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
254화 모든 것이 그저 미안할 뿐
제주도에 있는 백범 부친의 농장.
백범의 부친은 자신이 꿈꿨던 그대로 제주도에서 한라봉 농장을 지으며 또 판교에 있을 때처럼 수많은 목축장과 실내 온실 하우스를 지어 놓으며 미국에서 외롭게 생활하고 있는 은혜와 엘리자베스를 위해 먹을 것을 국제 배송으로 준비해 주고 있었다.
“좋은 것만 엄선해요.”
백범의 부친은 농장 관리인들에게 신신당부하듯 말했다.
“예, 물론입니다. 농장에서 나오는 것 중에 최고로 좋은 것만 담았습니다.”
“그래야죠. 못난 내 아들놈 때문에 내 며느리랑 내 손녀랑 미국에서 외로워졌으니 먹는 것이라도 잘 챙겨줘야 합니다.”
“못난 아들이라고 하셨습니까?”
농장 관리인들도 이제는 백범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못난 놈이면서 괘씸한 놈이죠. 전화 한 번을 안 하네.”
백범의 부친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품에 넣어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전화 한 번을 안 해, 쯧쯧!’
백범의 부친은 그저 백범이 서운했다.
“뉴스만 봐도 백범 회장님께서는 엄청난 일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못난 아들이라니요.”
농장 관리인이 백범 부친에게 말했다.
“뉴스에 나온다고 잘난 놈입니까? 가족도 못 챙기는 놈이면 그게 못난 놈이지.”
“그래도…….”
“자기 마누라랑 자기 자식 외롭게 하는 놈은 괘씸한 놈입니다. 하여튼 잘 챙기세요.”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때 농장 입구에서 나눔 종묘 대표이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잘 지내셨습니까?”
백범 부친에게 다가와 먼저 인사를 하는 나눔 종묘 대표이사였다.
“예, 잘 지내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알려드릴 사항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요?”
“예, 그렇습니다. 몇 주 전에 개발된 슈퍼콘을 북한에 무상으로 보급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군요.”
백범의 부친은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나눔 종묘 대표이사에게 말했다.
“연구원님과 같이 개발한 슈퍼 옥수수 품종인 슈퍼콘이 북한에 보급된다면 북한 주민들의 기아 극복에 보탬이 될 것 같습니다. 이게 다 백범 회장님께서 인도적이고 민족적으로 대승적인 결정을 내리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부모의 앞에서 그 부모의 자식을 칭찬하면 그 부모는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백범의 부친은 그저 담담했다.
“또 뉴스에 나오겠군요.”
“예, 그렇습니다. 진정한 남북협력을 위해 씨앗을 뿌린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참 바쁜 놈입니다.”
“예?”
“예전에는 놀고먹고 망나니처럼 사는 것이 참 싫었는데 이제는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고 사는데 왜 이렇게 섭섭하고 서운한지 모르겠습니다. 전화 한 통을 할 시간이 없나…….”
“아…….”
이제야 백범의 부친이 이런 반응을 보였는지 이해가 되는 나눔 종묘 대표이사였다.
“연구원님, 품 안의 자식이랍니다.”
나눔 종묘 대표이사도 지긋한 나이이기에 백범 부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게요. 그렇죠. 그런 거죠.”
“제 자식 놈은 돈 필요할 때만 전화를 합니다.”
“그래요?”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돈을 보내면 또 전화도 없습니다. 허허허! 정말 괘씸한 놈입니다.”
“그러게요. 자식들은 다 그렇게 괘씸한 것들인 모양입니다.”
“다 그런 거죠.”
“그러고 보니 시간이 벌써 저녁때군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백범 부친이 나눔 종자 대표이사에게 물었다.
“식사 전입니다.”
“그럼 우리 술이나 한잔할까요?”
“술이요?”
“예, 괘씸한 아들을 둔 늙은이끼리 한잔합시다.”
그때 바다 쪽에서 낚싯대를 든 김 상사 할아버지가 꽤 큰 참돔을 잡아들고 걸어왔다.
“아우님, 아우님!”
대물을 낚은 김 상사 할아버지는 세상을 다 얻은 사람처럼 환하게 웃으며 백범 부친을 불렀다.
“예, 형님, 허허허, 또 이런 큰 대물을 낚으셨군요.”
“나, 낚시 잘해.”
“허허허, 마침 잘됐습니다. 형님이 잡으신 참돔으로 안주를 하면 되겠네요.”
백범 부친의 말에 김 상사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되는데…….”
“예?”
“우리 색시 먹일 건데.”
“아, 하하하, 그렇군요. 예, 암 그래야죠. 예,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아우님이 달라고 하니 이거.”
두 마리 중에 작은 참돔을 백범 부친에게 내미는 김 상사였다.
“이거 먹어.”
그리고 아이처럼 밝게 웃는 김 상사 할아버지였다.
* * *
하버드 대학 인근에 있는 저택.
이곳도 내 집이라면 집인데 낯설다.
내가 점점 더 거대해지고 유명해질수록 내 아내 은혜와 내 딸과의 거리는 멀어지는 것 같다. 그리고 내 아내가 나를 다시 봤을 때 그저 나를 덤덤히 바라봤고 내 딸 엘리자베스는 괴물을 본 듯 놀란 듯 울기만 했다.
‘아……!’
내가 회귀할 때만 해도 이런 삶을 원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내가 회귀를 하고 또 수많은 사건에 휘말리면서 나는 커졌다.
‘그때……!’
이 실장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니, 내가 가진 욕심 그리고 탐욕과 야망이 조금만 작았다면 작은 삶이지만 지금보다는 조금은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은혜 씨…….”
나도 모르게 내 딸 엘리자베스를 재우고 온 내 아내 은혜를 부르며 눈치를 봤다.
“참 아주 바쁘시죠?”
어떤 면에서 나는 은혜를 이 미국 땅에 로스쿨 연수라는 명목으로 혼자 두고 나만의 욕망을 위해 질주한 것이다.
“그게 참…….”
“눈치를 보시는 것을 보니 우리에게 미안하신 거죠?”
내 아내 은혜는 나를 가엽게 보는 눈빛이다.
“미안하고 또 미안해요.”
“예, 그래 보이세요. 처음 저와 결혼했을 때는 제 눈을 똑바로 보시더니 이제는 그렇게 보지 못하시네요. 그리고 뉴스를 통해서 제 남편이 참 거인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게 됐네요.”
“대통령 각하와 국가가 내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이뤄야 할 일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왜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을 당신이 하셔야 하는 거죠?”
내 아내 은혜는 담담히 내게 말했다.
‘정말 화가 많이 났군……!’
어쩌면 자신이 미국 땅에 버려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러니까…… 나는…….”
무슨 말을 해도 은혜는 내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백범 씨.”
은혜가 나를 측은히 보며 내 이름을 불렀다.
“말해요.”
“저는 백범 씨를 이해해요. 세상 누구보다 잘난 사람이고 잘난 제 남편이니 세상에 당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어요. 하지만 보셨죠? 엘리자베스는 이제 당신이 아빠인 줄도 몰라요.”
못 본 지 꽤 오래된 내 딸 엘리자베스다.
“아……!”
“내 남편은 거인이라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거인은 아주 멀리 보고 아주 크게 움직이지만 가까이에 있는 작은 것들을 보지 못할 때가 많죠. 행복은 그런 거라고 생각을 해요. 당신의 행복이 더 큰 사람이 되는 거라면 말리지 않겠어요. 하지만 내가 아는 당신은 작은 행복에 만족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당신 지금, 행복한가요?”
내 아내 은혜가 나를 담담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리고 나는 이 순간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내 안에……!’
내가 그렇게도 거부하고 부정했던 이신의 영혼이 백범의 영혼을 잡아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직 거대해지겠다는 욕망만을 위해 달리는 불타는 전차처럼 질주를 거듭하고 있는 것 같다.
“나, 나는…. 나는…….”
“내가 사랑하는 내 남편이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 가여워요.”
“아……!”
“가여운 내 사람……!”
내 아내 은혜는 내게 그렇게 말해주고 나를 꼭 안아줬다. 내가 점점 더 위험하게 움직이고 또 거대해지는 것을, 그것이 또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말릴 수 없다는 점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녀다.
그래서 내게 이런 말을 해주는 것이다.
“은혜 씨……!”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진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마요. 돌아오는 길이 더 멀어지니까…….”
나를 꼭 안아주고 있는 은혜가 혼잣말하듯 내게 말했다.
“미안해요…….”
“돌아오는 길이 멀어져도 우린 항상 당신이 보이는 곳에 있을 거예요.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세상에서 나를 제일 많이 알아주는 사람은 내 아내 은혜일 것이다.
“당신은 어디에도 쉴 곳이 없으니 내 품에 안겨서 쉬어요.”
이 순간 정말 모처럼 행복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행복감에서 그저 나는 내 가족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그래, 내 쉴 곳은 당신뿐이지.’
처음 이 저택에 들어왔을 때는 끝없는 미안함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내 아내와 내 딸에게는 미안할 뿐이다. 하지만 내 아내의 품에 안겨 있기에 안도감이 들고 평온하다.
‘얼마나 더 앞으로 질주를 해야 할까?’
그리고 그 질주 속에서 나는 작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얼마나 더 일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둘 다를 지키는 것은 욕심일까?’
인간은 욕심의 동물이다.
내가 가진 야망과 내가 가지고 싶은 행복 모두를 잃고 싶지 않은 이 마음은 참으로 서글프다.
“은혜 씨…….”
나는 나를 담담히 바라보고 있는 은혜를 불렀고 그녀는 나를 위해 내가 이 집으로 들어온 후로 처음으로 웃어줬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이렇게 당신을 보고 웃잖아요.”
어색한 미소지만 나를 위해서 웃어주는 은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웃음 속에서 또 그저 미안할 뿐이다.
“지금 내 상황에서 당신에게, 또 엘리자베스에게 다른 약속은 못 해요.”
“이해해요.”
“하지만 곧 당신과 엘리자베스의 곁으로 돌아올 겁니다.”
“믿어요.”
“그래서 그저 미안하고 또 사랑합니다.”
나는 은혜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내 아내 은혜를 침대에 눕혔고 그녀의 상의 단추를 푸는 그 순간 은혜는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녀의 옷을 모두 벗긴 후에 나는 그녀의 품에 꼭 안겼다.
‘보통의 경우는……!’
내가 안아주면서 뜨거운 부부의 정을 나누지만, 오늘만큼은 그녀의 품에 꼭 안기고 싶다. 하여튼 그렇게 우리는 몇 개월 만에 진짜 부부가 되어서 부부관계를 가졌고 모처럼 가진 관계이기에 그 뜨거움은 이 밤을 불태우기 충분했다.
‘그저 미안할 뿐……!’
관계를 가지면서도 내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다.
“아아~ 아아아~”
내 몸이 거칠고 빠르게 움직일 때마다 그녀는 간드러진 신음을 터트렸고 이제야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눈빛을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그 어떤 때보다 행복감을 느낀다.
‘내 사랑하는 내 아내와 내 딸과…….’
그냥 이렇게 평범하게 살고 싶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리고 이 세상은 나를 그저 평범하게 살게 두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내 야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이제는 멈출 수도 없는 상황이다.
‘끝까지 달릴 수밖에 없겠지.’
내 인생은 어쩌면 불타는 전차처럼 오직 질주만이 남은 것이다. 그 질주의 끝에 또 내가 활활 타서 만신창이가 된다고 해도 정말 다행스러운 점은 다 타서 재만 남아도, 내 아내 은혜가 나를 기다려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아아, 아아아~”
내 몸이 더 빠르게 움직였고 이 순간 내가 절정으로 향하고 있을 때 그녀는 환희의 끝을 느끼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떨며 나를 꼭 안아줬다. 그리고 이 순간 포근한 그녀의 품에서 나는 환희를 만끽하고 또 평온함을 느낀다.
“아!”
그렇게 끝내 나는 절정에 도달했고 그녀의 몸으로 쓰러졌고 내 아내 은혜는 그런 나를 품에 꼭 안아주면서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줬다.
“사랑해요…….”
내 아내 은혜가 내게 속삭였다.
“나도, 당신만을 사랑해요.”
“그래서 고마워요.”
정말 행복함이 느껴진다. 그 어떤 사업적 성취감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