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4화 (4/191)

〈 4화 〉 상행

* * *

똑똑.

"아버지. 저 왔습니다."

"들어오거라."

문을 열고 들어가니 보름 전에 본 호랑이가 오늘도 앉아 있었다.

표정 없이 서류를 보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보자, 그제서야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세나야."

"..."

다른 귀족을 호령 하는 위세 높은 후작이라 해도 열 살 막둥이 딸의 투정에 화를 낼 수는 없는 법이다.

"허...참"

그리고는 나를 쳐다보며 설명을 필요로 하는 눈빛을 보낸다.

궁금한 얼굴로 쳐다보는 호랑이의 모습은 무서웠던 첫 인상과는 사뭇 다르다.

자연스레 말이 부드럽게 나왔다.

"아버지를 뵙기 위해 나왔는데 제 방문 앞에 있었습니다."

피식 웃으며 말하자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소녀가 그제서야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랑 놀려고 나온 거 아니었어?"

"아니야. 맞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울고 내려올까?"

"...응."

어린 아이는 내가 농담을 하는지, 진담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땅에 내려 섰다.

"세나야. 아버지랑 오빠랑 얘기할 게 조금 있는데 잠깐 다른 데서 놀다 올래?"

제발.

"시러."

"..."

"그... 세나야. 아빠랑 오빠는 재미없는 이야기를 할 건데 괜찮겠니? 가서 둘째 오빠랑 놀고 있는 건 어떻니?"

"싫어. 둘째 오빠 아직 잔단 말야. 아까 들렸다가 큰 오빠 보러 간 거야."

호랑이 이마에 힘 줄이 하나 올라온다.

세나의 출현은 예상 밖이었다.

그렇다고 복도에서 엉엉 우는 아이를 놓고 올 수는 없었기에 데려왔는데, 도통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후작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입을 열었다.

"됐다. 이야기나 해 보거라."

"...아버지."

"왜 그러냐."

어떤 반응을 보일 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해야 할 말 이었다.이 영지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선 확실한 수가 필요했다.

"저...상행을 다녀오겠습니다."

작은 것부터, 바닥부터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영지가 강해질 방법이 무엇일까.

며칠 동안 영지를 지켜보며 고민한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돈이 필요해.'

기사단을 육성하고 싶으면 돈이 필요하다. 영지 내에 도로를 깔고 싶어도 돈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영지는 어떻게 돈을 벌고 있는가?

이 성의 영주민들은 대다수가 철광석에서 일하는 광부였다. 그들은 매일 저녁 일이 끝나면 채광량의 삼 할 정도를 관리인에게 넘겨주는 방식으로 세금을 내고 있었다.

그렇게 모인 철광석은 가문 직속 상단이 싣고 주기적으로 영지를 벗어나고 있었다. 구슬의 한계로 그 이상은 보지 못했지만, 나흘 만에 돌아오는 것은 확인했다.

즉, 기껏해야 옆 영지에서 판매를 하고 돌아온다는 뜻이었다.

"...뭐?"

"보름 동안 고민을 많이 해봤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생각했습니다."

"상행?"

"예."

"상행???"

"...예."

"상행?????????"

반응이 불안하다.

못 들을 걸 들은 것 마냥 호랑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빠...?"

"어?"

그제서야 세나를 보자 표정이 이상했다.

눈이 동그랗게 커져선 낯선 사람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충격적인 말인가?

더 이상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은 위험했다.

두 눈이 커다래진 후작의 말을 듣고 반응하는 것이 낫겠다 생각했다.

"...카인."

"네. 아버지."

"똑바로 설명해 보거라. 갑자기 상행을 다녀오겠다고? 기억은... 아무튼 안된다."

후작이 무언가 말을 하려다 세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급하게 말을 마무리했다.

막내 앞에서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제 몸은 건강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지, 필요하다 생각해서 다녀올 생각입니다."

"그 말을 듣고 믿으란 말이냐. 정체도 알 수 없는 병으로 누워있던 너를?"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

"이 영지를 근본적으로 부강하게 만들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영주민들을 배불리 먹여야 합니다. 그래서 영지가 부강해집니다."

"배불리 먹여?"

"말...그대로 입니다. 저를 잃으니 전체가 보였습니다. 칼을 잡는 방법을 까먹었지만, 식량 난을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후작이 더욱 커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상행을 입 밖으로 꺼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듯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칼을 쥐는 법을 까먹어?"

"...예."

"허..."

"..."

집무실 안이 침묵으로 맴돌았다. 후작은 할 말을 잃은 듯 가만히 나를 쳐다봤다.

후작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이제야 내가 기억을 잃음으로 인해 생긴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한 듯 참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신관의 치유로 기억이 돌아오길 바랬을 수도 있다.

"식량난을 해결할 방법은 중요하다. 네가 미친 것이 아니란 것 즈음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나 네가 칼을 쥐는 방법을 까먹었다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다."

"..."

나도 후작도 더 이상 세나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이제 와서 눈치를 보기엔, 너무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무예를 다시 익히거라. 기억은 잃었어도 몸은 기억할 것이다."

"...예."

"또 기억을 잃은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거라. 네가 기억을 잃은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영지의 미래 문제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상행에 관해서는 모든 가신을 불러 설명을 듣겠다. 나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다."

후작의 마지막 말은 예상 밖이었다.

한 명을 설득하는 것과 수십 명을 설득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

"이 큰 영지를 모두 내 명령으로만 돌아갈 수는 없다. 관리와 가신들이 존재하는 이유다. 네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을 설득해야 상행을 가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냐."

맞는 말이었다.세금으로 걷은 철광석을 후작의 독단으로 상행을 보낼 수는 없다.

적어도 나는 직속 상단처럼 고작 옆 영지로 가서 철광석을 팔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옆 나라. 그리고 그 곳에서 더 먼 나라의 상인들을 만날 생각이었다.

"집사장"

"예, 가주님"

내 옆의 세나를 가만히 쳐다보던 가주가 문 밖에 대고 큰소리로 집사장을 불렀다.

"두 시간 안으로 영지의 가신들과 가족들을 대전으로 부르게."

"알겠습니다."

멀리 집사장이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불안이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후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병이 다 나았음을 증명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만약 네가 그들을 설득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 것 만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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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은 구슬로 봤던 것보다 넓어 보였다.

상석엔 후작이 앉는 의자가 보였고, 그 양 옆으로는 서열 순으로 가신들이 자리하는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대전의 가운데 빈 공간. 그곳에 서 있었다.

'차라리 잘 됐다. 후작 말대로 장남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소문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어.'

멀쩡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이 곳에서 보여준다면, 가신들의 신뢰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일이 커졌지만, 어차피 일어난 일 아닌가.

걱정은 그만 하고 이젠 대비를 해야 할 때였다.

아직 가신들이 도착하기 전 이었기에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다 대전 구석의 책장이 눈에 띄었다.

회의가 열리기 전까지 시간은 여유로웠다.

가까이 다가가 책장에 꽂힌 종이 뭉치들을 확인 했다.

'회의록이네?'

회의록을 이런 곳에 버젓이 둬도 되는 건가?

하긴, 성 한가운데까지 들어와서 훔칠 수 있으면 어디 있어도 훔칠 일이다.

할 것도 없었기에 가만히 서서 회의록을 뒤적거렸다.

­대륙년 531 1분기 회의록­

종이가 뻣뻣한 것이 가장 최근에 있었던 회의록으로 보인다.

이 영지의 기본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망설임 없이 첫 장을 펼쳤다.

가장 먼저, 세율이 보였다.

영주민들은 삼십 프로의 세금을 내고 있었다. 구슬로 확인한 것과 동일했다.

광산에서 채취한 철광석의 삼 할을 세금으로 내고 있는 것이다.

'나머진?'

구슬로 영지를 관찰하며 본 것이 있었다.

영지 내의 마을을 다른 나라의 상단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봤었다.

영주민들은 철광석을 가지고 나와 상단에게 식량을 교환하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캐낸 철광석으로 이 주 동안 먹을 식량으로 교환했다.

이 세계에 지식이 없는 나도 알아챌 만큼 터무니없는 교환비였다.

그 외에도 도움이 될 만 한 내용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대전 밖에서 사람들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회의록을 덮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이 곳에서 후작과 가신들을 설득해야 한다.

사실 설득에 실패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상행을 가지 못한다 해도 영지를 살릴 방법은 있을 테니까.

그러나, 너무 오래걸렸다.

한시라도 빨리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모든 문명이 낯선 이 곳에서 살아가고 싶지 않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을 때, 대전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천천히 눈을 뜨고 문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기사단장 바르킨 경... 재정담당관 헥슬러 경... 재무관리 마틴 경...'

'저 사람은... 수비대장 쥴렌 경인가?'

역시 책자를 보길 잘했다.

아직 헷갈리는 인물들이 몇 명 있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연기가 가능했다.

대전 안으로 들어오던 사람들이 중앙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다양한 얼굴을 보였다.

안도하는 시선도, 깜짝 놀란 시선도 있었고, 기쁜 눈으로 바라보는 후작 부인도 있다.

"이제 다 모인 것 같군"

대전을 들어오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대략 삼십 명의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앉았다.

정면엔 후작이 있었고, 그 옆은 삼십 대 후반 즈음으로 보이는 후작 부인과 동생들이 앉아있었다.

실제로는 처음 보는 가족의 모습이다.

후작 부인이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본다.

세나 역시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고 남동생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주위를 보고 있었다.

...남동생이 뭐 그렇지.

내가 방을 나선 사실보다 이 대전에 들어왔다는 현실이 더 흥미로울 것이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엔 누가 봐도 나 기사요 하는 사람이 안절부절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르킨 경인가?'

잠시 주변을 살펴보던 후작이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호출에도 모두 참석해주어서 고맙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지난 몇 달 동안 장자가 와병한 사실은 알고 있을 것이네."

그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다시 한 번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이 그 모습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나를 찾아와 하는 말이 상행을 다녀오고 싶다더군. 이에 경들의 의견을 수렴하고자 이 자리를 마련했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사단장 바르킨 경이 벌떡 일어났다.

"도련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상행이라니요?"

반응을 보니 기사단장이 맞나 보다. 그를 보며 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후작님의 말씀처럼 상행을 다녀올 생각입니다."

"훈, 훈련은 어떡하시고요."

어지간히 충격적인 내용이었을까.

그의 표정이 거무죽죽 해진다.

그와 동시에 여러 곳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뭐? 상행?"

"갑자기...?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상행? 상행이 내가 생각하는 그 상행이 맞나?"

"그만"

가주의 한마디에 웅성거리던 소음이 가라앉았다.

가주 앞에서 허락 없이 가신들끼리 떠드는 모습은 분명 상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지금 이 상황이 상식적이지 못하다는 말도 된다.

가신들을 조용히 시킨 후, 후작은 나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꺼냈다.

"카인, 네가 말하는 상행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이야기를 해 보거라."

이제 시작이다.

내가 옆 나라 알만 왕국으로 가려는 이유, 직속 상단이 있음에도 상행을 다녀오려는 이유.

이들을 설득해야 한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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