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152화 당신이 하시는 일이잖아요(3)
“백범 대표,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백범 대표가 나를 지지해 준다면 우리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을 잊고 내일을 위해 나갈 수 있소.”
“제가 지지 선언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겠습니까? 사실 신문사들이 말도 안 되는 여론조사를 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선거법에 따라서 저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제 겨우 30살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신문의 판매 부수를 늘리기 위한 꼼수에 불과합니다.”
“그렇죠, 하지만 백범 대표의 행보는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선우 재단을 설립했고 관순 재단도 설립했소. 지금까지 그 어떤 재벌이 그렇게 했습니까? 국민들은 백범 대표를 재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당 대표는 나를 재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재벌이지.’
달러 보유액이 대한민국 그룹 중에서 내가 최고이니까. 거기다가 달러 및 현금 동원력도 현재로는 내가 최고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백범 대표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열망이 되고 지지율로 반영이 되는 겁니다. 백범 대표가 예전에 청와대에서 말한 것처럼 모두가 어려운 시기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국민들은 백범 대표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사실 선우 재단과 관순 재단 발표 및 설립 이후 내 인지도가 높아진 것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가 없다.
그 어떤 재벌도 나처럼 하지는 않았으니까.
‘이러다가 내가 대통령이 되겠군…….’
사실 내 꿈은 내 아내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거였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계획이라서 이미 포기를 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내 아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묵묵하게 도와줄 생각이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요. 그래서 국민들이 열광하는 겁니다. 청와대에서 말한 것처럼 IMF 체제는 국민에게 무척이나 힘든 시기가 될 것입니다. 백범 대표는 젊은이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또한,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소이다. 그러니 나를 지지해서 우리 같이 좀 더 올바른 대한민국을 이끌어 갑시다.”
“올바른 대한민국이라…….”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아무 말도 없이 차분한 자세로 주방에 서 있는 내 아내 은혜를 봤다. 그리고 내 아내 은혜의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가 다시 담담해지는 표정을 확인했다.
“여당 대표님, 정말 제가 지지 선언을 해드리는 것을 원하십니까?”
“그렇소.”
“저는 사실…….”
“백범 대표를 김대준 총재가 아낀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백범 대표…….”
여당 대표는 내 말을 끊고 나와 김대준 총재에 관계에 대해서 말한 후 말꼬리를 흐렸다.
“예…….”
“야당은 지금까지 국정 운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IMF라는 국난은 누구에게도 어려운 시기입니다. 국정 운영 경험이 전혀 없는 야당이 정권을 잡는다면 국민에게 더 힘든 시기가 닥칠 수 있습니다.”
“으음…….”
“나를 지지해 주세요. 그리고 여당의 국정 운영 능력을 믿고 도와주세요. 백범 대표께서는 아직 모르시겠지만, 정치와 통치는 다른 겁니다.”
“통치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지요. 정치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을 하나로 만들고 이끄는 통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는 완벽한 리더가 필요합니다.”
여당 대표의 말에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찡그려졌고 부창부수라는 말처럼 아무 말도 없이 여당 대표의 말을 듣고 있는 내 아내 은혜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통치라……!’
통치라는 단어의 사전적 뜻은 나라나 지역을 도맡아 다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통치에 자신이 있으시다는 겁니까?”
“그렇소. 여당이 이번에도 집권해야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국민들의 생각을 하나로 모아서 IMF의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으음…….”
“또한, 나는 백범 대표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백범 대표는 이제 30살이지요. 하지만 곧 연륜이 쌓이고 나이가 들면 40대도 되고 정치에도 입문하고 훗날에는 백범 대표가 나처럼 대선 후보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정말 나에 대해서는 모르는 여당 대표다.
“제가 대통령 후보가 된다고 하셨습니까?”
“그리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 소리입니다.”
“아, 그렇군요.”
나는 여당 대표의 입에서 통치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내 앞으로의 행보를 위해서 만약을 대비하는 마음으로 여당 대표를 지지하겠다고 말하려고 했었다.
‘국민을 통치한다?’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대선 후보를 지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지지해 주세요. 나와 함께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여당 대표님, 저는 사실 여당 대표님이 저를 찾아오셨을 때 대표님을 지지할 생각을 했었습니다.”
내 말에 여당 대표의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그래요? 하하하! 우리 과거는 잊읍시다. 백범 대표와 내가 생각이 달라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국민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을 아끼고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당 대표님, 국민은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또한, 통치를 당하는 존재도 아닙니다.”
“뭐라고요?”
“국민은 받드는 존재입니다. 왜냐고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기에 국민이 곧 국가입니다. 그런 존재를 어떻게 바르게 이끌고 통치할 수 있습니까? 국민은 떠받들어야 할 존재입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게 내가 회귀하기 전에 봤던 변호인이라는 영화의 명대사를 회귀한 후에 대선 후보에게 말할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백범 대표…….”
“백범 대표께서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여당 측근 의원이 내게 말했다.
“오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오해입니다.”
“저는 오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은 마음에서 나오는 겁니다. 말실수는 실수가 아니라 생각을 말로써 표현하는 겁니다. 저는 사실 여당 대표님께서 저를 방문했을 때 나쁜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에라도 여당 대표께서 대통령이 되신다면 내게는 나쁜 일이 생길 것이니 여당 대표님을 지지하여 야합하고 협잡을 할 생각을 했었습니다.”
“백범 대표, 야합과 협잡이라니요.”
여당 대표의 목소리가 커졌다.
“뜻이 서로 다른데 하나로 뭉치는 것은 야합이고 협잡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왜 뜻이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어느 순간 논쟁으로 변해 버린 순간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의사를 여당 대표에게 말하자 내 아내의 표정이 밝아지고 있다.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국민은 통치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그건 내가 말실수를 한 겁니다.”
정말 여당 대표는 내 지지율이 필요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나를 괘씸하게 생각하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 느껴진다.
‘따지고 보면 정치도 못 하는 분이시지…….’
현재의 여당 대표께서는 오랜 기간 법조계에 몸담으셨고 대법원장이셨다. 권위 높은 자리 중의 하나이며 모든 것을 판결하는 자리에 있으셨던 분이시다. 그래서 그는 국민을 다스리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계신 것이다.
왜냐고?
항상 그렇게 판결하고 다스려 왔으니까.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말은 마음을 표현하는 행동이라고…….”
“으음…….”
“그래서 제게 잘못 오신 것 같습니다. 저의 짧은 판단으로는 자민회 총재를 찾아가셨어야 합니다. 물론 저를 먼저 찾아온 이유가 있으실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지금쯤이면 김대준 총재께서는 자민회 총재를 만나고 계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를 지지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겁니까?”
여당 대표가 나를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이제는 여당 대표가 대통령이 된다면 나는 그리고 내 회사는 온갖 정치적 탄압을 받게 될 것이다.
‘털면 털린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다.
“나는 백범 대표를 찾아왔을 때 뜻을 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셨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 누구에게도 지지 선언은 하지 않을 겁니다.”
“뭐라고 했소?”
“그것을 원하고 오신 것이 아닙니까?”
내 말에 여당 대표가 나를 빤히 봤다.
“저는 정치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도 지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이것은 김대준 총재보다 여당 대표님께 이로울 겁니다. 김대준 총재께서는 저를 자신의 사람으로 철석같이 믿고 계실 테니까요.”
“그 말씀 내게 약속해 줄 수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저는 정치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사업을 통해서 IMF 극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알겠소. 내 오늘 백범 대표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저따위가 뭐라고 여당 대표님이 배우실 것이 있겠습니까?”
“아니에요. 처음에는 정말 내가 백범 대표를 괘씸하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백범 대표가 한 말을 곰곰이 들어보니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요. 국민은 통치를 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 내 명심하겠소.”
“그렇게 말씀을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여당 대표에게 머리를 숙였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이군…….’
나를 처음 찾아왔을 때보다는 표정이 밝아진 여당 대표다.
* * *
여의도로 향하는 자동차 안.
여당 대표가 탄 자동차는 JP가 있는 자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백범, 그자가 너무 괘씸합니다.”
여당 대표의 측근인 조 의원은 백범을 떠올리며 또 여당 대표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그렇지요, 참 괘씸한 인간입니다.”
백범에게 배운 것이 많았다고 말했던 여당 대표는 이제는 백범이 괘씸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확실히 백범 대표는 너무 어립니다. 어린 사람이라서 혈기만 앞서고 몽상가적 발상을 하는군요.”
“예, 그렇습니다. 대표님, 그런데 정말 백범 그자가 누구도 지지하지 않을까요?”
“지켜보면 알겠지. 분명한 것은 여전히 박쥐처럼 줄타기하겠다는 것만 확인한 것 같소.”
“예, 그렇습니다. 박쥐같은 자가 대표님께 야합을 말하고 협잡을 말하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하하, 그러게요. 거기다가 내게 충고까지 했어요. 자기를 찾아올 것이 아니라 JP를 찾아가라고 했어요.”
“대표님께서 JP에게 당 대표자를 제안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다음 대권 주자로 지지하겠노라고 약속하시면 됩니다.”
“그건 그렇고, 김대준 총재는 무엇을 내놨을까요?”
“아마도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총리직이지 않겠습니까?”
“2번이나 총리를 한 사람에게 총리직을 제시했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군요. 그럼 우리는 차기 당 대표입니다. 그분도 대통령병에 걸려 있으니 거부하지 못할 겁니다. 평생을 이인자로만 살았으니 일인자가 되고 싶을 테니까.”
여당 대표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하여튼 백범은 너무 어려요. 또 국민이 어떤 존재인지 정말 모릅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국민이 통치를 당하지 않는 적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역시 말은 마음을 표현하는 도구라는 백범의 말이 옳았다.
‘내 그냥 두지 않을 것이야……!’
여당 대표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백범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