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113화 망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3)
“장기 대여라……?”
한성해운 조 회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실 그는 대안이 없기에 자존심을 꺾고 내게 온 것이다. 그러니 내가 그의 마지막 희망이다.
“제 생각이 어떠십니까? 경영권을 유지하면서 그룹 부도도 막으시고 자금 압박을 돌파하실 수 있는 묘책입니다.”
물론 지금은 내 제안이 한성해운을 위한 묘책이 되겠지만 훗날에는 달라질 것이다.
“그 방법도 있기는 하군요.”
“예, 그렇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제안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너무 헐값입니다.”
“부도 처리가 되면 제가 제시한 가격보다 더 헐값에 돈 되는 선박들은 다 파셔야 할 겁니다. 이미 제게 오기 전에 해외 해운사들에 대형 선박 매각을 제안하셨다가 거절을 당하신 것으로 압니다. 그들은 대한민국 전체가 휘청거리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국가 부도 직전까지 몰려야 더 헐값에 모든 것을 매입할 수 있을 테니까요.”
마치 담합을 한 것 같다. 대한민국 그룹들은 자구책을 내놓으며 돈이 되는 것들을 팔기 위해 매물로 내놓고 있는 실정이다. 그만큼 달러 수급이 어렵다는 의미고 이미 만기가 돌아온 단기 외채들은 대부분 만기 연장을 거부한 상태다.
‘그들은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컨트롤타워가 존재한다는 의미고 IMF 외환 위기는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에 속해 있는 기업들이 잘못한 부분도 많지만, 그 잘못된 부분을 이용하려는 존재가 분명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고 유대 자본이고……!.’
그 이상의 존재일 것으로 판단이 된다. 이런 면에서 미국은 절대 대한민국의 친구가 아니다. 사실 그렇다는 것은 일본이 미국에 의해 경제가 붕괴하였을 때부터 짐작하고 대비했어야 한다. 군사적인 한미동맹이 경제까지 연결될 거라는 안일한 생각이 이런 사태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군사동맹도 미국에 이익이 되기 때문에 유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이익이 되지 않으면 개입하지 않는다.’
냉전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난 상태니까.
“아……!”
나는 틀린 말한 적 없다. 내가 한 말이 냉혹한 현실이니까.
그리고 사실 지금은 세계 해운 운임이 최정점을 찍고 있다. 지금까지 한성해운은 좋은 날만 있었다. 그래서 무리하게 대형선박을 수주했고 이렇게 갑자기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외환 위기에 허덕거리고 있다.
‘아직 10년은 세계 해운 운임이 정점이지.’
그리고 나머지 10년은 세계 해운 운임이 바닥을 찍게 된다. 이 사실은 나만 알고 있다.
“결정해 주십시오. 저는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곧 일어나야 합니다.”
조 회장을 압박하기 위해 시계를 봤다. 사실 조 회장은 지금까지 살면서 오늘처럼 굴욕을 당한 적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다.
“백범 대표, 좋소이다.”
결단을 바로 내리는 한성해운 조 회장이고 나는 바로 미리 태평양법무법인이 작성한 선박 양도 각서를 조 회장에게 내밀었다.
“으음……. 참 많이 준비한 것 같소.”
자신이 내가 제시한 조건을 모두 수락할 줄 알고 서류들을 완벽하게 준비했다는 것에 다시 한번 참담함을 느끼는 조 회장이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다 내 잘못이지. 너무 무리하게 확장을 했어요……!”
한성해운 조 회장은 선박 양도 각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3억 달러를 입금받았고 내가 헐값에 산 대형선박들은 현 시세로만 되팔아도 6억 달러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이만큼 대한민국 그룹들은 달러가 급했다.
‘저래서 반값으로 사들인 겁니다.’
조 회장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당연히 선박을 해외에 매각할 방법을 고려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그가 그렇게 움직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결론은 모두가 거절했거나 1/3정도의 값을 제시했다.
그래서 나를 찾아온 것이다.
‘달러를 쥐고 있는 놈이 왕이네.’
내가 그런 존재로 변해 버렸다.
‘이제 대후 증권으로 가야겠지.’
오늘이 바로 풋옵션을 행사할 옵션 만기일이고 한호성이 경제적으로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그날이니까.
* * *
대후 그룹 본사 김우준 회장의 집무실.
김우준 회장의 집무실에서는 긴급회의가 진행되고 있었고 이 회의는 어떤 측면에서는 대후 그룹의 사활이 달린 회의였다.
“모든 제안을 거절했단 말이지?”
김우준 회장은 백범이 달러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산업수출은행 은행장에게 듣고 바로 그룹 재무담당 이사를 백범에게 보냈었다. 그리고 자신의 그룹이 재계 서열 4위라는 것을 과시하듯 어음을 제시했었다. 그런데 바로 거절을 당했고 종이 쪼가리라는 모욕까지 당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예, 그렇습니다. 정말 거만했고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야 했습니다. 재계 서열 4위인 대후 그룹이 발행한 어음을 종이 쪼가리라고 말한 놈입니다.”
그룹 재무담당 이사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요?”
김우준 회장이 재무담당 이사에게 물었다.
“달러를 받고 싶으면 그만큼의 대가를 지급하라고 합니다. 현금으로는 말도 안 되게 2,640원을 요구했습니다.”
“지금 환율의 두 배군.”
“예, 그렇습니다.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이 암달러 장사꾼으로 돌변했습니다.”
“그만큼 달러 수급이 어렵다는 거겠지요.”
“그렇기도 합니다. 사실 풍양화학에서 2,500원에 1,000만 달러를 교환해 간 것으로 압니다.”
“그렇군요……!”
“사내 유보금이 얼마나 있습니까?”
“120억 정도입니다.”
“으음…….”
“회장님……!”
그때 그룹 재무이사가 김우준 회장의 눈치를 보며 그를 불렀다.
“왜요?”
“이런 말씀을 드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백범 그자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왔습니다.”
“뭡니까?”
“대후전자를 매각하는 조건으로 3억 달러를 지급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대후전자?”
김우준 회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또 뭐요?”
“두 회사의 부채는 인수할 수 없는 조건이라고 합니다.”
“미쳤군요.”
“예, 그렇습니다. 미친 제안입니다. 하지만 3억 달러면…….”
“달러 수급이 모두 해결이 될 금액이군.”
이러니 김우준 회장은 어쩔 수 없이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룹 전체가 부도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만기가 돌아오는 어음을 막지 못하면 치명적인 결과가 발생할 것 같습니다.
김우준 회장은 그룹 전략 기획실 실장의 보고가 떠올랐다.
-만기가 돌아오는 어음이 얼마지? 모두 달러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내가 이해하기 쉽게 달러로 보고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략 기획실 실장은 바로 한화를 달러로 환산을 했었다.
-국내 어음이 1억 달러이고 해외 원자재 수입에 대한 지급이 처리되어야 할 비용이 1억 5천만 달러입니다.
-총 2억 5천만 달러라군.
-예, 그렇습니다. 최대 3억 달러까지 확보하실 수 있다면 이 외환 위기를 극복하실 수 있을 것으로 분석이 됐습니다.
“으음……!”
전략 기획실 실장의 보고를 떠올리던 김우준 회장은 신음을 터트렸고 대후 그룹 중역들은 모두 김우준 회장의 눈치만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말씀까지 드려서 송구합니다.”
재무담당 이사는 자기가 죄를 지은 것처럼 김우준 대표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3억 달러라고 했나?”
눈빛이 변하는 김우준 회장이었다.
“예, 백범 그자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굴욕적이군.”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굴욕을 내일 곱씹으려면 그룹이 유지가 되어야겠지?”
“회, 회장님……!”
“백범 대표의 제안이 빅딜이라면 빅딜이군.”
“회장님, 혹시 그자의 제안을 수용하시려는 겁니까?”
중역 한 명이 김우준 회장에게 물었다.
“우선은 그룹부터 살립시다. 그룹을 살린 후에 내일을 생각합시다.”
결단을 내린 김우준 대표였다.
“회장님…….”
“아……. 내가 어떻게 키운 대후전자인데……. 아……!”
김우준 회장은 한탄을 터트렸다.
“그래도 대후전자를 매각하고 대후 그룹을 살릴 수 있다면 나는 오늘의 굴욕을 선택할 것이오. 긴급 임시주주총회를 설립하시오.”
주식회사이기에 주주총회에서 결정이 되어야 할 부분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속해 있는 그룹들은 대부분 총수가 결정한 일을 따르는 것이 보통이기에 이미 대후전자는 백범의 손에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서두릅시다. 3일 이내에 결론을 내야 합니다. 이번 위기만 극복하게 된다면 대후는 새롭게 태어날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우린 항상 시련을 딛고 일어섰고 그때마다 또 한 번 성장했습니다. 오늘의 시련이 극복된다면 우린 다시 세계 경영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대후의 몰락은 사실 너무 이른 세계화 경영의 탓도 분명 존재했는데 대후 그룹 김우준 회장은 여전히 세계화 경영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대후 증권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
“이명희 끝냅시다.”
나는 전두성 부장과 통화를 하고 있다. 사실 처음 계획은 이명희와 장태복에게 양심선언을 시켜서 한호성 차장을 악인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호성의 부친이 여당 중진의원이기에 힘을 써서 그들을 무고로 몰 확률이 높기에 이명희와 장태복을 양심선언을 시키는 것보다 당사장인 한호성이 직접 양심선언을 하는 쪽이 완벽할 거라는 생각에 이리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준비해 놓은 것이 있다면 조치하십시오.”
언젠가 전두성 부장은 내게 자신은 빛을 지키는 어둠이라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그 말에는 나를 위해서 내가 반짝일 수 있게 어두운 곳에서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예,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우선 이명희에게 자기 남편이 바람을 피운 자료를 제공할까 합니다.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그리고 장태복도 준비하십시오. 그냥 둬서는 안 될 사람들이니까요.”
-물론입니다.
나는 내 아내 은혜가 판사가 된 후에 그녀의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지만 악인을 응징함에서는 망설이지 않을 생각이다.
‘도덕과 정의를 놓고 선택을 하라면.’
나는 도덕보다는 정의를 택할 참이다.
“끊습니다.”
-예, 대표님.
뚝!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따르릉, 따르릉!
그때 다른 주머니에 넣어둔 개인용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 시간에 왜?”
발신 번호 서비스가 아직 실시되지 않고 있기에 나는 은혜와만 통화할 수 있는 휴대전화를 추가로 개통했다.
딸깍!
-오늘 저녁에 바쁜가요?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은혜가 약간은 흥분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바쁘지……!’
바빠질 수밖에 없는 시기니까.
“아무 일 없습니다. 저 한가합니다.”
내 말에 운전을 하던 김 비서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사실 저녁까지 스케줄이 밀린 상태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물론 그 스케줄의 대부분은 달러가 급한 그룹 회장들과 사장들을 만나는 일이다.
-다행이네요. 저녁에 할 말이 있었거든요.
“뭔데요?”
-저녁에 와서 말씀드릴게요.
목소리가 무척이나 밝은 은혜다.
“궁금한데…… 하하하!”
-저녁에 말씀을 드릴게요. 그때까지 비밀이에요. 호호호!
“알겠습니다. 저녁 6시까지 퇴근할게요.”
내 말에 다시 한번 김 비서가 인상을 찡그렸다.
-예, 고마워요. 바쁘실 건데.
“제게 제일 중요한 것은 당신의 일입니다. 고마울 것 없어요.”
-저녁에 봬요. 먼저 끊으세요.
“은혜 씨가 먼저 끊으세요.”
-먼저 끊으세요.
“그럼 같이 동시에 끊읍시다. 하나, 둘, 셋!”
그렇게 우린 동시에 전화를 끊었다.
“대표님……!”
“저녁 일정 모두 취소하십시오.”
“재계 서열 7위 그룹과 10위 그룹 그리고 12위 그룹이…….”
“달러가 급한 것은 그 사람들입니다. 약속은 중요하지만 제게 제일 중요한 약속은 제 아내와의 약속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김 비서가 대답했고 나는 은혜가 내게 할 말이 무엇인지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