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거짓말
* * *
'누구지?'
'어제 술 처먹고 다른 집에 기어들어갔나?'
'좆 됐다. 시발...'
'술 처먹고 길에서 자다가 납치 당한 건가?'
'근데 한국인이 아닌 것 같은데...?'
'옷차림이 왜 저래?'
머리가 렉이 걸리면 이런 느낌일까. 온갖 생각이 머리 속에 떠오르다 사라졌다.
"저...도련님?"
"...네?"
"...예?"
"..."
이제서야 나를 부른 여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한 눈에 봐도 동양인은 아닌 듯한 얼굴형인데, 검은색의 머리카락은 단정히 묶여 머리망에 들어가 있다.
발목까지 오는 검은 드레스에 흰색 에이프런을 걸치고 있는데, 바다 건너에서 넘어온 영상에서나 보이던 메이드복처럼 생겼다.
'가만, 진짜 메이드복인데?'
...개꿀잼몰카인가?
한창 여자를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는데 나를 쳐다보던 여자가 다시 입을 벌렸다.
"저... 도련님..."
"...저요?"
"..."
이번엔 저 여자가 침묵에 빠졌다.
아니, 도련님이라니?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였다.
그때, 가만 나를 쳐다보던 여자가 눈썹을 모으더니 내 천 자를 그린다.
"도련님, 장난 치실 때가 아닙니다. 가주님께서 찾습니다."
"..."
미치겠다. 상황 파악도 안된 상태에서 이젠 가주가 등장한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 때, 문 밖에서 다른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더니 나에게 인사했다.
"도련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
똑같은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여자가 들어왔는데 역시나 검은 머리의 서양인이었다.
'혼혈인가?'
"아, 메이드장님. 죄송합니다. 도련님께서 장난을 치셔서...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죠. 일단 도련님 준비부터 시켜드리세요."
"네. 죄송합니다."
안색이 살짝 창백해진 젊은 메이드가 대답을 하고 나에게 다가왔다.
"도련님, 환복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리곤 더 이상 장난을 치지 말라는 듯 단호하게 내 몸에 손을 갖다 댔다.
...아.
그제야 생각이 났다.
오래된 폐허에서 신을 만나고, 녹색 구슬을 받은 기억이 떠올랐다.
꿈이 아니었다.
정말 다른 세계로 넘어온 것이다.
다시 돌아가려면 대륙을 일통해야 했다.
가능할까?
차라리 총이라도 쥐어주면 쏘겠다만, 칼을 쓰고 마법을 쓰는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룻밤 만에 뒤바뀐 삶이 너무 가혹했다.
메이드가 능숙한 손길로 윗옷의 단추를 푸르고 있을 때야 정신이 제대로 돌아왔다.
내 옷을 벗기는 그녀의 손을 피해 뒤로 물러나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꺅!"
연이은 기행에 나를 쳐다보는 두 여자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그제서야 마치 정신에 문제가 생긴 사람을 보듯이 둘 다 한걸음 물러섰다.
내가 누구에 빙의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메이드의 손을 거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어제 밤까지만 해도 현대인의 삶을 살다가 아무렇지 않게 남의 손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몇 이나 있을까.
나중에라도 적응은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사실, 지금이 환상인지, 현실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일단 깜짝 놀라 뒷걸음 친 메이드에게 차분히 이야기했다.
"내, 내가 입을게"
"...네?"
"이거 입는 거지? 내가 입을게."
하고 침대에 놓인 옷을 집어 들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입을게. 제발 가만히 있어."
다시 다가오려는 메이드에게 손짓으로 막았다.
그들도 나도 어색한 상황이었지만, 일단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 현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에 들린 옷은 생각보다 고급스러웠다.
부드러운 원단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게 중요한가. 지금'
옷의 질감이고 나발이고. 당장 기억상실증 걸린 정신병자 취급 받기 직전인데 일단 이 상황을 벗어 나는 게 현명했다.
옷 입는 방식이 조금 낯설었지만 이 세계의 사람들이라고 다리가 세 개인 것도 아니고 혼자 입기 어려운 부분은 없었다.
얼추 바지와 셔츠, 조끼까지 걸치고 나서 말했다.
"다 입었다. 가자 이제"
"저기..."
"어? 왜?"
"바지, 거꾸로 입으셨습니다."
"..."
쓰리 아웃을 당한 타자의 심정으로 주섬 주섬 바지를 내렸다.
똑똑.
"가주님. 도련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게."
내가 일어났던 방에서 도착 하기까지 복도를 5분이 넘게 걸었다.
길바닥의 거지나 농민으로 태어난 것보다는 다행이었다.
당장 먹고 살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해야 할 일이 많음을 뜻한다.
귀족의 예법부터, 행동과 말 하다못해 식사 예절까지 모두 배워야 한다.
방 안에 들어서자 중년 남자가 탁상 앞에 앉아 있었다.
백발이 희끗희끗 난 머리는 뒤로 넘겼고 눈썹은 두껍게 숯 칠한 듯 생겼는데 눈매가 사람 한 둘 잡아본 눈매가 아니었다.
어깨는 저렇게 넓은지 얼굴 두 개가 들어가도 남아 보였다.
옷 밖으로도 기골이 장대한게 느껴지는데 탁상 옆엔 장검이 가지런히 세워져 있었다.
'호랑이 잡아다가 옷 입혀 놓은 것 같네...'
그래. 호랑이였다. 현대인에게선 볼 수 없었던 눈빛이었다.
아들이 아닌 것을 들키면 잡아먹히지 않을까. 속으로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자연스럽게 인사를 했다.
"밤 사이 안녕하셨습니까. 아...버님"
"음, 그래. 거기 앉거라"
나에게 대답을 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으로 걸어오는데 키가 2m가 조금 안돼 보였다.
옷 안의 근육이 걸음걸이에 맞춰 꿈틀거렸다. 호랑이한테 옷 입힌 게 맞는 건가?
자연스레 침을 꿀꺽 삼켰다.
생각보다 이 상황이 어려울 것임을 예상했다.
거구의 중년이 내 앞의 소파에 털썩 앉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몸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구나."
"...예?"
첫 멘트부터 험난하다. 원래 주인이 아팠을까.
아프면 얼마나 아팠을까. 큰 병이었을까. 가벼운 고뿔이었을까.
"할 말이 있어 불렀다."
"예."
우선은 눈 앞의 중년의 말을 들어야 상황 판단이 될 듯했다.
알고 있는 정보가 너무 적었다.
눈 앞의 가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수도에서 신관을 불렀다. 아마 다음 주 즈음 도착할 것이다. 그때까지 몸조리를 잘 하거라."
"..."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당분간 구슬로 이 세계를 공부할 필요가 있었는데, 잘된 일이었다.
'잠깐...'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어냐."
"...제 이름이 기억나질 않습니다."
"...뭐?"
"여기가 어딘지, 몇 살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지, 진심이느냐."
이 몸의 원래 주인이 무슨 병을 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수도에서 신관을 불렀다는 말은 가벼운 병이 아니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가벼운 기억상실증을 앓는 체를 취하면, 이 곳으로 오기 전 메이드들과의 사건도 무마될 이야기였다.
"...나 말고 또 누구에게 말했느냐."
결코 평범한 소식은 아니었다.
맞은 편에 앉아있는 가주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만약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소문이 영지 밖으로 흘러나간다면?
끔찍한 소식이었다.
안 그래도 안 좋은 영지 상황에 기름을 끼얹는 소식이었다.
"...이 곳으로 오기 전 메이드들은 눈치를 챘을 겁니다."
"...그 정도면 괜찮다. 신관이 오기 전까지 대외 활동을 금지하겠다. 당분간 식사도 방에서 하거라. 편지를 보내 재촉을 해보겠다. 혹시나 기억이 돌아오면 나에게 먼저 알리거라."
"알겠습니다."
가주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그의 표정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거짓말을 친 그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땐 오히려 이득이었다.
목표가 정해졌다.
신관이 오기 전까지 최대한 이 세계의 지식을 습득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일어나 문을 나섰다.
방에 돌아와 옷을 벗을 힘도 없이 침대에 털썩 누웠다. 푹신한 침대가 현대사회의 기술이 접목된 매트리스보다 포근하다.
한 손으로 목을 조르던 자켓의 단추를 풀었다.
그렇게 단추를 몇 개 풀자 신에게 받았던 녹색 구슬이 품에서 굴러나왔다.
그 작은 구슬이 이 곳이 현실임을 잔인하게 알리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환상도 아니었다.
정말로 대륙을 통일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함이 방 안을 맴돈다.
부모님이 생각났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볼 수 있었는데, 이젠 아니었다.
한순간에 뒤바뀐 삶을 곧바로 적응할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새삼 이 잔인한 현실에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엄마..."
침대 속에 가라앉는 기분이다.
사실은 꿈이 아닐까.
이 모든 게 꿈이고 나는 병원에서 혼수 상태로 있는 것은 아닐까.
기나 긴 잠에 빠진 아들을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신 건 아닐까.
무기력증이 온 몸을 뒤덮었다.
"크흡, 흡, 흑..."
결국 참고 참았던 눈물이 흘러나왔다.
부모님을 다신 못 뵈는 데 나이 삼십 먹고 방 안에서 혼자 우는 것이 뭐가 쪽팔린단 말인가.
한 번 울음이 터지자 참고 참았던 눈물샘이 더 이상 제어가 되지 않는다.
하르모니아 대륙의 서쪽 끝, 높은 산맥과 거대한 호수로 둘러싸여 다른 나라와 교류를 거의 하지 않는 폐쇄적인 왕국이 있다.
이 왕국의 이름은 에어로크. 국가의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대륙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철광석을 생산하고 있지만,
평야의 부족으로 만성적인 식량 난에 시달리고 있는 왕국이다.
에어로크 왕국은 세 명의 후작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많은 철광석을 생산하는 남부의 지그하르트 후작 영지는 평소엔 평화로웠으나,
급작스러운 장남의 와병 생활로 인해 평화는 깨지고 말았다.
"후..."
이 곳에 온 지 벌써 열흘이 지났다.
식사도 거른 채 삼일 밤낮을 울고 나니 슬슬 현실이 다시 눈에 보였다.
정신을 차리고 구슬을 꺼내 영지를 관찰했다.
두 눈을 감고 구슬을 손에 쥐면 마치 핸드폰의 지도 어플을 보듯 하늘에서 보이는데, 마치 현대에서 늘 즐기던 전략 게임의 탑뷰 시점 같았다.
신이 된 기분으로 일주일 동안 영지를 구경하며 이 세계를 공부했다.
이 영지는 지그하르트 후작 가문의 영지였다.
주민들은 대부분 철광석 광산에서 일했으며, 대부분의 영지가 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들어온 몸의 주인의 이름은 지그하르트 카인으로 후작 가문의 장남이었다.
'카인이라...'
앞으로 내 이름은 카인이었다.
후작 가문의 장남으로써 카인을 연기해야 했다.
또 다시 마음이 심란해진다.
지난 일주일 동안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방 밖에서 들려오는 메이드들이 떠드는 소리에 잠시 손에 있던 구슬을 내려 놓았다.
"신관님이 도착하셨다고?"
"예. 곧 바로 오신답니다."
"다행이구나. 문을 열어드리거라."
똑똑똑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햐안 옷에 금색 테를 두르고 흰 모자를 쓴 노인이 들어왔다.
얼굴에 있는 주름 하나에도 인자함이 깃들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노인은 차분히 방으로 들어와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후작님의 부름을 받고 온 밀리온 사제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반 말을 해야 하나 하다가 존댓말을 했다.
내 대답에 노인의 표정이 잠시 이채를 띠더니 곧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우선 몸을 잠시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예."
내 허락이 떨어지자 나이 든 사제가 가까이 다가와 팔을 잡았다.
마치 한의원에서 맥을 짚는 듯한 모양새에 이 세계에서도 맥을 짚는가 생각이 들었는데 갑자기 노인의 손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뭐야.'
곧 따스한 기운이 팔을 통해 들어와 몸으로 퍼져나갔다.
뒷 목을 잡힌 고양이마냥 나는 꼼짝도 못하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렇게 오 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노인이 손을 떼곤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증상이 어떤지 정확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열흘... 전부터는 몸이 나아졌습니다. 지금은 아픈 부분은 없습니다."
"확실히 확인을 해 본 결과 몸에 이상은 없습니다. 다만... 기억상실증이 있으시다고요."
"예."
"기억상실증은 병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치유가 어렵습니다."
당연히 병이 아니었다.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라 영혼이 뒤바뀐 것이다.
오히려 노인이 치료가 가능하다는 말을 했다면, 돌팔이라는 소리였다.
그때, 노인이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내 손에 있던 구슬을 쳐다봤다.
"잠시... 확인해봐도 괜찮겠습니까?"
"이 구슬 말입니까?"
"예. 실례가 아니라면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