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88화 투자는 변화무쌍하다.(1)
1997년 4월 21일 산업수출은행 은행장실.
백두 그룹 회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산업수출은행이 긴급 면담을 요청했기에 긴급 면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한보 그룹 불법 대출 사건에 4개 은행에 대해 긴급 세무조사가 시행됐고 검찰은 그와 함께 그 은행들에 대해 압수수색을 실시했습니다. 한보 그룹 불법 및 편법 대출 사건에 의해 은행 부실화가 가속되는 것이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큽니다. 다음 뉴스입니다. 김정일의 전처인 성혜림의 조카이자 방송 PD인 이한영 씨의 살해 배후에 북한 공작이라는 증거들이 속속 나오고 있는 상태입니다.]
켜놓은 TV에서는 한보 그룹의 불법 대출 사건이 보도되고 있었고 백두 그룹 회장을 만나고 있는 산업수출은행의 은행장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TV만 보다가 한보 그룹 사태에 대한 뉴스가 끝나자마자 TV를 껐다.
“연일 불법 대출 뉴스만 뜹니다.”
은행장은 의도적으로 백두 그룹 회장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다 그렇죠. 원래 저렇게 떠드는 것 아닙니까.”
은행장은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데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백두 그룹 회장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그렇습니까?”
“예,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행장님을 찾아온 것은 백두가 좀 곤란해졌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도움이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백두 그룹의 최대 채권자는 산업수출은행이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제가 요즘 사면초가입니다.”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내일 만기가 돌아오는 어음을 막지 못하면 그룹 전체가 1차 부도에 직면합니다. 여론이 이런 상태인데 재계 서열 25위인 백두가 부도를 맞는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다.”
“곤란하죠, 정말 곤란합니다. 말씀을 드린 것처럼 제가 사면초가라니까요.”
“1차 부도만 막으면 숨통이 트입니다. 항상 그랬듯 도와주십시오.”
백두 그룹 회장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면서도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은행 감사팀에서 확인해 본 것으로는 백두의 부채 비율이 1,000%에 육박합니다. 이미 많은 대출이 나가 있고 사실 담보 이상의 대출이 시행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긴급 대출을 더 해달라는 말씀입니까?”
“압니다. 하지만 단기적인 자금 부족 현상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번 국면만 돌파하면 매출이 급상승할 것이고 모두 다 해결될 일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은 시국이 안 좋습니다.”
“안 된다는 겁니까?”
이제야 인상을 찡그리는 백두 그룹 회장이었다.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안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산업수출은행을 원망하지 마시고 한보 그룹을 원망하세요. 정말 이러다가는 언론에서 제2의 한보 그룹 사태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으음……!”
“많이 곤란하시지요.”
“예, 곤란할 수밖에 없지요.”
“제가 드린 말씀을 너무 서운해하지 마십시오. 국내 은행은 청와대의 눈치를 보고 또 언론을 신경 쓰고 있기에 긴급 대출이 어려울 겁니다. 각하께서도 비록 얼마 전이지만 어음 거래를 축소하라고 지시하셨고 언론이 저렇게 떠들고 있으니 방법이 없을 겁니다. 두 은행의 은행장이 검찰 수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뉴스에 보신 것처럼 또 두 곳의 은행에서도 핵심 관련자들이 구속됐고 세무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은 살얼음판이 됐습니다.”
“으음……!”
백두 그룹 회장은 산업수출은행을 찾아왔을 때 긴급 대출이 어렵지 않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면담하니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반대로 흐르고 있기에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
“예…….”
“그룹은 살리셔야죠.”
“무슨 말씀입니까?”“ 경제전문가들은 곧 유동성 자금 위기가 닥칠 거라고 합니다. 이미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외환 위기의 조짐이 보이고요. 그 여파가 결국 우리나라에도 미칠 거라고 합니다.”
4월 중순이 되어서 조금씩 위기의식이 대두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위기의식은 소수의 의견에 불과했고 많은 기업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요?”
“만약에 유동성 자금 위기가 닥친다면 그룹 전체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백두 그룹의 최대 채권 은행인 산업수출은행도 위태로워집니다. 그러니 결단을 내리십시오.”
“결단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25개 계열사 중 일부는 매각하십시오.”
“으음……!”
백두 그룹 회장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룹 총수들은 매년 경제신문에서 발표하는 재계 서열 표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재계 서열 30위권 밖에 있던 백두가 올해 발표에서는 25위로 상승한 것에 백두 그룹 회장은 대만족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계열사 몇 곳을 매각한다면 당연히 그룹 규모가 축소되기에 재계 서열은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옛말에 엎어진 김에 짚신 다시 매고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은 백두 그룹의 위기죠. 하지만 위기는 기회입니다. 알짜 한두 곳과 부실 계열사 몇 개를 정리하시고 자금 위기에서 벗어나십시오.”
“아무리 최대 채권 은행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죄송하지만, 우리도 나도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무리해서 백두 그룹에 대한 대출을 통과시켰습니다. 제가 검찰 조사를 받아야 합니까?”
눈빛이 변하는 산업수출은행장이었다.
“시국이 이래서 긴급 대출은 어렵습니다. 최대 채권 은행으로서 충고드립니다. 계열사 몇 곳을 매각해서 유동성 자금 위기를 극복하시고 강도 높은 구조 조정에 착수하십시오. 그렇게만 하신다면 우리가 그리고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미 한배를 탔지 않습니까.”
“정말입니까?”
백두 그룹 회장으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강요였다.
“그렇습니다. 백두가 한보 꼴이 나면 제 꼴이 말이 아니게 됩니다. 으음…….”
“그렇다면 어떤 계열사를 매각하기를 원하십니까?”
백두 그룹 회장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산업수출은행장이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최대 채권 은행이라고 해서 이렇게 계열사 매각을 통해 자금을 확보하고 부채 비율을 감소시키라고 말했던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뭐 사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재계에서 이 정도로 위급해지는 상황이 닥친 적도 없기는 했다.
“제가 그걸 어떻게 말씀을 드립니까? 하지만 바로 매각이 진행될 수 있는 알짜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 말씀은 백두 소주나 백두 유통을 내놓으라는 말씀입니까?”
“그 결정은 회장님과 이사회가 하실 부분입니다. 저희는 내일 1차 부도 처리가 난다면 채권 회수에 돌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백두 그룹의 입장에서는 엎친 데 덮친 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백두의 숨통을 끊어놓겠다는 말씀입니까?”
“한보와 다른 길을 걸으시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유동성 자금 위기와 외환 위기가 올 수도 있다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부채 비율을 감소시키고 자금을 확보해 놓으면 좋은 방향으로 흐르지 않겠습니까.”
“으음…….”
“매각한 계열사는 다른 사람의 손에 잠시 맡겨 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소수의 의견이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현금을 다량으로 보유한 그룹이 더 확장하게 될 겁니다. 이건 우리 은행에서 내놓은 분석입니다.”
물론 이 분석에 백범이 많은 공헌을 했었다.
“그리고 부실 계열사 몇 개도 처리하십시오. 주리아 화장품 그거 3년 내내 적자이지 않습니까.”
백두 그룹 회장은 어떤 측면에서는 선견지명이 있어서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해 주리아 화장품을 설립했고 중소화장품 회사를 합병했었다. 그리고 연구개발을 박차를 가하면서 상당한 자금을 투입했었다.
“결정하시면 저희도 움직이겠습니다. 긴급 자금을 요청하셨죠.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법정 관리를 신청하시면 주가는 끝도 없이 하락하게 될 겁니다.”
주가를 말하는 것은 백두 그룹 회장의 개인 자산도 하락할 거라는 것을 내놓고 말하는 것이다.
“으음……!”
“어쩌시겠습니까?”
“좋습니다. 백두 소주와 백두 유통 그리고 부실기업들을 정리하겠습니다.”
“발표는 1차 부도 발표 전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은행도 명분이 있고 움직이기 편하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결론이 났다. 말도 안 도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백두 그룹은 최악의 순간에 최상의 축복을 받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백두 소주와 백두 유통을 동시에 매각한다면 최대 5000억 상당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곧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는 IMF 외환 위기가 닥칠 테니까.
* * *
1997년 4월 22일, 태양 종합금융투자 사장실.
나는 박태웅과 임원들과 함께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사실 백두 그룹 부도 발표 뉴스를 기다리고 있고 나와 박태웅을 제외한 임원들은 정말 재계 서열 25위인 백두 그룹이 부도 처리가 될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뉴스를 보고 있다.
-내일 부도 처리가 될 겁니다. 그전에 백두 그룹이 긴급 구조 조정 발표를 할 거라고 합니다.
나는 이미 태평양법무법인 구대성 대표에게 언질을 받은 상태다.
[다음 뉴스입니다. 오늘 재계 서열 25위 백두 그룹이 1차 부도 처리가 됐고, 대대적인 구조 조정에 나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번 백두 그룹의 구조 조정은 그룹 확장 과정에서 발생한 유동성 자금 부족에 의한 것으로, 그룹 측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계열사 매각에 나선다고 밝혔습니다. 대상은 백두 그룹의 백두 소주, 백두 유통, 주리아 화장품, 주식회사 북부화물터미널입니다.]
드디어 뉴스가 떴다.
“됐습니다.”
박태웅이 내게 말했다. 그리고 임원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백두 그룹의 최대 채권 은행인 산업수출은행은 백두 그룹에 긴급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원래라면 부도를 막아줬을 수도 있었을 건데……!’
한보 그룹 사태가 산업수출은행의 행보를 막았던 것 같고 합당한 명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주식이 폭락하겠군.’
이 부도 처리 발표와 함께 백두 그룹 주식은 폭락할 것이다.
‘혹시?’
나는 산업수출은행 은행장의 앞으로의 행보가 떠올랐다.
‘백두 그룹 주식 매집인가?’
그럴 가능성이 크다. 나도 그럴 참이니까.
나는 TV를 껐다.
‘주리아 화장품!’
백두 소주와 백두 유통과 같이 나온 매물인 주리아 화장품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대표님.”
“대표님께서 예측하신 결과가 만들어졌습니다.”
우린 이미 백두 소주 인수에 뛰어들겠다고 계획해 놓은 상태다.
‘롯대팔성과 대성식품, 그리고 나!’
아마도 3파전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우리는 백두 소주를 손에 넣을 겁니다. 그리고 주리아 화장품 역시 가지게 될 겁니다.”
“주리아 화장품까지라고 하셨습니까?”
박태웅이 내게 되물었다.
“백두 소주를 손에 넣지 못해도 주리아 화장품은 꼭 손에 넣을 겁니다.”
롯대팔성과 대성식품은 만만한 상태가 아니다. 그리고 백두 소주에 책정된 기업 가치보다 더 많은 돈을 베팅할 생각도 사실 없다.
“롯대팔성과 대성이 경쟁하면 인수 단가가 상승하겠죠?”
“그럴 것입니다.”
“기업 가치 이상으로 비싸게 살 마음은 없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자금은 투자자님의 소중한 목숨줄이니까요.”
“그런데 왜 주리아 화장품을 거론하셨습니까?”
“대한민국에서는 누구나 소주를 마시죠.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또한 여자들은 매일 화장을 합니다. 가장 저가에 사서 가자 고가에 판매하는 것이 투자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현재는 비비크림도 개발되지 않은 시대다.
‘내가 개발해 보지.’
그리고 앞으로 중국은 엄청난 시장으로 급부상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는 합니다.”
“내일 바로 백두 소주에 대한 입찰에 참여한다고 발표하십시오.”
속전속결로 움직일 때다.
“예, 알겠습니다. 대표님.”
박태웅이 대답했다.
“주리아 화장품에 대한 정보를 태평양법무법인에 요청하십시오.”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 볼 참이다.
‘소주는 내수용이지만 화장품은?’
전 세계 모든 여자가 바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최종 목표가 전환되는 순간이다.
사업이라는 것이 다 이렇다.
투자는 변화무쌍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