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55화 박태웅을 만나다.
국제호텔 로비 앞.
약속 시각은 오후 6시다. 내 아내는 예의가 바른 사람이니 10분 전에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20분 전에 먼저 와서 내 아내 은혜를 기다릴 생각을 했는데, 이미 국제호텔 로비에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그녀가 서있었다.
‘도대체 언제 온 거야?’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서로의 만남을 앞당겨 놨다.
“언제 왔어요?”
내가 은혜에게 말했다.
“조금 전에 왔어요.”
“제가 먼저 올 거라는 생각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요?”
내 말에 은혜는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제가 10분 먼저 올 줄 알고 그보다 10분 먼저 오셨죠?”
“그랬네요.”
“저는 그래서 그보다 10분 먼저 왔어요.”
“하하하!”
밤낮으로 나를 항상 웃게 만드는 내 아내 은혜다. 그리고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는 김 비서님께서는 그저 미소만 지어 보이고 계신다.
‘은혜를 만난 것은 정말 은혜로운 일이다.’
내가 아마 전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
‘전생에서는!’
업보만 쌓았으니까.
‘그 업보를 갚으라고?’
환생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요즘 자꾸 든다. 그리고 원래의 나도 같은 시간에 존재할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너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나를 부정하고 싶다.
“오시기로 한 분은 아직인 모양이군요.”
나는 사실 박태웅이라는 경제 전문가가 내가 생각하는 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저기 오시네요.”
호텔 로비를 중심으로 좌측에서 젊은 남자 한 명이 담담한 표정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고, 내 아내 심은혜가 손을 들어 자신의 위치를 그에게 알려줬는데 그녀의 표정은 그저 담담할 뿐이다.
‘내게만 웃어주는 당신!’
그래서 내 아내 은혜가 더 고맙다.
‘박태웅!’
쿵!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다.
‘그다.’
내가 알고 있는 그가 내게로 걸어오고 있다.
‘괘씸한 새끼!’
내 전생에서 박태웅과 나는 마지막 순간에는 악연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생은 어떨까?’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그는 옵션 투자 전문가라는 사실이고 그 누구보다 정치경제에 해박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분명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박태웅은 자신도 모르게 가진 자들의 도구로 쓰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달라졌다. 아니 달라질 것이다. 그러니 이번 생은 악연이 아닌 인연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서민은행 설립은 이름만 바꾼 저축은행 아닙니까?
내게 따지던 박태웅이 떠오른다.
-처음부터 이럴 줄 몰랐나?
-예, 몰랐습니다. 서민을 위한 은행 설립을 위한 기금 조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박태웅.
-예, 대부님.
-나는 나쁜 놈인데 너는 비겁한 놈이다.
-예?
-대한민국이 단 한 번도 서민을 위해 자금을 마련한 적이 있나? 기금을 조성한 적이 있나? 가난한 자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으음······!
-자네와 나는 이미 한배를 탔네.
-자금 세탁이 목적입니까? 그런 후에 정치 자금으로 쓰입니까? 그래서 얻으시는 것이 뭡니까? 또 누구를 울부짖게 하시려고 이러십니까?
-울부짖는다?
-중국으로 밀입국한 조 씨의 뒤에 대부님이 있다는 것도 저는 알게 됐습니다. 이번에는 뭡니까?
-내 입으로 꼭 말해야 하나? 이제는 멈출 수가 없어.
-저는 여기서 멈춥니다.
-어떻게 내가 허락하지 않는데 자네가 그럴 수 있겠나?
-상관없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허락할 겁니다.
-과연 그럴까?
-좌측을 보십시오. 깜빡이는 불빛이 보이지 않습니까?
-뭐, 뭔가?
-제 양심선언입니다.
그는 경제인이 가지지 말아야 할 양심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박태웅 때문에 꽤 곤혹을 치러야 했다.
‘그런 후에······!’
딱 일주일 만에 김 상사를 만나기 위해 정신병원으로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었다.
‘그 하루 전에!’
내 손이 붉어져야 했었다.
‘그 교통사고 우연이었을까?
우연이 아니라고 해도, 또한 사고가 아닌 사건이라고 해도 전생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이생에서 복수할 마음은 없다.
‘복수는 결국!’
내 이 행복한 삶을 무너트릴 테니까.
그리고 복수의 대상도 존재할 수 없게 된 상태다.
“선배님, 소개해 드릴게요. 제 남편이에요.”
내 아내 은혜가 나를 박태웅에게 소개했다.
‘저 도덕책을 어떻게 내 사람으로 만들까?’
이것이 중요할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심은혜의 남편 백범이라고 합니다.”
내가 박태웅에게 말했고 내 소개에 박태웅은 묘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내가 왜 이렇게 나를 소개했냐고?
나는 내 아내의 남편인 것이 자랑스럽다.
“안녕하십니까. 박태웅이라고 합니다.”
간단한 통성명이 끝났고 박태웅은 내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 * *
국제호텔 레스토랑 특실.
국제호텔 레스토랑 특실에 들어섰고 나는 은혜를 위해 그녀의 외투를 받아서 옷걸이에 걸어줬다. 그리고 이 시대의 한국 여자들은 외국 영화에서나 봤을 의자를 빼주는 예의 있는 행동을 했고, 박태웅은 런 나를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다.
“고마워요. 백범 씨.”
“이건 기본이니 고마워할 것 없습니다.”
은혜가 나를 위해 웃었고 나 역시 은혜를 위해 웃는다.
“참 보기 좋은 모습이십니다. 은혜가 웃어주는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학창 시절에 얼음 공주였습니까?”
“얼음 공주요? 하하하.”
“학창 시절에 웃지 않았군요.”
“공부하느라 바빴죠. 매일 도서관에서 봤지만,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얼음 공주 맞습니다. 하하하!”
박태웅의 말은 은혜가 매일 고개를 숙이고 공부만 했다는 소리다. 그리고 내 농담에 서먹서먹했던 분위기가 정리됐다.
“제가 제 아내에게 학교 동문 중에서 경제 전문가를 알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부탁이요, 부부끼리?”
“예, 부부끼리이니 지시가 아닌 부탁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옳은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내가 박태웅이 내게 말했다.
“선배님께 경제 분야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정말 많지만, 식사부터 하시죠. 금강산도 식후경이지 않습니까.”
“제게 많은 것을 물어보실 모양이십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식사가 시작됐고 나는 예의가 몸에 밴 사람처럼 접시에 올려 있는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잘라서 그녀의 스테이크 접시와 바꾸려고 했다. 그러다 같은 생각을 한 은혜가 내밀던 접시와 내 접시가 부딪쳤다.
“어머!”
접시가 부딪치자 은혜가 살짝 놀랐다.
“이런 것을 보고 부창부수라고 하겠군요.”
박태웅이 내게 말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두 분 다 인생을 행복하게 사시는 것 같습니다.”
* * *
30분 정도가 지났고 식사는 끝이 났다. 이제부터는 본론에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백범 씨, 이제 저는 일어날까 해요.”
내가 박태웅과 대화를 나누기 편하게 자리를 비켜주겠다는 은혜다.
“밖에 김 비서님이 계실 겁니다.”
“예, 알겠어요.”
은혜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웅 선배, 우리 남편 잘 부탁드려요.”
“은혜, 네가 부탁이라는 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됐군.”
박태웅이 은혜에게 말했다.
“그러게요. 저도 여유가 생겼나 보네요.”
너무나 힘든 상황에 몰리면 누구에게 부탁조차도 하지 못하게 된다. 부탁해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선배, 잘 부탁드려요.”
은혜는 박태웅에게 부탁하면서도 담담한 표정이다. 항상 나를 위해서만 웃어주겠다고 맹세한 여자처럼 느껴질 정도다.
“잠시 배웅을 하고 오겠습니다.”
내가 박태웅에게 말했다.
* * *
레스토랑 특실에서 나와 승강기 앞에 섰고 승강기의 문이 열리자마자 우리는 승강기를 탔고 나는 바로 스위트룸이 있는 층을 눌렀다.
“위로 올라가네요?”
은혜가 내게 말했다.
“스위트룸을 예약해 놨어요.”
“아······!”
은혜가 탄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오늘 밤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직감했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래 걸리나요?”
“제가 궁금한 것도 많고 배울 것도 많아서 3시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기다릴게요.”
나를 보며 다시 웃어주는 내 아내 은혜고 나는 스위트룸까지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문 앞에 섰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들어가고 싶다!’
이런 상황에서 번뇌(?)에 빠질 줄은 몰랐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잘 알겠다는 눈빛으로 내 아내 은혜가 나를 바라봤다.
“밤은 길어요.”
은혜가 내게 말했다.
* * *
국제호텔 레스토랑 특실.
“경제 분야의 어떤 것이 궁금하십니까?”
레스토랑 특실에 돌아왔고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박태웅이 내게 말했다. 그의 눈빛은 나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원래 저랬지.’
내 전생의 박태웅은 항상 아이처럼 호기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 호기심들이 수많은 음모를 감지하게 했고 내 발목을 끝내 잡았었다.
“코스피200 주가 지수 선물에 투자해 볼까 합니다.”
“주가 지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까?”
박태웅이 내게 되물었다.
놀란 것이다.
‘이 시기에!’
주가 지수 선물에 대해서 질문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사실 코스피200 주가 지수 선물 거래소가 개장된 것은 작년이다.
“그렇습니다. 마음은 그런데 정확한 지식과 개념이 잡혀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상태라면 제가 불나방밖에는 더 되겠습니까.”
“그렇죠. 놀랍습니다. 작년에 개설된 코스피200 주가 지수 선물에 관해 관심을 보이시는 분이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코스피200 주가 지수 선물은 대한민국의 코스피200 주가 지수를 대상으로 하는 선물거래를 말한다.
또한, 대한민국의 최초이자 최대의 선물시장이 바로 그것이다.
‘1980년부터 도입 논의가 있었지.’
하지만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1995년이 돼서야 한국증권거래소에서 모의시장을 운영했다가 1996년 5월부터 정식으로 개장을 했다.
‘그러니 주식쟁이들에게는 아직!’
관심 밖의 투자대상이 바로 코스피200 주가 지수 선물 투자인 것이다.
“선배님.”
“선배라고요?”
왜 자기를 선배라고 부르냐고 되묻는 박태웅이다.
“선배님, 제 아내의 선배이시면 제게도 선배이십니다.”
내가 알고 있는 박태웅의 나이는 28살이다. 그러니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 하지만 내게 도움이 많이 될 사람이기에 선배로 깍듯하게 모실 참이다. 물론 나중에는 나를 대표님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고 내 경제 보좌관의 역할을 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전생처럼 흘러가겠지.’
꽤 오랜 시간 전생의 나와 또 전생의 박태웅은 호형호제를 하며 잘 지냈다. 그 시대의 표현으로 브로맨스가 완벽하게 펼쳐졌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하여튼 그의 경제적 이론이 내 투자에 적극 반영이 되어 수많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엄청난 수익을 챙겼었다.
‘2007년부터였지.’
내가 전생에서 처음 박태웅을 만난 것은 2005년이고 그리고 2년 후 미국발 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 사태에 의해 세계 금융 위기가 닥쳤고 그것에 대해서 박태웅은 2년 전에 예측했었다. 그러니 박태웅은 천재다.
“그렇게 되는 겁니까?”
박태웅이 내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의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참 많이 예의에 인색하다. 마치 자신을 낮추고 예의있게 행동을 하면 자신의 신분이 낮아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