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66화 그녀를 만나다.
“남은 190억으로 투자할 수 있는 몇 곳을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투자를 받을 수 있는 국가들 몇 곳도 분석해 봤습니다.”
“이 투자 계획서를 따르지 않았으면 사표를 표창처럼 제게 날리셨겠죠?”
“그렇습니다.”
“박태웅 이사.”
“예, 대표님.”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나는 110억을 날리고 똑바로 살아갈 기회를 얻었고 박태웅을 얻은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의 무궁한 신뢰도 얻었다.
‘실패지만 실패하지 않은 선택이다.’
문제는 이 실장이 말한 것처럼 내가 자신들의 제안을 거부했을 때 돌아올 보복에 대해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휘청거리게 될 것이고 힘들어질 것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최악의 경우 사업이나 투자를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정권은 꼭 바뀐다.’
그때까지 숨을 죽이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처리할 일이 많습니다. 그 일을 마무리한 후에 검토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대표님.”
“예, 박 이사님.”
“외람되지만 뇌물 부분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내가 불법 대출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에게 뇌물을 공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박태웅 이사다.
“그 부분을 처리해야 해서 바쁩니다.”
뇌물수수 부분은 망나니의 방법으로 처리하고자 한다.
“생각해 두신 것이 있기는 하십니까?”
“있기는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나중에 생각하신 것이 답이 아니라고 생각이 드실 때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궁금한 것을 추측하고 추론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박태웅이 말을 마치고 내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내 사무실을 나갔고 나는 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따르릉, 따르릉!
딸깍!
-여보세요?
“잘 지내셨습니까? 권 의원님.”
-오, 백범 대표.
“외람된 말씀이나 오늘 제가 선생님을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갑자기요?
“예, 죄송합니다.”
-총재님께 말씀은 드려보겠습니다.
-오라고 하세요.
옆에 김대준 총재가 같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럴 줄 알았지.’
김대준 총재와 권의원은 바늘과 실이니까.
-에……. 백범 대표.
내 휴대전화에 김대준 총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선생님.”
-오늘 저녁 같이합시다.
“감사합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대선후보가 내 갑작스러운 요청을 바로 수락했다는 사실이다.
‘왜지?’
이유가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 * *
오늘은 바쁠 수밖에 없는 날이다.
“김 비서님.”
“예, 대표님.”
김 비서님은 백미러를 통해서 나를 힐끗 봤고 나를 걱정하는 눈빛이다.
“제가 걱정되십니까?”
“박 이사님께서 최대 110억까지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잘못한 것이 많군요.”
“대표님, 직원들이 걱정을 많이 합니다.”
“저요? 아니면 회사요.”
“둘 다입니다.”
사실은 자신들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저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후회하는 성격은 아니거든요. 회사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시오. 저 백범입니다. 저 돈 많은 졸부 집 아들입니다. 하하하!”
나를 백미러로 보는 김 비서님의 눈빛은 나를 걱정하는 눈빛이다.
“예, 대표님, 어디로 모실까요?”
“청담동으로 우선 가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김 비서님에게 정확한 위치를 말하지 않았다.
‘전화를 해보면 알겠지.’
나는 청담동 처녀 보살 조비에게 전화를 할 참이다. 내 결정과 그 결정에 대한 대피 책 중 하나가 조비다.
그래서 나는 진짜 백범이 쓰던 휴대전화를 가지고 나왔다.
따르릉, 따르릉!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조비에게 전화를 걸었다.
따르릉, 따르릉!
딸각!
-여보세요?
“나 백범입니다.”
-4개월만이시네.
바로 반말을 하는 조비고 내가 가진 진짜 백범의 기억처럼 둘은 친구인 것 같다.
‘술친구지.’
다행스러운 것은 진짜 백범이 조비를 건드린 기억은 없다. 물론 없는 것인지 잊은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이신의 기억 중 떠오르지 않는 것이 꽤 있다……!’
그렇다면 영혼의 융합 과정에서 백범의 기억도 부분적으로 소멸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점 볼 일이 있는데 지금 가도 됩니까?”
-왜 갑자기 존댓말? 그리고 어디인지는 알고 오겠다는 거야?
“청담동 어디겠지?”
나는 바로 반말을 했다.
-나 비싸고 예약하고 와야 하는데.
“친구잖아. 술친구.”
-와, 직접 운전해?
“비서님이 계셔.”
-바꿔줘.
조비가 내게 말했다.
“김 비서님, 전화 좀 받아보십시오.”
“차 세우겠습니다.”
김 비서가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내가 건넨 휴대전화를 받았다.
* * *
청담동 처녀 보살 조비의 사당.
나는 백범이기에 백범처럼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았다.
“파리만 날리면서 비싼 척은.”
내가 기억하는 백범의 기억 속에서는 조비와 백범은 가식 없이 지냈다. 그래서 이러는 것이다. 아마 내가 온다는 말에 점을 보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손님들을 모두 보낸 것 같다.
‘젊은 사람들이 말하는 여사친 그런 존재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조비를 봤고 조비는 무슨 영문인지 뚫어지게 나를 노려보고 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그때 조비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 뭐지?’
싸한 기분이 든다.
“너 누구냐?”
전화 통화에서 들었던 조비의 목소리가 아니다. 기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굵은 남자의 목소리다.
“왜 그래?”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소름이 돋는다.
“넌 누구냐고 물었다?”
조비가 다시 내게 말했다. 분명 조비의 목소리가 아니다.
‘접신인가?’
놀랍다. 어쩌면 백범의 몸에 담겨 있는 내 영혼의 존재를 접신한 조비가 감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너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조비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자기 앞에 놓아둔 팥알을 내게 뿌렸다.
그리고 다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구세요?”
“왜 이래?”
시치미를 뗐다.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닌데 누구세요?”
담담히 묻고 있는 조비지만 그녀의 눈빛은 차갑다.
“미쳤니?”
내 말에 조비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무당은 반쯤 미쳐야 하죠.”
내가 백범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그랬군요.”
“뭐가?”
그저 놀랍고 당황스러운 순간이다.
“교통사고 후에 바뀐 거군요. 관상을 보니 사주가 두 개인 팔자가 되셨네요.”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나는 그냥 백범이야.”
“망나니로 살기로 하신 모양이군요.”
처음으로 미소를 머금는 조비다.
“다 이유가 있고 뜻이 있겠죠. 무엇이 그리 궁금하시기에 제게 오셨습니까?”
“우리 친구 아닌가?”
“친구요?”
“응.”
“힘드시죠, 청년처럼 말하기 힘드시지 않습니까?”
“이유가 다 있겠지.”
“그렇지, 그래도 너는 나한테 망나니 백범이야. 사주나 불러. 여기까지 왔으니 네 사주를 제대로 봐줄게.”
조비가 말했고 나는 내가 기억하는 생년월일을 불러줬다. 그리고 사주를 받은 조비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섬뜩해.’
접신이라는 것이 진짜 존재하는 모양이다.
“아……!”
눈을 뜨자마자 조비의 눈빛이 먹먹하게 변해 있었다.
“인연이 저와도 겹쳐 있으시군요……!”
조비의 말에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저기,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내가 너를…….”
“넌 내 스타일 아니야.”
“휴, 다행이군.”
“사주를 풀어보면 바뀐 사주 때문에 재물복은 타고 나셨고 또 엄청나게 들어오실 거고, 처복도 이보다 좋을 수가 없고 부모도 잘 만나셨으니 걱정할 것이 없는데 왜 나를 찾아왔을까? 아, 하나 걸리네.”
“뭐, 뭐가?”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너 누구냐?
그 말을 내게 했을 때부터 솔직하게 나는 조비에게 겁을 먹었다.
“이생에서 죄업을 쌓았네. 그 죄업 때문에 액운이 몰려오네. 네가 저지른 일이라서 뭐라고 말도 못 하겠어. 죄업을 쌓으면 금산의 주인이 되는데 어떻게 할 거야?”
조비는 용하기는 정말 용하다.
“액운이라면 부적이라도 써 줄래?”
사실 부탁을 하기 위해서 왔지만 바로 대놓고 말할 수가 없다.
“부적으로 안 돼.”
“그럼 어떻게 할까?”
“넌 최대한 빨리 칼 찬 망나니가 되어야 해.”
“뭐라고?”
“마음은 이미 먹었으니 마음먹은 그대로 바꾸지 말고 단칼에 휘두르라고, 서툴게 휘두르면 개망나니가 되는 거야.”
망나니와 개망나니는 분명 다른 존재다.
그리고 정말 조비는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내게 말했다.
“알았어. 사실 점을 보겠다는 것은 핑계고 부탁을 하나 하려고 왔어.”
“뭔데?”
“끝순 할매를 만나고 싶은데 가능하겠어?”
이게 내 목적이다. 조비가 말했던 끝순 할매는 수천억을 가진 재산가니까.
그래서 아버지께 땅문서도 받아놓은 상태다.
“왜?”
“안 될까?”
나는 조비를 빤히 보며 물었다.
“원래는 안 되는데 고마워서 자리를 마련해 줄게.”
사실은 안 될 줄 알고 왔었다. 그런데 된다고 하니 그게 더 이상하다.
“정말이지?”
“응, 소개해 줄게. 돈 궁해졌어?”
“똑바로 살려고 하니까 120억이 훅하고 날아가네.”
“지은 죗값이지.”
정말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조비다.
“바쁘지?”
“바빠, 수습해야 할 일이 너무 많거든.”
“그러니까 앞으로 똑바로 걸어. 한눈 팔지 말고 군자는 대도행이야.”
“군자? 망나니라면서?”
피식 웃음이 나올 뿐이다.
사실 처음 보는 조비에게 반말을 하는 것이 껄끄럽다. 하지만 나는 백범이 아니면서도 백범이기에 반말을 하고 있다.
“하여튼 마누라 잘 만났어. 마누라가 네 복의 근원이야.”
“그건 인정.”
내 말에 피식 웃어 버리는 조비다.
“나간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돌아섰다.
“저기요, 잘 계신가요?”
사뭇 목소리가 달라진 조비가 내게 말했다.
“왜, 갑자기 존댓말?”
“백범에게 여쭈는 것이 아니니까요.”
나는 조비를 뚫어지게 봤다.
“누가 잘 있는지 궁금합니까?”
“이제야 인정을 하시네요. 두 사주가 겹쳐져서 새로운 사주가 나왔네요.”
“누구의 안부가 궁금합니까?”
내가 다시 조비에게 물었다.
“제가 꽃분이에요. 꽃분이 아시죠.”
숨이 턱하고 막힌다.
“아…….”
나는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계십니다. 그리고 아이가 되셨습니다.”
김찬 할아버지에게 딱 맞는 표현일 것이다.
“어디에 계신가요?”
“제 본가에 모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래서 소개해 주신다는 거군요.”
“전생의 인연이 후생까지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은혜는 갚고 원한은 잊어야겠지요.”
“그렇다면 참 많이 힘드시겠네요.”
이 순간만큼은 조비가 가엽다.
“그렇답니다.”
“원한을 잊듯 인연도 잊으세요. 나는 다 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백범으로 살죠. 그러니 당신도 조비로 사십시오.”
내 말에 조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짜 잡히면 전화 주십시오.”
나는 조비에게 내 명함을 건넸다.
“번호 바꿨습니다.”
은혜 말고 처음으로 다른 여자에게 내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있다.
“알았어.”
“고맙다.”
“항상 정도를 걸어. 그럼 대운이 따라붙으니까.”
나를 보며 웃는 조비다. 그녀는 내게 반말을 했고 이것은 나를 백범으로 생각하겠다는 소리다. 그러니 나도 조비를 친구로 대하면 되니 반말을 하면 된다.
“그리고 까딱 잘못하면 개망나니가 된다. 그것만 항상 명심하면 돼. 사주가 겹쳤다고 말했잖아. 두 사주가 너를 혼란하게 만들 거야.”
마치 계속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는 말처럼 들렸다.
“충고 고마워.”
“장군님이 해주신 말씀이야. 명심해 원한을 갚을 때마다 죄업이 쌓여.”
마지막 말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고 한호성 과장이 떠올랐다.
“그럼 천벌은 누가 내려?”
내 말에 조비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갈게.”
정말 용하기는 소름 돋도록 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