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112화 망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2)
“그룹에서 지급 보증한 어음입니다. 3개월짜리 단기 어음입니다.”
정말 어이가 없는 순간이다.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를 가지고 오셔서 제 달러를 가져가시겠다고요?”
“대후 그룹이 발행한 어음입니다. 대한민국 재계 서열 4위 그룹이 발행한 어음이라고요.”
“아직도 정신 못 차리셨네요.”
“뭐라고요?”
“됐습니다. 다른 종금사들도 지금은 어음 안 받지 않습니까?”
“으음…….”
“몇 개월 전만 해도 받았지만 말입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바로 표정이 변하는 재무담당 이사다.
‘저게 나를 호구 핫바지로 봤군.’
한 마디로 어음을 담보로 제공하려고 했던 것은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식이었던 것이다.
“1달러에 한화로 딱 2배로 교환해 드리겠습니다. 2,640원으로 교환해 드리겠습니다.”
똑똑!
그때 노크가 들렸다.
“예.”
공식 미팅에서 이렇게 노크를 한다는 것은 실례다.
“죄송합니다. 급한 결재가 필요해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뭡니까?”
내가 비서에게 물었다.
“풍양화학이 원 달러당 2,500원에 1,000달러 환전을 요청해 왔습니다.”
풍양화학은 사태 파악을 정확한 것 같다. 물론 이 역시 산업수출은행 은행장이 풍양화학 회장에게 내가 달러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제공했기에 내게 문의를 해왔던 것이다.
‘우리 태양의 최고 판매사원은~’
당연히 산업수출은행 은행장이시다.
“풍양화학은 양심이 좀 있군요. 환전해 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비서가 내게 묵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고 대후 그룹 재무담당 이사가 멍해졌다.
“풍양이……?”
“산업수출은행 은행장님께 제공 받은 정보로 저를 찾아오신 것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저한테 그런 종이 쪼가리나 내미시면 안 되죠. 그거 빡빡해서 화장실에서도 못 씁니다.”
거만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거만해져도 된다. 나는 단언컨대 곧 닥칠 IMF 외환 위기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 하지만 나를 찾아오는 수많은 기업들은 각각의 몫만큼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책임들을 모두 회피하며 결국 고통은 국민들에게 부담을 시켰다. 그런 것들이니 좋게 대해 줄 이유가 없다.
“아……!”
“어쩌실 겁니까? 30분 후에 한성해운 회장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한성해운은 회장님이 저를 직접 뵙겠다고 하시네요.”
“정말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제가 대후 그룹에 원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대후 그룹의 알짜는 대후조선과 대후전자가 전부라면 전부인데 둘 중 하나를 완전히 내게 내놓을 마음은 없을 것 같다.
“말씀이라도 해주십시오. 제가 회장님께 바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사정을 하시니 대후전자 저한테 넘기십시오.”
내 말에 대후그룹 재정담당 이사가 입이 쩍 벌어졌다.
“대, 대후전자를…….”
“그런 결심을 하신다면 구해 드리겠습니다. 들으셨겠지만 제게 25억 달러가 있습니다. 지금 3~5억 달러의 달러 예비비만 보유하시면 대후 그룹도 큰 위기는 없을 겁니다. 위기 후에 기회가 오는 법이죠. 저는 이사님께 드릴 말씀을 다 드린 것 같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참, 대후전자를 제가 인수를 해도 부채는 인수하지 않습니다.”
이건 한 마디로 껍질도 벗기지 않고 통째로 대후전자를 삼키겠다는 소리다.
‘대후전자를 대후그룹에서 넘기면?’
대후그룹에서 일어날 모든 재앙은 비켜가게 될 것이다.
‘사실 대후가 억울한 부분이 많지.’
IMF가 한보와 대후 때문에 닥쳤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꽤 많다. 물론 단초를 제공하기는 했지만 모든 책임을 한보와 대후에게 떠넘길 수는 없을 것 같다.
“며칠 안 남았습니다. 잘 판단해 보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대후 그룹 재무담당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맥이 빠졌는지 휘청거렸다.
“조심하세요. 그러시다가 한보 그룹처럼 쓰러지십니다.”
“아……!”
내 말에 다시 안타까운 탄성을 터트리는 대후 그룹 재무담당 이사였다. 그리고 나를 보며 살려달라는 눈빛을 보였다가 겨우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다들 저렇지……!’
내 사무실로 들어올 때는 자기 그룹이 재계 서열 몇 위라고 거들먹거렸다가 현실을 직감하고 절망을 떠올리며 밖으로 나간다.
하여튼 대후 그룹 재무담당 이사가 밖으로 나갔고 김 비서가 들어왔다.
“잘하셨습니다.”
“예, 대표님.”
“한성해운 회장님 오실 때도 똑같이 하시면 됩니다. 다시 한번 연습해 보십시오.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풍양화학이 원 달러당 2,500원에 1,000달러 환전을 요청해 왔습니다.”
“조금 전보다 더 자연스러웠습니다.”
“정말 치밀하십니다.”
“이래야 원 달러당 2,500원에 달러를 교환해 갈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풍양화학이 2,500원에 1,000달러를 교환해 간 것 맞다.
‘참 풍양화학 회장님 운이 좋으시지.’
거기다가 욕심도 참 많으신 분이시다.
-자금 압박 해결하고 어떤 행보를 취할지 고민해 봐야겠소.
-부동산에 투자하실 생각이시죠?
-자금 압박부터 해결하고.
그때 나를 보며 씩 웃으셨다.
하여튼 그랬다.
* * *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뭐라카노!”
평소에도 카랑카랑했던 대통령이 경제부총리의 보고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환에 대해 우호적이었는데 갑자기 일본 정부가 돌변했습니다.”
“왜 갑자기. 이유라도 알아야 할 거 아니가?”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혹시 내 때문에 그러는 기가? 내가 총독부 건물 박살을 냈다고 앙심을 품고 그러는 기가?”
대통령은 다급했기에 별소리를 다하고 있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갑자기…….”
“그러니까, 왜 갑자기?”
“죄송합니다. 말을 안 합니다.”
“아…… 망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각하.”
“우짜노?”
“IMF에게 구제 금융을 요청하시는 것이……?”
경제 부총리는 끝내 IMF를 거론했다.
-IMF는 은행이 아닙니다. 각하.
그리고 이 순간 대통령은 백범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IMF는 은행이 아니다. 을마를 달라고 할지도 모른다. 안 된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각하…….”
“됐다카이.”
“각하……!”
“됐고 비서실장.”
“예, 각하.”
“금마 불러라.”
“금마라시면……?”
“백범이 금마 불러라.”
“예, 알겠습니다. 각하.”
무엇인가 결심한 듯 대통령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우짜노, 우짜노 내가 나라를 조져 묵었다……!’
* * *
대후 증권 한호성 차장의 사무실.
한호성은 지금 째깍째깍 흐르는 시계를 보며 덜덜 떨고 있었다. 오늘이 백범이 투자한 풋옵션의 만기고 만기가 돌아오면 자신은 쫄딱 망한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따르릉, 따르릉!
그때 한호성 차장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왜 전화야?”
한호성 차장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경제수석이었고 경제수석은 이제 청와대에서 그림자로 취급을 받고 있었다.
딸깍!
-야, 우리 망한 거지?
꼴에 경제수석이라고 감을 잡아서 전화를 건 거였다.
“망하기는 누가 망합니까?”
-너 때문에 망했잖아, 이 개새끼야!
“투자를 하다 보면 성공할 때도 있고 망할 때도 있는 거잖습니까. 그리고 정부에서 자꾸 긴급 외한 대책을 발표하고 종금사 달러 지원 대책을 발표하고 환율 방어도 못 하니까 이런 꼴이 난 거잖습니까.”
-야, 이 미친 새끼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미친 새끼? 그래, 망했다. 쫄딱 망했다. 이제 1시간 후면 진짜 쫄딱 망한다. 나만 망해? 나랑 손잡은 새끼들 다 망해. 그 새끼들만 망해? 대한민국도 이제 망해! 시발, 나도 이제는 좆도 모르겠다고-!”
딱 적반하장인 순간이었다.
-야, 너 내가 그냥 안 둬.
“당신도 망했는데 어쩌려고요?”
-나 아직 경제수석이야! 내 말 한마디면 금융감독원부터 국세청까지…….
“됐다고 그래, 내가 망했는데 대후가 망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끊어!”
바로 전화를 끊어 버리는 한호성이었다.
“시발, 내가, 내가 왜 이 꼴이 됐을까……!”
그리고 한호성은 백범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게 다 그 멍청한 새끼 때문이야!”
바드득!
어금니를 갈고 있는 한호성이었지만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하여튼 점점 더 한호성 차장에게 파멸의 시간이 닥쳐오고 있었다.
***
태양종합금융 회사 사장실.
내 앞에는 한성해운 조회장이 앉아 있다.
“해운사에서 선박들을 다 빼앗아 가면 나보고 무엇으로 사업을 하라는 겁니까?”
지긋한 나이지만 절박하기에 내게 통사정을 하고 있는 한성해운 조 회장이다.
‘땅콩이 생각나네.’
두 딸 잘못 낳아서 말년에 카메라 마사지 꽤나 받으실 분이다. 물론 그것은 마누라를 잘못 만나서 일어난 일이겠지만 말이다.
“저는 조건을 제시해 보라고 하셔서 말씀을 드린 겁니다. 그리고 사실 한국항공이 있지 않으십니까.”
“으음…….”
바로 한숨을 내쉬는 한성해운 조 회장이다. 사실 한성해운이라고 말하기보다 한성 그룹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짐작을 하시겠지만 곧 일주일 안에 국가 부도의 위기가 닥칠 겁니다. 그때가 되면 달러를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환율은 계속 올라가겠지만 핵심은 원화로는 달러를 구입하기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이 나라에 달러가 씨가 마를 겁니다.”
똑똑!
연습한 그대로 김 비서가 노크를 했다.
“예!”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예’라고 말했고 그제야 조심히 눈치를 보며 김 비서가 사장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자기랑 이야기를 하는데 딴 사람을 들어오라고 한 것에 대해 한성해운 아니 한성 그룹 회장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죄송합니다. 대표님, 풍양화학이 원 달러당 2,500원에 1,000달러 환전을 요청해 왔습니다.”
몇 번 해봤다가 자연스러워진 김 비서다.
“풍양은 그래도 양심이 좀 있군요. 환전해 드리세요.”
사실 현재의 태양종합금융사 회사는 종금사라기보다 환전 회사에 가깝다. 물론 그래도 상관이 없다. 막지 못할 일이라면 그것을 이용해 돈이라도 벌어야 하니까.
“예, 알겠습니다.”
김 비서가 묵례를 하고 사장실 밖으로 나갔고 한성 그룹 조 회장의 표정은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풍양 유 회장이……?”
“예, 그렇습니다. 거기도 달러 압박을 받고 있는 모양입니다.”
“백범 대표…….”
“예, 회장님.”
“한성 그룹은 해운이 중심입니다. 해운사에서 배를 팔아서 달러를 받아가라니 너무 가혹합니다.”
“회장님, 발상의 전환을 하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발상의 전환이라고 했소?”
“예, 그렇습니다. 대형 선박들을 제게 파시고요. 달러를 받으시고요. 그 배를 제게 다시 20년 장기 임대로 빌리시면 되지 않습니까?”
올가미를 던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미안할 것은 없다. 한성해운은 이미 나 말고는 자신들에게 달러를 빌려주거나 배를 구입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내게로 왔으니까. 모든 면에서 내가 한성해운과 한성 그룹의 마지막 동아줄이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