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123화 대후그룹 김우준 회장과의 담판
1997년 10월 2일, 판교 본가.
은혜의 임신 소식을 부모님께 알려드리기 위해 본가로 내려왔는데 집안이 온통 유아용품 박스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본가에 오기 전에 병원 특실에 계시는 장모님께는 먼저 기쁜 소식을 알려 드렸고 울보 장모님답게 한참이나 우셨지만 끝내 우리를 보고 웃으셨다.
-잘 살아야 해, 지금처럼 행복하게 남들이 부러워하게 잘 살아야 해.
-엄마는 당연한 소리를 왜 해, 호호호!
-당연한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니?
장모님의 말씀에 은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장모님.
나는 장모님께 또 한 가지 기쁜 소식을 전해드렸다.
-왜?
-손위 처남이 10월 3일 개천절 특사로 출소할 겁니다. 출소 후에 바로 신원 회복과 명예 회복을 위한 재심 청구가 진행될 겁니다.
-정말인가? 백 서방.
-예, 어제 높은 분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장모님께 그 높은 분이 대통령 각하라는 말을 해줄 필요는 없다. 물론 은혜는 내가 청와대에 간다는 말을 들었기에 짐작하고 있는 눈빛이고 내가 청와대에 들어간 목적이 자기 오빠의 특별사면을 부탁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흑흑흑!
장모님은 또 우셨다. 그리고 은혜도 따라 울었다.
-울지 마시고요. 이제 웃을 일만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은혜가 판사가 되는 일에 아무런 걸림돌도 없어졌습니다. 저는 그게 제일 기쁩니다.
-참, 사돈댁에게는 말씀을 드렸나?
-내일 찾아뵙고 말씀을 드릴 생각입니다.
-많이 기다리셨을 건데 먼저 말씀을 드렸어야지.
-예, 지금 본가로 말씀드리러 가겠습니다.
하여튼 그렇게 장모님께 나는 두 가지 기쁜 소식을 전해드리고 이렇게 본가로 내려왔는데 유아용품 박스들이 첩첩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
‘조비의 신빨이 여전한가?’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왔냐?”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을 보이고 계신다.
“저건 다 뭡니까?”
“쓸 데가 많을 것 같아서 미리 사 놨다. 사돈댁도 곧 출산이고…….”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면서도 우리의 입을 통해 듣고 싶으셨는지 아버지는 말꼬리를 흐리셨다.
“참 많이도 준비하신 것 같습니다.”
“허허허, 내가 가진 것이 돈밖에는 없구나. 요즘 그걸 부쩍 많이 알게 됐다.”
“아, 그러시군요. 기뻐하실 일이 있어서 말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은혜가 임신했습니다.”
“아가, 정말 고생이 많았다.”
“딸일 거야, 딸!”
어머니는 조비에게 들었는지 바로 은혜의 손을 잡으며 딸이라고 말씀을 하셨다.
“정말 고맙다.”
어머니는 은혜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다.
“딸이라고요? 태몽이라도 꾸셨어요?”
“그건 아니고 용한…….”
“저는 아들이 좋은데…….”
“왜, 딸이 좋지. 요즘은 아들 낳으면 동메달이고 딸 낳아야 금메달이라면서? 나는 딸이 좋다.”
아버지도 딸을 강조하시고 계신다. 정말 조비에게 무슨 소리를 들으신 모양이다.
“예.”
두 분에게 웃어 보이는 은혜다.
“아버지, 그리고 이거 받으십시오.”
나는 서류 가방에서 아버지에게 빌린 등기부 등본들을 모두 꺼내 내밀었다.
“이건 뭐냐?”
“사채를 다 갚고 받아왔습니다.”
“벌써?”
“예, 제 사업이 앞으로 승승장구를 할 것 같습니다.”
“범아……!”
그때 아버지의 표정이 변하셨다.
“예, 아버지.”
“사업이 승승장구를 한다니 이 아버지도 기쁘구나. 하지만 달릴 때 옆을 잘 보고 뒤도 가끔 돌아봐라. 네가 달릴 때 누군가가 내 발에 밟혀 쓰러지는 사람이 없는지도 확인하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챙겨도 주고.”
“노력은 하겠습니다.”
무한경쟁에서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에 노력하겠다는 말만 드렸다.
“이제는 네가 부끄러운 아들이 안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네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는 일이다.”
“아버지, 저는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 믿으마.”
아버지는 나를 보며 웃으셨다.
“그런데 아버지?”
“왜?”
“아들이면 어떻게 합니까?”
“뭐?”
“아들이면 저 많은 출산용품하고 유아용품은 다 어떻게 합니까?”
“교환이 된대, 그리고 교환이 안 되면 기부하지 뭐. 하하하!”
이런 부분까지 돈이 참 좋다.
“그러네요. 하하하!”
* * *
1997년 10월 3일, 교도소 정문 앞.
오전 9시가 됐고 갑작스러운 개천절 특별사면이 시행되면서 내 손위 처남인 심철수가 교도소 정문에 차분하게 서 있는 은혜를 바라보며 담담히 걸어왔다.
“제부……!”
심철수가 나를 불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 손위 처남 심철수는 나보다 3살이 많다. 그리고 5년 동안 교도소에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
“나보다 은혜가 고생이 많았지. 은혜야, 미안하다.”
“오빠, 정말 고생 많았어요. 흑흑흑!”
여기 오면서 오빠를 보고 울지 않기로 내게 약속한 은혜지만 끝내 눈물을 터트렸다.
“내가 또 내 동생을 울리네.”
“괜찮아요. 기뻐서 우는 눈물이잖아요.”
은혜의 말에 심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제부가 내게 한 말대로 됐군.”
“간절하게 소망하는 것은 이루어지는 대한민국이니까요.”
심철수는 내 말을 듣고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냐는 눈빛을 보였다.
“그런 대한민국이 될 겁니다. 그리고 형님.”
“말씀하시게.”
“앞으로 저 좀 도와주십시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가족밖에는 없잖습니까.”
“내가 무엇을 할 줄 안다고?”
나를 보며 웃는 심철수다.
“공부 많이 하셨잖습니까.”
“내가 그랬나?”
심철수는 일류 대학을 다녔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졸업만 못 했다.
‘거기다가 경영학도였고…….’
조금만 내가 가르친다면 내 보좌관으로 충분히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하나, 혼자 두면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러는 것이다.
의협심도 병이라면 병이니까.
“저 좀 도와주십시오. 하하하!”
“그래야지, 내가 제부를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야지.”
이 순간은 스카우트라면 스카우트다.
“두부부터 드시죠. 다시는 저런 곳에 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두부, 하하하!”
내가 두부를 건넸고 심철수는 두부를 먹고 자신이 5년 동안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교도소를 물끄러미 봤다.
“제부, 제부 돈 많지?”
“예?”
슬슬 불안해진다.
‘의협심……!’
문뜩 그 단어가 떠올라 속으로 생각했다.
“저 교도소에 죄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억울하게 갇혀 있어. 물론 그 사람들 말을 다 들어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억울한 부분이 많은 사람이 꽤 있더군. 그래서 나는 제부를 도우면서 변호사 공부를 좀 해볼까 생각중이야.”
“사법 시험을 준비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고 싶습니다. 제부, 나 좀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한 마디로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고 싶다는 심철수다.
“아……!”
“왜 어렵나?”
“아닙니다. 됩니다. 인권 변호사가 되시고 싶으시다면 제가 적극적으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재심부터 끝내야 합니다.”
“그래야겠지. 내년에 바로 사법 시험에 지원할 생각이네.”
“교도소에서 공부하셨습니까?”
“저기에서 살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없어, 그래서 공부를 다시 했지.”
“아, 그렇군요.”
정말 심철수까지 사법 시험에 합격한다면 내 처가는 법조인 집안이 될 것 같다.
‘인권 변호사라……!’
유명해지는 인권 변호사는 결국 정치로 향하게 된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드는 순간이다.
‘철수네, 철수……!’
또 한 명의 철수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 * *
1997년 10월 4일, 태양종합금융투자 회사 사장실.
놀랍게도 대후그룹 총수인 김우준 회장이 나를 찾아왔다.
‘정말 나랑 거래하려고 왔나?’
사실 대후전자를 내놓으면 3억 달러를 지원해 주겠다고 한 말은 욱해서 한 말에 가까웠다.
“젊은 분이라고 들었지만 정말 젊은 사업가군요.”
나를 보며 담담하게 말하는 김우준 회장이다.
“예, 제가 좀 어립니다.”
“빙빙 돌려서 말할 처치가 아니라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백범 대표가 그룹 재무 담당 이사에게 대후전자를 대가로 3억 달러를 내놓기로 한 말씀 아직도 유효합니까?”
욱해서 한 말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렇습니다. 그때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부채는 인수할 수 없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 들었습니다. 그제 임시주주총회에서 결론을 얻어 가지고 왔습니다. 대후 그룹을 살리는 빅딜이라면 빅딜입니다. 대후가 백범 대표에게 3억 달러를 받고 대후전자를 넘기겠소.”
상상만 했던 일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대후 그룹이 가진 대후전자의 지분 비율은 얼마입니까?”
“총 22%입니다.”
78%는 외부인이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유상 증자를 통해서 지분 비율을 높여야겠군.’
이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물론 개인 투자자들이 억울한 부분이 꽤 있지만, 곧 외국 자본에 완전히 개방되는 IMF가 닥친다. 그러니 경영권 방어를 위해서라도 해야 할 일이다.
“예, 알겠습니다. 3억 달러로 대후전자의 22%의 지분과 경영권을 인수하겠습니다. 그런데 회장님.”
나는 누구보다 대한민국 재벌의 검은 속을 잘 알고 있다.
“예, 말씀하시오. 백범 대표.”
“회장님이 가지신 지분은 얼마입니까?”
내 말에 김우준 회장이 처음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왜 그러시오?”
“경영권을 내놓으셨으니 지분까지 제게 양도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으음……!”
이 부분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백범 대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대충 파악한 것으로는 12%로 알고 있습니다. 그 지분까지 제게 넘기셔야 제가 온전히 대후전자를 태양전자로 탈바꿈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실 내가 3억 달러를 내놓는다고 해도 1년에서 2년 후에 김우준 회장이 자신이 가진 지분 12%와 자신에게 우호적인 지분을 동원해 경영권을 다시 찾으려고 든다면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나는 호구가 아닙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김우준 대표를 뚫어지게 봤다.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어린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좀 그렇지만 제가 바쁘게 사는 사람입니다.”
“으음, 그렇다면 내가 가진 지분을 얼마에 인수를 하시겠소?”
이것이 장사꾼의 생각인 것이다. 손해를 봐야 할 때도 최소한으로 손해를 보겠다는. 그런 마음 말이다.
“3억 달러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무 가혹하오.”
“이번 빅딜이 취소가 되면 회장님은 대후 전체를 잃게 되십니다. 그리고 대후 그룹은 외환 위기를 만든 공적으로 대한민국 경제역사에 기록이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김우준 회장님께서는 이 금수강산에서도 사시지 못하고 외국으로 떠돌게 되실 겁니다.”
“으음……!”
“베트남이 좋겠습니다. 거기가 따뜻하니까요. 결정만 남으셨습니다.”
“으음……!”
이런 고민까지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다 잃으시겠습니까? 대후전자만 잃으시겠습니까?”
“휴우……. 좋습니다. 내가 내 지분까지 무상으로 양도하겠습니다. 그 대신에 대후 그룹을 더 많이 자금적으로 지원해 주시오.”
마지막 순간에도 무엇 하나는 얻어가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좋은 사업이 있다면 투자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좋소이다. 그렇게 합시다.”
이렇게 해서 나는 대후전자의 경영권을 확보했고 33%의 대후전자 지분도 확보하게 됐다. 그리고 부채는 모두 대후중공업으로 이전이 된 것까지 확인하고 최종 빅딜을 성사시켰다.
‘진짜 빅딜은 이제부터다.’
대후전자가 태양전자로 거듭났으니 이제는 진성전자와 정부가 추진하는 빅딜을 통해서 대한민국 최고의 전자회사로 거듭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