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오빠!
* * *
"잠시... 확인해봐도 괜찮겠습니까?"
"이 구슬 말입니까?"
"예. 실례가 아니라면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보여줘도 괜찮은 걸까.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지금 나에겐 지킬 힘이 없었다.
거절을 표하려던 그 때,
"남들에겐 단순한 구슬이다. 보여줘도 괜찮다."
인자했던 노인의 표정이 무표정하게 변하더니 익숙한 말투로 말을 내뱉었다.
"...신이십니까."
"그래. 이 왕국에서 믿고 있는 종교는 나의 신도들이다."
"..."
"그 구슬에 내 힘이 들어있어 호기심을 표했을 것이다. 남들에게 보여줘도 별 다른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라."
뜻밖의 호기심을 충족하긴 했지만, 그게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만난다면 꼭 물어볼 말이 있었다.
"...어디부터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또 언제까지 대륙을 통일해야 합니까."
"기간은 없다. 방법도 없다. 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다."
"신이시지 않습니까. 길을 알려주십시오."
어차피 신도 나를 도와야 했다. 그러기 위해 나를 불렀다.
하늘의 군대를 내려 달라는 부탁은 안 들어줄 가능성이 컸지만, 길 정도는 제시해 줄만 했다.
"작은 것부터 해라. 바닥부터 시작해라."
"..."
교과서에나 나올 말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깨달았지만, 구체적인 대답을 원했다.
"이 아이의 신력이 다했다. 이만 가겠다."
"잠ㄲ..."
왜 온 것인가. 단순히 구슬의 비밀을 알려주기 위해 직접 강림했던 것일까.
그렇게 쉽다면, 평소에도 옆에 있으면 될 일 아닐까.
이런 사소한 일로 강림한 것도 웃겼지만, 별 도움도 없이 가버린 것도 어이가 없었다.
나이든 사제는 방금의 기억이 없는 듯 다시 인자한 표정으로 돌아오며 입을 열었다.
나만 기억할 사건이 어이없이 생겼다.
"우선, 며칠 이곳에 쉬면서 도련님의 진료를 보겠습니다."
"예."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올 테니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어쨌든 대답은 해야 하니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사제의 눈이 다시 이채를 보이다가 마주 인사하곤 방에서 나갔다.
"후우..."
머리 속이 복잡했다. 신의 말이 떠올랐다.
'작은 것부터, 바닥부터?'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병사 생활부터 하라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걸까.
다시 침대에 드러누워 습관적으로 구슬을 만졌다.
자연스레 눈이 감기며 시점이 하늘로 올라갔다.
언제 느껴도 신기한 감각이다.
하늘을 돌아다니며, 늘 그랬던 것처럼 영지 내의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별 소득은 없었다.
"오늘이 마지막 진찰입니다. 저는 내일이면 다시 수도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그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별 다른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죄송할 건 없었다. 아픈 곳이 없으니 치료할 곳도 없는 것이 당연했다.
오히려, 이런 남부까지 내려오기 위해 고생을 했을 것이다.
"수도과 비교하면 이 곳 영지는 어떻습니까?"
"수도에 있긴 했지만, 수도원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 영지의 사제들보다 특별한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식량난이 더 심한 것이겠군요. 지방일수록 영지민들의 식량난이 심합니다."
"...식량난이요?"
"예. 도련님께서도 알다시피 저희 왕국의 고질적인 문제점입니다. 최우선 과제이나 마땅한 해결책이 없어 큰일입니다."
"..."
마침내 그가 마지막 진료를 마치고 내게 인사하고 떠나갔다.
하지만 내 정신은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계속해서 되뇌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식량난...'
단어가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구슬을 집어 들어 눈을 감았다.
후작 가문의 성이 보이고 주변으로 산이 펼쳐져 있었다.
귀족으로써 예법을 배우기 위해 평소에는 늘 성 안의 생활을 관찰했지만, 이번엔 성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성을 넘어 조금 더 멀리, 외성을 벗어나 조금 더 멀리 움직였다.
외성 밖의 마을이 보였다.
그들을 보기 위해 확대를 거듭했다.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조금씩 얼굴이 가까워지고, 허름한 차림새의 영주민들이 눈에 들어왔다.
볼은 움푹 패이고, 살이 말라 옷이 헐렁했다.
죽은 눈으로 곡괭이를 들고 밭을 메고 있었다.
어떤 무리는 까만 얼굴로 광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땟국물이 가득한 어린아이가 울고 있었다.
어미는 줄 것이 없어 조그마한 과일을 건네주고 있었다.
못생기고 벌레 먹은 것이 산에서 채집한 과일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
50년 대 한국의 모습이 이랬을까.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우리네 조상들의 모습이 이랬을까.
비로소 할 일을 깨달았다.
바닥부터 시작하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 몸의 아버지, 영지의 주인이자 후작을 만나야 했다.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구슬에서 손을 떼고 옷을 줏어 입다가 멈칫했다.
'무슨 방법으로?'
이 영지는 돈을 어떻게 벌고 있는가.
철광석을 어떻게 팔고 있는가.
나는 어디부터 건드려야 하는가.
마음만 급했다.
지금 후작을 찾아가 봤자 변할 것은 없었다.
다시 구슬을 집어 들었다.
울고 있던 어린아이가 과일을 먹고 있었다.
다시 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외성을 들어와 내성 안으로, 후작의 집무실까지 들어갔다.
후작이 없었다.
어디 있을까.
가신들과 회의를 하고 있을까. 시선이 대전을 향했다.
후작은 그 곳에 있었다. 가신들과 회의 중이었다.
안타깝게도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대전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운 것으로 보아 좋은 안건으로 회의 중은 아님을 깨달았다.
지금 당장 저 곳으로 갈 순 없었다.
후작을 제외하곤 그 누구의 얼굴도 몰랐다.
혹시라도 아는 체를 하면,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소문이 영지로 퍼질 것이다.
그러면 어떡해야 하는가.
다시 영지 밖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철광석을 어디에서 모으는지 알아야 했다.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파는 것인지 확인을 해야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산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얼굴과 옷이 까무잡잡한 사람들이 수레를 끌며 이동 중이었다.
표정엔 피곤함이 가득했다.
그렇게 삼 일 밤낮을 영주민들을 보며 살았다.
작은 것부터, 바닥부터 확인했다.
밥을 가져다주는 시녀에게 부탁해 책을 읽었다.
대륙의 문화부터, 생활상을 확인했다.
그 외의 시간은 전부 성과 저택 내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처음은 후작이었다. 행동은 어떤지, 가신들에겐 어떻게 대하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지켜봤다.
그 다음은 원래 주인의 가족들이었다.
후작 부인과 내 동생 두 명, 그들을 지켜봤다.
후작 부인은 늘 화단에서 꽃을 가꿨다. 몇 명의 메이드들과 화단을 가꾸며 그 곳에 마련된 벤치에서 차를 마시곤 했다.
남동생은 열 다섯이나 됐을까. 한창 치기 어린 나이로 성 내의 이곳 저곳을 쏘다녔다. 검사에 대한 로망이 있는지 늘 허리춤엔 목도가 걸려있었다.
마지막으로 여동생은 어렸다. 고작 열 살은 됐을까. 후작 부인을 따라다니며 놀거나, 아직 유모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문제가 생긴 건 그 다음이었다.
연무장에 있는 기사단장, 성 내에서 일을 하는 수 많은 관리들과 영지 곳곳에 자리한 가신들. 얼굴은 기억하겠으나 이름을 알 수가 없었다.
만약 그들을 만난다면?
'누군지는 알지만 인사를 못한다.'
작은 문제는 아니었다. 적어도 가신들의 이름과 얼굴까지는 모두 외워야 후작을 만나러 갈 수 있다.
"조직도... 말씀이십니까?"
"아버님께 가서 내가 요청했다고 하면 받아올 수 있을 거야."
후작은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믿고 있다. 내 부탁을 충분히 들어줄 것이다.
늘 같은 시간에 식사를 가져오던 시녀에게 부탁했다. 조직도가 없어도 적어도 비슷한 것은 있지 않을까.
의아함과 약간의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대답한 시녀가 곧 얇은 책자를 가져왔다.
됐다.
후작을 만날 준비가 거의 끝이 나고 있다.
차근차근 한 명씩 확인했다.
책자에 나온 기사단장의 이름을 보고 구슬로 연무장을 바라봤다.
재정담당관의 이름을 보고 재무부를 지켜봤다.
적어도,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후작 외에 다른 이들에게 들켜선 안됐다.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에 차질이 생겨선 안됐다.
'바닥부터, 낮은 곳부터'
끊임없이 되새기며 구슬과 책자를 손에 들었다.
옷을 꺼내 입었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리했다.
이제는 적응해버린 낯선 얼굴이 보인다.
역시나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날카로운 눈매에 젊어 보이는 얼굴. 많아야 스무 살 초반이나 되었을까.
이전의 삶과 비슷한 것은 검은 머리에 눈동자 뿐이다.
나이도, 이름도, 얼굴도 다르지만 이젠 이 얼굴이 나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으로 다가갔다.
첫 날 후작을 만난 이후로 보름 만에 열리는 문이다.
이번에도 후작을 만나러 간다. 더 이상의 와병 생활은 무의미했다.
약간의 긴장이 몸을 감쌌다.
후작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만난 적이 없었다.
잘 대처할 수 있을까.
저택 내에는 후작 가문의 가족과 사용인들이 살았다.
문이 열리면 메이드와 집사들을 처음 만날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대하며 후작의 집무실까지 이동해야 했다.
차라리 괜찮았다.
처음부터 후작 부인이나 가신들을 보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그들의 이름과 직책은 모두 숙지했지만, 원래의 이 몸이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다시 한 번 긴장을 떨쳐내고 문 고리에 손을 올렸을 때,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남성의 목소리는 없다.
메이드들만 있는 것일까.
마침 잘 됐다.
가장 쉬운 상대부터 만나는 것이 좋았다.
그녀들에게 길 안내를 부탁하면 좋겠다.
손 끝에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문 밖엔 두 명의 여인이 서있었다.
두 메이드는 방문을 등지고 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난처한 표정이다.
그 때, 메이드들의 치마 폭 사이에서 작은 여자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오빠!"
쾅!
"어? 왜 다시 닫아!! 오빠!!!"
'이건 좀 오반데.'
첫 만남부터 여동생을 만났다.
처음부터 기출 문제였다.
하지만 별 수 있나. 앞에 있든, 뒤에 있든 어차피 풀어야 하는 문제다.
긴장하지 말고...
다시 거울을 보며 표정을 확인 한 나는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열 살은 됐을까 말까 하는 여자아이. 하얀 원피스에 낮은 단화를 신고 있었는데, 머리는 역시 검은색이었다.
인형에 옷을 입혀 놓으면 이런 모습일까.
지르하르트 가문의 막내이자 내 동생 지그하르트 세나가 울상 어린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오빠 이제 다 나았어?. 그럼 이제 같이 놀아조..."
"으,으응?"
"오빠 아파서 나 심심했어..."
인형 같은 얼굴에 금세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 덩달아 찡그린 입과 빨개진 코는 영락없는 개구쟁이의 모습이었다.
"히잉......"
기어코 눈물이 한 방울 또옥 떨어졌다. 그러자 자기 차례라는 듯 반대편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고 긴장이 턱 풀렸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뚝. 울지 마."
내 말에도 그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서러운 듯 내 품에 안긴 어린 소녀는 내 흰 셔츠에 물방울 무늬를 더하기 시작했다.
"우리 세나 이제 몇 살이지?"
"흐윽, 흑... 열 살"
"이제 어른이네? 세나 이제 다 컸는데 이렇게 울어도 돼?"
"...안돼."
소녀를 달래며 자연스럽게 나이를 알아냈다.
구슬로 관찰하는 것으로 이름과 얼굴은 알았지만, 나이는 알 수 없으니까.
소녀의 뒤에서 이 장면을 쳐다보던 두 메이드는 내가 나올 줄 몰랐는지,
그리고 막내 주인의 귀여운 모습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한다.
일단 이 몸의 아버지이자 가주인 지그멜 후작에게 인사를 하러 가는 것이 먼저다.
자연스럽게 소녀를 한 팔에 안아 들고는 가주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