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89화 투자는 변화무쌍하다.(2)
1997년 5월 1일, 백두 그룹 본사.
백두 그룹은 5월 1일까지 백두 소주와 백두 유통 그리고 주리아 화장품과 서울 북부화물터미널에 대한 1차 우선 협상자를 선정하기 위해 인수의향서를 제출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나와 박태웅 이사가 예상했던 것처럼 롯대팔성과 대성식품이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오늘이 의향서 제출 마지막 날이다.
“백두 소주의 우선 협상자가 되시려면 2500억 이상 적으셔야 합니다.”
박태웅이 내게 속삭였다.
“그렇게나 많이요?”
공개 입찰 방식으로 진행이 된다.
“제가 판단한 기업 가치보다 800억 이상 오버된 상태입니다.”
기업 인수 합병은 정보전이고 첩보전일 것이다. 나와 박태웅 그리고 태평양법무법인의 모든 역량이 동원되고 있다.
“특히 대성식품이 무척이나 적극적입니다.”
“롯대팔성이 아니고요?”
“예, 그렇습니다.”
“소주인데……!”
대한민국 서민들은 누구나 마시는 것이 소주다. 그래서 기업 경영만 탄탄하다면 절대 망할 수 없는 회사가 소주 회사고 또 그 소주 회사에 주정을 공급하는 회사다.
“저와 구대성 대표의 판단으로는 대성식품은 소주 시장의 점유율을 높이고 맥주 시장까지 진출한 후에 세계 포도주 시장에 뛰어들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어떤 근거죠?”
“대성식품이 칠레와 프랑스에 포도주 농장과 포도주 농장을 매입했습니다. 그리고 현지 법인도 설립했습니다.”
대성그룹에 성질 급한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군요.”
“예,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얼마를 생각하십니까?”
“800억이나 더 주고 넘겨받을 수는 없습니다. 우린…….”
나는 박태웅 이사만 들을 수 있게 바짝 달라붙었다.
“2000억입니다. 그 대신에 완전 고용을 승계할 생각입니다.”
“포기하시는 거군요.”
박태웅이 내게 속삭였고 나는 미소를 머금었다.
“포기요? 포기 안 합니다. 돈으로 승부를 봅시다.”
이곳에는 간첩들이 넘쳐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두 그룹에서는 더 써라.’
백두 소주를 넘겨받는데 더 많은 돈을 쓴다면 내게 이로운 일일 것이다.
“딱 맞춰서 오시는군요.”
그때 백두 그룹 로비에서 백영기 변호사가 들어왔고 나를 확인하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금방 왔습니다.”
“봅시다.”
지금부터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 * *
“3000억이요?”
물론 나직이 말하고 있다. 하지만 들을 놈들은 들을 것이다.
“예, 삼파전입니다. 태양종합금융투자가 백두 소주를 꼭 넘겨받으려면 이 금액을 써야 합니다.”
“그렇군요. 그럽시다.”
나는 이미 박태웅에게 2000억이라고 속삭인 상태다.
‘2000억이면!’
원·달러 환율이 현재 803원이다. 800원만 잡고 백두 소주를 매입하는 것에 성공한다고 해도 2억 9천만 달러를 써야 한다.
‘7개월 후면!’
달러 시세 차이 때문에 3배의 가격인 것이다.
* * *
입찰 공모장에 도착했고 예상했던 것처럼 롯대팔성과 대성그룹 관계자들이 미리 도착해 앉아 있고 낄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일부 기업들이 입찰 공모에 참석해 있는 상태다.
“태양종합금융투자입니다. 백두 소주와 주리아 화장품에 대한 인수 의향서를 제출합니다.”
내가 직접 백두 그룹 입찰 공모 담당자에게 인수 의향서를 제출했다.
백두 그룹이 산업수출은행의 강도 높은 압박 때문에 서두르고 있는 탓에 오늘에야 우선 협상자가 결정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하여튼 이제는 기다리면 된다.
‘주리아……!’
백두 소주는 포기해도 주리아 화장품은 손에 넣어야겠다.
모든 경쟁은 짜릿한 긴장을 가져오고 성공했을 때 희열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짜는 포기한 상태다.
* * *
입찰 공모 발표장.
포기할 것은 이미 포기한 상태라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다른 기업들은 초조한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영국 총선에서 누가 승리할 것 같습니까?”
나는 작은 목소리로 백영기 변호사에게 물었다.
“글쎄요, 오늘 총선이 실시됐으니 내일이면 총리가 결정되겠죠.”
영국 총선은 현재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나는 미래의 기억이 있기에 누가 될지 알고 있다.
‘앤서니 찰스 린턴 블레어!’
그가 영국 총리가 될 것이다. 이건 투자자에게 중요한 부분이다.
그는 영국 노동당의 당수이기도 했다. 노동당을 이끌고 1997년 총선에서 승리하며 영국 보수당의 18년간의 집권을 끝낸 인물이다.
‘부시의 꼬봉 노릇을 잘했지.’
하여튼 그는 경제 개혁주의자이니 나 같은 투자자에게는 이로운 인물이다. 그때 입찰 공모 발표장 문이 열렸고 우선 협상자를 기록해 놓았을 서류를 든 중년의 남자가 들어와서 단상 앞에 섰다.
* * *
“백두 소주의 우선 협상자로 3500억을 제시한 대성식품이 선정되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마시는 소주이기에 대성식품은 롯대팔성과의 경쟁적인 측면에서 기업 가치보다 오버된 금액을 적었고 우선 협상자로 선정이 됐다.
“주식 매입했죠?”
나는 박태웅 이사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내 첫 투자가 성공하는 순간이다.
‘하하하, 3500억이란 말이지.’
이 액수는 바로 뉴스에 공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놀랄 것이다.
“예, 백두 그룹 계열사들이 하한가까지 하락했기에 대량 매입에 성공했습니다.”
박태웅 이사도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투입된 금액은?”
“100억입니다. 개인 투자자들이 공포에 질려 투매를 했고 쉽게 확보를 했습니다.”
내가 백두 소주 매입 입찰에 탈락했지만 백두 소주의 대주주로 등극하는 순간이다.
“지분 비율은 5%입니다.”
“내일이면 뉴스를 보고 상한가로 가겠군요.”
기업 가치보다 2배에 달하는 금액으로 대성식품이 적어냈으니까 선 협상자로 선정이 된 것이다. 기업 조사 과정에서 대성그룹이 인수를 포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 투자자들은 오늘 저녁에 뜰 뉴스만 보게 될 것이고 백두 소주가 3500억의 가치가 있다고만 생각할 것이다.
‘호가가 주식을 반영하지.’
대성식품이 3500억의 호가를 불렀으니까.
이제 백두 소주의 기업 가치는 3500억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내일이면 상한가를 칠 것으로 예상한다. 그리고 대성그룹이 최종적으로 백두 소주를 인수하게 된다면 내 투자는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내 첫 번째 투자는 백두 소주 인수에서 시작해 주식 투자로 종결이 되는 것이다.
‘자금력이 튼튼하다는 거겠지.’
나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는 대성식품 관계자들을 봤다. 그리고 그 중간에 젊은 청년을 눈여겨봤다.
“최백호 대성그룹 전략기획실 실장입니다.”
백영기 변호사가 내게 귓속말로 알려줬다.
“젊네요.”
“요즘 재계에 젊은 경영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실 대표님도 젊습니다.”
백영기 변호사의 말에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대성만 어음 거래를 하지 않는다면서요?”
“그렇습니다. 그 대신에 현금 거래의 조건으로 10~20%로 정도의 지금 단가 후려치기를 합니다.”
“그래도 하도급 업체에서는 한없이 고마운 일이죠.”
사실 하도급 업체나 중소기업에서 어음으로 결제 대금을 지급 받으면 정말 찜찜할 수밖에 없다.
받은 것도 아니고 안 받은 것도 아닌 거니까. 받았는데 어음 만기일까지 기다려야 하니 깡이 생기는 법이고 자금이 급한 회사들은 사채 시장에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30% 정도에 할인을 받는 경우가 많다.
‘대성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까지 계산을 넣었겠지.’
하여튼 자금이 충분하다는 판단이 서는 순간이다.
‘다음 투자처는!’
대성그룹이면 투자금을 잃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백기영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눌 때 다른 계열사 매각에 대한 우선 협상자들이 발표가 됐고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한곳에서 계열사 매각을 진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에 백두 그룹이 정말 제대로 압박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주리아 화장품의 우선 협상자로 선정된 인수자를 발표하겠습니다.”
발표자가 잠시 말을 멈추고 우리 쪽을 봤다.
“부채가 250억으로 파악이 됐습니다.”
백영기 변호사가 내게 나직이 귓속말로 말했다.
“그렇군요.”
“대표님 얼마나 기재하셨습니까?”
주리아 화장품에 대한 입찰금액은 나밖에 모른다.
“들으시면 됩니다.”
나는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현재 태평양법무법인이 분석한 줄리아 화장품의 가치는 150억이다. 거기에 부채가 250억으로 확인이 됐다. 사실 주리아 화장품은 화장품업계에서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3년째 적자 기업이다.
‘규모가 작으니 기업 가치도 적고 부채도 크지 않군.’
물론 250억이라는 부채는 기업 가치를 넘어선 상태다.
‘뷰티 강국 코리아!’
내가 그것을 이끌 참이다.
“520억을 기재해 제출한 태양종합금융투자가 주리아 화장품의 우선 협상자로 선정이 됐습니다.”
520억이라는 발표에 우리 측도 이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모두 놀란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대, 대표님…….”
놀란 사람 중에서 제일 놀란 사람은 박태웅 이사다.
“좀 무리했습니다.”
“왜……?”
“생산 공장이 판교에 있더라고요.”
“그게 이유의 전부이십니까?”
“예, 제 본가가 판교에 있지 않습니까.”
박태웅은 이 순간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냐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 하지만 나는 박태웅을 무시하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대성그룹 전략기획실 최백호 실장을 바라보고 있다.
‘너도 입찰했냐?’
눈빛이 딱 그렇다. 하여튼 나는 그리고 태양종합금융투자는 우선 협상자로 선정이 됐다.
“가시죠.”
“대표님…….”
“판교입니다. 판교.”
“저는 정말…….”
“판교는 강남과 가깝습니다. 부동산 투기를 할 목적은 없지만 줄리아 화장품 공장이 강남이랑 가깝습니다.”
“아……!”
탄성을 터트리는 박태웅이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그래도 너무 오버해 금액을 기재했다고 내게 말하고 있었다.
‘공장 부지의 가치가 50억쯤 되려나?’
10배가 올라도 500억밖에는 안 된다. 그런데 화장품 공장의 면적이 꽤 넓다. 이건 다시 말해 재계 서열 25위 그룹이 부동산 투기를 위해 겸사겸사 공장 부지를 구입해 놨다는 의미다. 하여튼 몇 년만 기다리면 판교 개발이 발표가 될 것이고 그때 팔면 본의 아니게 부동산 투기꾼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 같다.
‘뭘 그렇게 노려보냐!’
지금도 대성그룹 금수저인 최백호 실장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졌으면 깨끗하게 승복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