가만히 있던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간단한 안부 인사에 그녀의 긴장이 한결 풀어지는 게 보였다.

가장 먼저 할 일은 그녀와 친해지는 일이다. 나를 가장 많이 의심하는 사람, 나를 가장 자세하게 아는 사람.

그녀와 대화를 통해 여러 정보를 얻어야 했다. 그러려면 친해질 필요가 있었고.

"시아라. 둘이 있을 땐 지금처럼 편하게 불러. 친구잖아."

의자에 앉아 바닥을 쳐다보던 그녀가 내 말에 고개를 번쩍 들어 나를 쳐다봤다.

"기, 기억이 돌아온 거야???"

"아니."

"..."

그녀가 다시 슬픈 기색에 잠기기 시작했다. 이거, 생각보다 더 섬세한 여자였다.

"그러니까 시아라. 나를 도와줘. 내 곁에서 옛날처럼 나를 대해줘. 그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알겠습니다."

"다시"

"...응"

"그럼 시아라. 나한테 네 이야기를 해 줄래? 내가 기억이 날 수 있게."

그녀를 자리에 앉혀 놓고 찻병을 꺼내 차를 끓였다.

느긋한 마음으로 그녀를 등진 채 찻병만 바라보며 그녀가 진정할 시간을 줬다.

오늘은 할 일이 많았다.

오전 내내 그녀에게 어떤 방식으로 일을 가르칠 건지, 어떤 일을 시켜야 효율적인지 고민하느라 일을 거의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좀 더 늦게까지 일하면 될 뿐이다.

일단 지금은 그녀를 달래서 이 영지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 제대로 마무리를 지어 놓아야 다음에 이런 비슷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

그녀 앞으로 찻잔을 올려주며 물었다.

"시리아. 우리가 언제 처음 만났는지 기억해?"

잠시 나를 보며 고민을 하던 그녀는 이내 마음을 다잡은 듯 입을 열었다.

이야기 듣기 참 힘들다.

"...네 살 즈음 이었을 거에요. 성으로 출근하시던 아버지가 저를 같이 데려와 도련님을 소개 시켰어요."

"반말"

"아...응..."

"아무튼 그래서?"

"...그래서 그 뒤로 카인...과 나는 13살까지 같이 놀았어. 나는 아침마다 아빠 손을 잡고 같이 영주성으로 왔고 그 때 카인 네가 날 기다리고 있었어."

"13살까지?"

"응..."

좋은 타이밍이었다.

기회가 난 김에 물어봐야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몇 살이야...?"

"..."

그 말에 나를 바라보던 시아라의 눈이 다시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정말 내가 기억을 잃은 사실을 믿는지 완전히 경계가 풀린 눈치였다.

'안돼!'

어떻게 잡은 분위기인데 다시 반복할 순 없었다.

분위기를 반전 시키기 위해 일부러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웃으며 말을 꺼냈다.

"시아라. 또 울 거야?"

"...아니야."

"울보"

"...아니야!"

"그러니까 울지 마. 이틀 연속 여자를 울리는 나쁜 놈 만들 거야?"

내 말에 그녀가 입을 삐죽였다.

"...한 번은 괜찮고?"

'...'

"그래서 우리는 몇 살이야?"

아무렇지 않게 싱긋 거리며 말을 돌리는 내 모습에 그녀의 미간이 곱게 오므라졌다.

"성격 나빠졌어."

"내 원래 성격은 어땠는데?"

"원래 성격?"

"응. 네가 생각하던 평소 내 모습"

"음..."

그 말에 그녀의 눈이 바닥으로 깔리며 깊게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카인의 성격을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을 테니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원래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대방의 성격을 한번에 단정 짓기는 어렵다.

상대방의 많은 모습을 봐왔기 때문에 한 단어로 설명하기엔 가지고 있는 정보가 너무 많다.

사실, 내 원래 성격이 어땠는지는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성격까지 흉내 내기엔 가진 정보가 너무나 부족했고, 그럴 필요도 없다.

지금 급한 것은 내 주변 사람들의 정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한번 더 말을 돌린 것을 깨닫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챙기는 성격은 아니었어..."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드디어 정보를 얻을 차례다. 자연스레 상체가 조금 앞으로 기울어지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네 시녀로 일하면서 옆에서 지켜 본 너는 거의 하루의 대부분을 검술과 궁술 훈련 중 이었어."

어쩐지, 요즘 따라 아침에 일어나면 온 몸이 근질거리곤 했다.

단순히 몸이 변해서 느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근손실 나는 소리였다니,어디선가 헬창 카인의 비명이 들리는 듯 했다.

안 그래도 이 세계로 넘어오고 나서 주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운동을 의식적으로 피했었는데,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일까?

샤워할 때 마다 스스로의 몸을 보고 감탄하긴 했었다. 단순히 헬스로 키운 물통이 아니었다.

'조금 아깝긴 하지.'

"...말주변은 별로 없었어. 아니, 과묵했다고 해야 할까?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너를 모르는 사람들은 너를 어려워했어."

이건 좋은 정보였다.

사람의 첫 인상은 중요한 정보였기에 머리 속에 기억했다.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날 땐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어도 된다는 뜻 이었다.

거기까지 듣고 한 가지를 질문했다.

"그런데, 기사의 딸인 네가 내 전담 시녀가 된 이유가 있어?"

그 말을 듣자 그녀의 얼굴이 다시 벌게지기 시작했다. 나를 쳐다보는 두 눈은 야속함을 담고 있었다.

"그...기억 안나?"

"미안."

"...네가 나랑 떨어지기 싫다고 떼를 써서..."

"내가?"

의외라는 내 표정을 본 그녀의 눈은 이제 원망을 담고 있었다.

나 때문에 인생에도 없던 시녀 생활을 했는데, 당사자는 기억도 못하니 삶을 부정 당한 기분일 것이다.

건드려선 안 될 부분을 건드려 버렸다.

'아이고'

"시아라"

"...왜."

자연히 대답이 퉁명스러웠다. 앉아있던 그녀의 자세가 약간 삐딱해졌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편이구나. 내겐 좋은 정보였다.

"기억 못해서 미안해... 내가 너무 나쁜 놈이야..."

"됐어..."

"그런데 시아라."

"왜 불러..."

"너는 시녀가 되는 게 싫었어?"

"..."

그녀의 입은 열리지 않았지만, 몸은 대답을 하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조금 떨리더니, 나를 쳐다보던 원망스런 눈빛이 땅으로 떨어졌다.

"..."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건가. 나도 모르게 자꾸 웃음이 흘러 나왔다.

정말 자기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아이였다.어제는 긴가 민가 했지만 이로써 확실해졌다.

그녀는 나를, 정확히 말하면 카인을 좋아한다.

이제는 이 세상에 없을 카인에게 위로의 말을 보냈다.

이 아인 내 여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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