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74화 당신의 무릎 위에
태평양법무법인 대표의 사무실.
백영기 변호사가 법무법인 대표와 앉아 있고 법무법인의 핵심 변호사들이 앉아 있다.
“내가 오늘 두 곳에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태평양법무법인 대표의 표정은 어떤 결정을 남겨둔 사람처럼 무거웠다.
“우리 법무법인과 파트너십을 체결한 태양기업의 행보 때문에 받은 전화입니다.”
“그렇습니까?”
변호사 한 명이 법무법인 대표에게 물었다.
“예, 그렇소. 백범 대표가 오늘 청와대에서 각하를 단독으로 접견했답니다.”
이제 겨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백범이 청와대에 호출이 되어 각하를 면담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회의에 참석한 변호사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단하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두 통의 전화는 모두 항의 전화였소. 각하와 단독 면담할 때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백범 대표의 돌발적인 행보 때문에 우리가 곤란하게 됐소.”
“돌발적인 행동이라고 하셨습니까?”
한 변호사의 물음에 백영기 변호사가 변호사들을 봤다.
“백범 대표는 오늘 여당과 야당의 중진의원에게 제공한 정치후원금을 증여 신고했습니다. 그 의원들을 백범 대표에게 소개해 준 곳이 바로 우리 법인입니다.”
백영기 변호사는 태평양법무법인 대표를 대신해서 백범이 저지르고 다니는 망나니짓에 대해 변호사들에게 설명해 줬다.
“정, 정말입니까?”
“아……!”
“헌정 이래 초유의 사태 아닙니까?”
변호사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소. 또한, 청와대 경제수석이 내게 강력하게 항의를 해왔소.”
처음으로 태평양법무법인 대표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대표님, 이 정도로 정신없이 돌출 행동을 한다면 태양기업 대표와의 동반 관계를 파기해야 합니다.”
“경제수석은 정권의 실세입니다. 그가 강력하게 항의를 해왔다는 것은 문제가 커질 수 있습니다.”
핵심 변호사들은 모두 백범 대표와 맺은 파트너십 계약을 파기하는 쪽으로 말했다.
“백영기 변호사.”
그때 태평양법무법인 대표가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는 백영기 변호사를 불렀다.
“예, 대표님.”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대표님, 태평양법무법인이 지금 당장 태양기업 대표인 백범 대표와 파트너십을 파기한다고 해도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백영기 변호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태평양법무법인 대표였다.
-저는 대한민국국가 부도에 투자합니다. 저와 함께하시겠습니까?
태평양법무법인 대표는 과거 백범이 자기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지요. 우리 법인의 행보에 타격을 입기는 했습니다. 이미지에도 타격을 입었고요.”
“증여 신고를 했다면 동교동 쪽에서도 항의를 해왔습니까?”
“동교동은 조용합니다.”
태평양법무법인 대표의 말에 백영기 변호사의 눈빛은 작심이라도 한 듯 변했다.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대표님께서 동교동인지 아닌지부터 선택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태평양법무법인 대표에게 말한 백영기 변호사는 예전부터 정치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안목도 출중했다.
“그래요?”
“그렇지 않습니까?”
되묻는 백영기 변호사였다.
“곧 청와대의 주인이 결정됩니다. 여당에서는 항의 전화가 왔고 야당은 잠잠합니다. 어떤 의미겠습니까? 이미 여당 쪽과 청와대 실세의 눈밖에는 났습니다.”
“그렇지요.”
“화무십일홍입니다. 이제는 바뀔 때도 됐습니다.”
“백영기 변호사의 의견은 위험합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면 반대편은 적이 됩니다.”
다른 변호사가 백영기 변호사의 말을 반대했다.
“태평양법무법인이 법무법인 서열 5위를 겨우 유지하는 것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적이 없다는 것은 확실한 아군도 없다는 겁니다. 적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아군을 만드는 일입니다.”
백영기 변호사가 강력하게 말했다.
“백 변은 동교동과 백범 대표를 우리 법무법인이 선택하자는 겁니까?”
“계약을 파기한다면 최악의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여당 쪽은 법무법인에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해 올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굴복한 후에 꽃이 지고 새로운 꽃이 핀다면 5년을 어떻게 버티려고 하십니까? 싫다는 사람 쫓아갔다가 발병밖에는 더 나겠습니까.”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까?”
태평양법무법인 대표의 눈빛이 차갑게 변한 상태로 백영기 변호사에게 물었다.
“51 대 49쯤으로 판단됩니다.”
“여당 쪽이 우세하다는 거군요.”
“현재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선거는 끝나봐야 압니다. 저는 충분히 역전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지켜보셔야 합니다.”
-법무법인 서열 1위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저와 파트너십을 체결하시겠습니까?
다시 백범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오르는 태평양법무법인 대표였다.
‘법무법인 서열 1위라!’
-백범 대표는 총재께서 무척이나 흡족해하시는 청년 사업가입니다.
사실 태평양법무법인 대표는 권 의원에게 한 통의 전화를 받은 상태였다.
“지금 당장 파트너십 계약을 파기하는 것은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백영기 변호사는 다시 한번 강조했고 태평양법무법인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책임변호사들께서는 다른 의견 없으십니까?”
“지켜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파트너십 계약이 아직 11개월 남았습니다. 계약을 우리 쪽에서 파기하면 위약금을 지급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당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됩니다.”
소수의 의견이 존재했지만, 우선은 백범과 체결한 파트너십 계약을 유지하자는 쪽의 의견이 더 많았다. 그리고 다른 책임변호사들의 의견이 백범에게 유리한 쪽으로 나오자 백영기 변호사는 안도하는 눈빛을 찰나에 보였다.
-은혜야, 백범 대표의 행보가 위태로운 것 같다.
백영기 변호사는 이 회의가 있기 전에 이미 돌아가고 있는 일들을 파악하기 시작했고 태평양법무법인 대표에게 미리 백범 대표의 행보에 대해 언질을 받은 상태였다.
-무슨 일 있는 건가요?
-극비사항인데 백범 대표가 정치후원금을 강요당해 여당과 야당에 정치후원금을 제공한 것 같다.
-아……!
-문제는 정치후원금을 제공했다는 것이 아니라 정치후원금을 제공하고 증여 신고를 했다는 거야.
-뭐, 뭐라고요?
-백범 대표가 천둥벌거숭이 같은 짓을 했어. 그래서 위태로운 상황이다.
-오빠, 제 남편 멋지지 않나요?
-뭐?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했잖아요. 이제는 누구도 제 남편에게 정치후원금을 요구하지 못할 거잖아요.
-그렇기는 하지만 강력한 적을 만들었어.
-저는 제 남편을 믿어요. 멋진 분이시잖아요.
-멋지기는 하지만 이러다가 백범 대표가 대한민국에서 사업을 하기 힘들어질 수가 있어. 그리고 너도 판사 임용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판사 임용요?
-그래, 네 판사 임용을 막으려고 든다면 못 막을 이유도 없으니까.
-호호호, 그럼 변호사를 하면 되죠.
-진심이야?
-진심이에요. 그리고 제 남편이 대한민국에서 사업을 못 하면 이민 가면 되죠.
-은혜야……!
-오빠, 우리 남편 잘 부탁해요.
은혜는 그렇게 백영기 변호사에게 백범을 부탁했었다.
“의견들이 파트너십 계약 파기를 유보하자는 쪽으로 모이고 있으니 백범 대표를 좀 더 지켜봅시다.”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고 파트너십 계약 유보로 결론을 맺는 회의로 끝이 났다.
* * *
백범의 강북 고급 아파트 건물 앞.
저녁 일곱 시다. 청와대에서 각하의 앞에서 망나니짓을 하고 또 적을 만들고 당당하게 걸어 나온 지 다섯 시간이 지났다. 각하를 만난 시간은 한 시간 30분 남짓이지만 그 시간은 내 인생에 변곡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섯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곧 태평양법무법인 대표에게 전화가 오겠지.’
내게 여당중진의원을 소개해 준 사람이 태평양법무법인 대표이니까.
아마도 파트너십 계약 파기 이야기가 나올 것으로 생각된다.
‘쉽게 갈 길을 어렵게 가는 중이군.’
전생이었을 때의 나라면 절대 이렇게 가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전생이었을 때의 나라면 내가 직접 태양기업을 설립하고 대표가 되어 사업을 추진하지 않았을 것이다.
충성스러운 개 한 마리를 전면에 세우고 음모를 꾸몄을 것이고 서민들에게 투자를 더 많이 받기 위해 힘썼을 것이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김 비서가 내게 말했다.
“사업이 쉽지 않네요.”
“대표님, 외람된 말씀이나 사업과 양심을 다 챙기실 수는 없습니다.”
“옳은 말씀이네요. 충고 감사합니다.”
“푹 쉬십시오.”
“그래야겠습니다.”
김 비서님께 말하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아파트 건물을 봤는데 우리 집에 불이 켜져 있다.
‘이제 겨우 일곱 시인데?’
살짝 불안한 마음과 아내가 집에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나는 바로 입에 물었던 담배를 꺾고 아파트로 들어갔다.
* * *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니 내 아내 은혜가 반가운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좀 어색하군.’
항상 내게 지어 보이던 그 미소지만 어제의 미소와는 살짝 다르다는 느낌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일찍 왔네요.”
“예, 오늘은 빨리 끝났어요. 씻으세요. 상은 제가 차릴게요.”
“예.”
은혜가 나를 보며 웃고 있기에 우선은 나도 웃었다.
‘이야기를 해줘야 하나?’
고민스러운 순간이다. 사실 내가 그 망나니짓을 할 때 제일 마음에 걸린 것은 내 아내 은혜였다. 내가 저지른 미친 짓은 앞으로 은혜의 행보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바로 잡는 일이지만 어쩌면 은혜의 판사 임용을 막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여튼 그런 생각을 하며 욕실로 가서 샤워를 위해 옷을 벗었다.
똑똑!
그때 욕실 문이 열렸고 은혜가 욕실로 들어왔다.
“왜요?”
“씻겨 드릴게요.”
사실 이건 내가 엄청나게 좋아하는 일이다.
“하하하, 됐어요. 금방 씻고 나갈게요.”
“싫은데요.”
내게 웃으며 은혜가 말하고 바로 옷을 벗고 내게로 왔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샤워기를 틀었고 우린 알몸 상태에서 비를 맞듯 물줄기를 같이 맞았고 은혜가 거품을 내고는 그 거품으로 내 몸을 쓰다듬듯 비볐다.
‘부드럽군.’
충분히 자극적인 순간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편안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렇게 나는 은혜의 도움으로 거품 샤워를 끝냈고 나 역시 은혜를 씻겨줬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부부는 이 욕실에서 안 했다는 것이다.
‘편안함이 욕망을 사그라트렸다.’
* * *
저녁 식사 후 은혜가 후식 과일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설거지를 끝냈다. 그러고 나서 거실로 와서 포근한 은혜의 무릎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먹고 바로 누우면 소 돼요.”
“이게 편안해요.”
나는 무릎베개한 상태로 은혜를 올려 봤고 은혜는 나를 먹이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팔을 뻗어 과일 접시에 담긴 사과를 포크에찍으려 했다. 은혜가 허리를 숙이니 내 얼굴이 은혜의 가슴에 묻혔다.
‘와우, 윽!’
숨이 턱하고 막히는 순간이다.
질식사가 이런 느낌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포근하다. 정말 내 쉴 곳은 내 아내뿐인 것 같다.
“드세요.”
은혜가 내 입에 사과를 넣어줬다.
“꿀맛이네요. 하하하!”
“백범 씨.”
“왜요?”
“나 상의할 것이 있어요.”
“뭔데요?”
“저 연수원 수료 후에 변호사 사무실 개업하는 것은 어떨까요?”
내 아내 은혜는 오직 판사 임용을 위해 오늘까지 달려온 사람이다. 사실 판사가 되기 위해 나와 결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내 아내 은혜가 변호사 사무실 개업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어색한 웃음?’
그 웃음의 의미가 짐작되고 이 순간 태평양법무법인에서 근무하는 백영기 변호사가 떠올랐다.
‘벌써?’
내가 오늘 저질렀던 망나니짓이 은혜의 귀까지 들어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변호사 사무실 개업 이야기를 은혜가 지금 꺼내는 것 같다.
“왜요?”
“그냥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내 아내 은혜다.
“귀 파드릴게요.”
말을 바로 돌리는 은혜다.
“예?”
“귀지가 엄청 많아요. 호호호!”
“아……!”
“귀 파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