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화 (1/191)

* * *

〈 1화 〉 누구지?

* * *

여기는 어딜까.

우선 확실한 건, 이 곳이 내 방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거대한 빛 무리가 하늘을 유영하고 있었다.

하얗고, 붉고, 푸른 빛들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모인다.

태양을 눈 앞에서 보면 이런 느낌일까. 자다 일어나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 빛 무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거대한 대전이었다.

만화에서나 보던, 영화에서나 나오던 오래되고 무너진 거대한 대전이었다.

환한 빛 무리와 대조되는 폐허의 모습이다.

혹시 꿈일까.

아니다. 꿈은 아니다.

발 끝에서 느껴지는 돌 바닥의 차가운 감촉은 기이한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나를 붙잡고 있다.

그럼 죽은 걸까.

이건 그럴 듯하다.

어제 술을 마신 게 문제였을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 놈이 반가워 과음을 하긴 했다.

그 때,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신을 차려라."

대전이 진동할 정도로 큰 소리였다.

무너져가던 기둥들이 흔들리며 먼지를 뿜어낸다.

굵고 굵은 남성의 목소리의 발원지는 한참을 넋을 놓고 쳐다보던 빛 무리였다.

비현실적인 상황에 내가 죽었다는 의심에 확신이 든다.

저승사자일까.

아니면 옥황상제일까.

"누, 누구십니까"

"너희들이 칭하길 신이라 불린다."

맞다.

죽은 게 맞았다.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천국으로 갈까. 지옥으로 갈까.

이 곳은 두 갈래 길의 교차점인가.

수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그 때, 허공을 유영하던 빛 무리가 한 점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빌딩같던 크기가 서서히 줄어들며 반대로 광채가 점점 밝아졌다.

마침내 작은 점에 모였을 때, 빛 무리가 사라지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신의 형상을 본 떠 만든 것이 사람이라 했는가.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검은 머리의 남자가 하얀 천을 몸에 두른 채 다가오는 모습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말하지."

아까 들렸던 목소리가 그 남자의 입을 통해 나왔다.

천국과 지옥 둘 중 어디로 가는 걸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남자의 입만 쳐다봤다.

"여긴 네가 살던 세계가 아니다. 내가 너를 불렀다."

그러나, 그 남자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내가 예상하던 이야기가 아니었다.

"시간이 없다. 내가 먼저 말할 테니 일단 들어라."

그리고 나오는 설명.

이 세계를 관장하는 주신이 있고, 그 밑에 여섯의 신이 있다.

자신은 그 여섯 위의 신 중 하나라고 말했다.

다음 주신의 선별을 위해 경쟁 중이고, 그것을 대비해 눈 앞의 이 남자가 나를 부른 것이다.

그 말까지 들은 나는 다급히 말을 끊을 수 밖에 없었다.

나에겐 그의 말을 듣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그, 그럼 저는 죽은 게 아닙니까."

"안 죽었다."

다행히 그는 별다른 반응 없이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에 나는 부득불 또 다시 말을 끊을 수 밖에 없었다.

"너는 내가 관장하는 왕국으로 갈 것이다. 거기에서 새로운 삶을 살 것이다."

"...예?"

이번에도 말을 끊은 나를 탓하지 않았다.

그저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은 대륙의 일통이다. 그게 주신이 내건 조건이지."

이번엔 또 무슨 소리인가.

머리가 아파왔다.

궁금한 것이 산더미였지만, 한번 더 말을 끊으면 안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뒷골이 싸하게 당겼다.

내 예감이 아니었다. 그가 알려주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 하지만, 나는 너를 특정해서 부른 것이 아니다."

거기까지 이야기한 남자는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나에게 건네줬다.

갓난아기의 주먹만 한 구슬이었다.

녹색 빛 무리가 구슬 안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네게 도움이 될 물건이다. 나라를 하나씩 정복할 때마다 선물을 주지."

그제야 그는 말을 마치고 나를 쳐다봤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듯이.

내가 가장 먼저 할 말은 하나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불가하다."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전 싸움도 못하고, 마법은 커녕 칼질도 할 줄 모릅니다."

"나도 안다."

"그러니 신께서 찾으시는 인물이 아닙니다. 저를 돌려보내 주십시오."

"불가하다."

답답했다.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대답을 네 글자 이상 말하면 죽는 병에 걸렸나?

"...이유를 알려 주십시오."

"아까도 말했지만, 네가 너를 부른 것이 아니다."

그럼 누가 불렀냐. 시발련아.

결국 참고 참았던 화가 울컥 올라왔다.

꿈이 아닐까. 발가락으로 바닥을 비볐다.

차갑고 거친 돌바닥이 발바닥을 긁어댔다.

역시 꿈은 아니었다.

"대륙을 통일시키면 집으로 돌려보내 주지."

"...제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도 모른다."

또 욕지기가 치밀었다.

그냥 가지고 놀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 상황의 을은 나였다.

어떻게든 정보를 얻어야 했다.

"제가 대륙을 정복하면... 돌려보내 주신다는 것은 사실입니까."

"내가 주신이 된다면 가능한 일이다."

"그럼... 지금은 어떻게 저를 부르셨습니까."

"내가 부른 것이 아니다."

돌고 도는 선문답이다.

어차피 못 돌아 가는데 욕이나 시원하게 하고 소멸 당할까.

"내가 부른 것이 아니다. 주신께서 불렀다. 나는 요청한 것이지."

"..."

"그러니 내가 불렀지만, 내가 부른 것이 아니다. 이해됐느냐."

그제야 그의 말이 이해가 갔다.

'진작에 자세히 설명해주지.'

하지만, 대륙을 통일하는 것은 별개의 사건이었다.

나는 징기스칸도 아니고, 나폴레옹도 아니다.

평범하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저는 평범한 인간입니다. 제가 대륙 통일을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도 모른다."

"..."

"그저 나는 너를 도울 뿐이다. 나는 너를 믿는 것이 아니라 너를 부른 주신을 믿는다."

결국, 돌아갈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대륙을 통일해야 했다.

가능의 여부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남자가 준 구슬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구슬의 사용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발가락을 간지럽히는 돌 부스러기가 현실임을 재차 알려왔다.

집에 돌아가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드디어 내가 마음을 다잡았음을 알았을까.

그가 옳은 선택을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구슬에 손을 대고 집중을 해라. 네 주변이 보일 것이다. 자주 쥐고 있어라."

천천히 구슬을 양 손에 쥐고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가슴 속에서 간질거리는 느낌이 올라왔다.

'아...'

끝 없는 암흑이 보였다.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짙은 암흑이었다.

그 한 가운데, 거대한 신전이 있었다.

아니, 폐허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서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하늘에서 땅을 바라보면 이런 느낌일까. 신들은 평소에도 이렇게 지상을 살펴볼까.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신은 어디 있지?'

그가 보이지 않았다.

이 거대한 신전엔 구슬을 붙잡고 있는 나체의 인간만 서 있었다.

분명 눈을 감기 전에도 그가 앞에 서있었다.

천천히 눈을 떴다.

다시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며 시야가 암전했다.

'...?'

구슬로만 안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내 눈앞에서도 사라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황량한 기둥만이 보였다.

이 넓은 공간에 나 혼자였다.

문득 두려움이 치고 올라왔다.

무언가 말을 해야 이 무서움이 사라질 것 같았다.

"뭐야."

"뭐 어떡하라는 거야."

갑자기 시간이 없다고 했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 잠깐을 못 참고 사라진 건가?

"놓고 간 거야?"

"야!!!"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분명 아무 생각 없이 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과연, 저 멀리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몰려왔던 공포심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다급히 그 빛을 향해 뛰어갔다.

굳은 살 하나 없는 맨 발이 돌바닥에 긁혀 비명을 질렀지만, 지금은 아픔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 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희미했던 빛 무리가 서서히 밝아졌다.

멀 때는 몰랐는데, 생각보다 크기가 컸다.

"이건..."

밝은 빛 무리가 타원 모양으로 돌고 있었다.

발광하는 빛을 따라 타원의 안쪽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문처럼 보였다.

들어가라는 건가?

"말이나 하고 사라지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들어가는 건지, 만지는 건지, 기다려야 하는 건지.

하지만,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었다.

아무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암흑의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포탈처럼 생긴 빛으로 향해 걸었다.

마침내 포탈 안으로 몸을 넣자, 온 몸의 감각이 어지러워진다.

손 끝으로 느껴지는 것이 액체인지. 기체인지, 뜨거운지 차가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 와 동시에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한 어지러움이 치고 올라왔다.

그러다가 곧, 시야가 암전했다.

­­­­­

대가리가 깨질 것 같다.

말 그대로 대가리에 난쟁이들이 달라붙어 망치질을 하는 느낌이다.

그 때,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가 깨우러 오는 건지 슬슬 일어나야 하는데 난쟁이들은 떨어질 생각이 없다.

"끄응..."

달칵, 하는 소리와 누군가 방에 들어오더니 방문 앞에 서있는 게 느껴진다.

자식 놈이 늦잠을 자니 깨우러 오신 듯했다.

어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면 안됐다.

'출근해야 하는데...'

엄마가 오는 소리에 깨도, 일어나라고 말하는 직전의 직전까지 1초라도 더 자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닌가.

눈을 떠서 확인해야 하는데 이 놈의 난쟁이 새끼들 때문에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게 전부였다.

그때, 방에 들어온 사람이 서서히 다가왔다.

스륵, 스륵

'...?'

평소에 들을 수 없는 부드러운 천의 마찰 소리.

무엇보다, 생전 처음 듣는 걸음걸이다.

부산한 아침을 맞이하는 엄마의 발걸음이 아니다.

'모르겠다... 엄마 맞겠지. 꿀물이나 타다 주셨으면 좋겠는데...'

'...왜 말로 안 깨우고 걸어 오지?'

아, 그제야 어제 집에 들어와 옷도 안 벗고 잠든 사실이 기억났다.

술 처먹고 들어와 정신 못 차리는 꼴에 화가 나신 걸까.

'등짝 한대 맞겠네'

생각하는 사이에 발소리는 침대 옆까지 도착했다.

채찍같이 떨어질 어머니의 손길을 대비해 등짝에 힘을 빡 준 찰나

"도련니.."

"으어아악!"

"꺅!"

생전 처음 듣는 여자의 목소리에 기겁을 하며 일어났다.

대가리에 달라붙은 난쟁이들을 털어내고 발작하듯 눈을 떴다.

벌떡 몸을 뒤집어 침대 끝에 앉았는데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서있다.

우리는 서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누구지?, 뭐야?, 왜 우리 집에 다른 여자가...'

우리 집이 아니었다.

저 여자의 이상한 옷차림은 뒤로 하더라도, 이 중세 유럽 풍 느낌의 방은 생전 처음 보는 곳이었다.

맞은편 창문 너머로 저 멀리 높은 산과 그 위에 걸친 해가 보였고, 그 옆 벽에는 네 자루의 검이 가로로 걸려있었다.

다시 시선을 돌려서 나를 부른 여자를 쳐다봤다.

'누구지?'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