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117화 은혜가 내게 말했다.
호텔 기자 회견장.
연회장으로 쓰이는 곳을 대여했고 기자회견장으로 꾸며놨다. 그리고 꽤 많은 기자가 이곳에 모여 있는 상태다.
그리고 기자들이 모인 모습을 보고 한호성 차장이 인상을 찡그렸다.
“백범 대표님…….”
“오늘만 생각하지 말고 오늘 이후를 생각하세요. 이미 벌써 3시가 넘었습니다.”
내 뒤에는 아무 말도 없는 명동 김 사장의 부하들이 서 있다.
“저랑 같이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김 사장 얼굴 보시겠습니까?”
내 말에 한호성 차장이 인상을 찡그렸다.
“기자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한호성이 마지못해 대답했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천천히 단상 위로 올라섰다. 그와 동시에 내 옆에 있던 전두성 부장이 손을 들었다.
그 순간 연회장 위 천정에서 현수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새한국당 한상호 4선 국회의원의 심철수 강간 사건 조작에 대한 양심선언]
‘제대로 준비하셨네.’
그리고 이 양심선언이 대선에 큰 영향을 미칠 거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결국, 김대준 총재를 돕는 일이 되겠군……!’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저, 저게 뭐야?”
“한상호 의원이면 새한국당 대선 후보의 측근이잖아.”
“그렇지.”
“대선 직전인데 측근 비리가 터진 거야?”
기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사건을 크게 키우는 것이 기자들의 능력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강제적으로……!’
내 정치 노선이 결정되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오늘 일만 생각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단상 위에 올라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한호성을 보며 서류 가방에서 신체 포기 각서를 꺼내 한호성이 볼 수 있도록 흔들었다.
“안, 안녕하십니까? 저는 아……. 한상호 의원의 아들인 한호성이라고 합니다. 오늘 저는 국회의원 한상호의 아들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말은 정말 잘하는 한호성이다.
“저는 제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제 아버지께서 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간 사건을 조작한 것에 대해 양심선언을 하고자 합니다…….”
이제는 눈물까지 흘리는 한호성이다.
“전 부장님.”
“예, 대표님.”
“봉고차 밖에 대기하고 있죠?”
“예, 그렇습니다. 여수수산에 이미 연락해 놨습니다. 1년에 1억 연봉으로 20년 장기 계약을 체결할 예정입니다.”
내가 대신 갚아준 사채가 20억이다. 그러니 당연히 20년 동안 한호성은 새우만 잡아야 한다.
“용서는 없습니다.”
내 말에 전두성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모든 기자 회견이 끝났다.
“제가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전두성 부장은 내가 이 자리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오늘 저녁이면 세상이 떠들썩해질 겁니다.”
“그렇겠네요.”
“대표님, 바쁘시지 않습니까.”
“가야겠네요.”
“예,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전두성 부장이 내게 말했고 나는 돌아서서 기자 회견장을 빠져나왔다.
* * *
호텔 밖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호텔 밖으로 나오는 한호성과 그를 향해 몰려드는 기자들을 보았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30명의 경호원이 일제히 줄을 서서 우산을 펼치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런 과정에서 기자들과 한호성이 분리됐고 미리 대기해 있는 봉고차에 타는 모습까지 내 눈에 보였다.
“김 비서님.”
“예, 대표님.”
“갑시다.”
“예, 출발하겠습니다. 자택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차가 출발했고 한호성이 탄 봉고차도 출발하는 모습이 내 눈에 보였다.
‘용서는 없다.’
지그시 입술이 깨물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백영기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영기 변호사입니다.
“백범입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내 목소리가 착 가라앉은 것을 느꼈는지 백영기 변호사가 내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처리해야 할 일을 끝내 처리했네요. 그리고 이제 마무리만 남은 것 같습니다.”
-예?
“제 손위 처남의 사건 재심 청구를 내일 신청해 주십시오.”
-…….
내 요구에 잠시 말이 없는 백영기 변호사다.
“왜 말씀이 없으시죠?”
-백범 대표님, 제가 드리는 말씀 오해 없이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대선 직전이죠.”
-예, 그렇습니다.
“곧 여의도가 뒤집힐 겁니다. 한호성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양심선언을 했습니다.”
-예?
내 말에 백영기 변호사가 놀라 되물었다.
“결국, 강제 줄서기가 됐습니다.”
-아……!
“재심 청구 내일 바로 가능하죠?”
-재심 청구까지는 당장 가능합니다. 문제는…….
“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겁니까?”
-재심 청구 기간이 오래 걸린다는 사실입니다. 은혜가 판사로 임용되기 위해서는 재심 청구 재판이 1년 이내에 끝이 나야 합니다. 시간상으로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사실 이 문제 때문에 대법관에게 그렇게 공을 들였다.
“대법관님들이 서둘러 주실 겁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가장 빠른 방법이 생각이 났습니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십니까?
“곧 10월 3일 아닙니까? 개천절 특사로 손위 처남이 나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또 백영기 변호사는 말이 없다.
‘황당하겠지……!’
지금까지 3.1절 특사나 광복절 특사는 있었어도 개천절 특사는 거의 없었다.
-백범 대표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합니다.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가능해질 수도 있게 생겼습니다. 하여튼 재심 청구부터 신청하십시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뚝!
나는 대답까지 듣고 전화를 끊었다.
‘대통령이랑 거래해야 하나……!’
절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들이 자꾸 일어나고 있다.
‘막아? 어떻게 막아?’
그저 답답한 노릇이다.
‘나우루공화국의 70억 달러를 차관으로 들여오면!’
급한 불은 끌 수 있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그다음에는?’
그저 답답한 노릇이다.
* * *
여당 대표의 집무실.
“이게 뭡니까?”
여당 대선 의원이 버럭 소리를 질렀고 이 자리에 소집된 여당 의원들과 당사자인 한상호 의원은 대역죄인이라도 된 듯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한 의원!”
여당 대선 후보가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한상호 의원을 불렀다.
“……예.”
“아직 체포 안 됐습니까?”
“죄송합니다. 공소시효가 지나서…….”
“공소시효까지 지난 일을 왜 당신 아들이 대선 직전에 양심선언을 한 겁니까? 지금 나 물 먹이려고 이러는 겁니까? 여당에서 당신을 회유한 겁니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는 여당 대선 후보였다.
“죄송합니다. 그 미친놈이 왜 갑자기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휴우……. 당신 아들 어디에 있습니까?”
애써 목소리를 낮추는 여당 대표였다.
“전화기가 꺼져 있습니다.”
“혹시라도 정치 공작에 휘말려서 야당에 협박을 당한 것은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대표님, 이 사진 좀 보십시오.”
이미 기자들이 찍은 사진 몇 장이 여당 의원의 손에 입수가 됐고 그 사진 속에는 전두성 부장이 찍혀 있었다.
“뭡니까?”
“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누군데요?”
“백범 대표의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입니다.”
“뭐, 뭐라고요?”
“백범 대표는 여당 김대준 총재 쪽 사람입니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이건 제 생각인데 이번 대선에 정치 공작을 담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되는 억측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아……!”
눈에 분노가 이글거리는 여당 대표였다.
“그렇군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당 대표가 이 자리에 모인 측근 의원들에게 물었다. 그리고 여전히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한상호 의원을 봤다.
“한상호 의원.”
“예, 대, 대표님…….”
“나가세요. 이미 야당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 여기 있을 필요 있겠습니까?”
“오, 오해 십니다. 정말 오해이십니다.”
“됐습니다. 당 윤리위원회가 소집될 겁니다. 도덕적으로 아니 범죄자를 우리 당 의원으로 그냥 둘 수는 없습니다.”
“대, 대표님…….”
“나가세요.”
차갑게 말하는 여당 대표였고 어쩔 수 없이 한상호 의원은 대표실에서 나와야 했다.
“대표님.”
그때 측근 의원이 여당 대표를 나직이 불렀다.
“말하세요.”
“한상호 의원에 대한 의원직 박탈을 위한 탄핵을 바로 추진하셔야 합니다.”
“탄핵이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기자들이 대표님의 측근이라고 보도를 할 겁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측근 의원의 말에 여당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바로 추진합시다.”
“야당도 이 부분은 바로 동의할 겁니다.”
“그렇겠지요. 그나저나 이 태풍을 어떻게 넘겨야 합니까?”
“방법을 강구해 보겠습니다.”
정말 제대로 궁지에 몰린 여당 대표였다.
“대표님…….”
그때 아무 말도 없던 다른 의원이 여당 대표를 불렀다.
“방법 있습니까?”
“제가 원장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원장?”
바로 인상이 굳어지는 여당 대표였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으음…….”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예, 죄송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원장이라는 직책을 거론한 국회의원은 여당 대표가 승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풍이 안 불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절대 해서는 안 될 최고의 악수를 떠올리고 있는 여당 국회의원이었고 이것만 봐도 반드시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는 거였다.
* * *
백범의 아파트 거실.
모든 일을 끝내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 앞에는 은혜가 차분하게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백범 씨……!”
내 아내 은혜가 나를 불렀다.
‘나쁜 일은 아닌가 보군.’
은혜의 눈동자 속에는 행복함이 가득 차 있어 보인다.
‘나도 기대를 하고 있다…….’
사실 나는 이 순간 은혜에게 듣고 싶은 소리가 있다.
“예, 말하세요. 저 궁금해서 아무 일도 못 했습니다.”
이건 사실이다. 은혜에게 말을 듣고 싶어서 대통령의 호출도 거부하고 정말 해야 할 일만 처리하고 집으로 왔으니까.
“백범 씨, 놀라지 마세요.”
은혜가 내게 말했다.
“자꾸 그렇게 말하니까 긴장이 되네요.”
나도 모르게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순간이다.
“백범 씨가 이제…….”
왜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모르겠다.
“예…….”
“이제 곧 아빠가 된다고 하네요.”
내 아내 은혜가 내게 말했다.
쿵!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다.
“아, 아빠……!”
“놀라셨어요?”
내가 말을 더듬자 은혜가 내게 말했다.
“아, 아빠, 내가 아빠가, 아빠가 된다는 거죠?”
사실 전생에 살 때도 해보지 못한 아빠다.
“그래요. 저는 엄마가 되고요.”
“은혜 씨, 정말 고생했어요.”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이다.
“고생은 우리 백범 씨가 했죠.”
아빠가 된단다.
내가 아빠가 된단다.
내가 아빠가 된다면 내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어야겠다.
‘운명인가……!’
지금 이 순간 나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