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47화 부창부수(夫唱婦隨)?(2)
판교 본가 안방.
“범아, 그런데 그 어르신은 누구냐?”
“여수에서 만난 분입니다. 김찬 할아버지라고 국가유공자(國家有功者)인데 정신이 오락가락하셔서…….”
아버지께 김찬 할아버지에 대한 자초지종도 설명해드렸고 아버지께서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이 저리 사니, 쯧쯧. 참 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맞는 말씀이시다. 나라를 위해 충성(忠誠)하고 목숨을 바친 분들이 저리 살고 있으니 다시 대한민국이 위태로울 때 누가 나서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까?
“그러게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버지께서 강북에서 철거민이 되셔서 보상을 받고 또 그 보상금(報償金)으로 일산에 땅을 사서 농사를 짓지 않으셨다면 우리도 그저 가난하게만 살았을 것이다.
‘나라가 영웅(英雄)들을 돌보지 않는다.’
이건 분명하게 바로잡아야 할 일이지만 나는 정치(政治)에 관심을 두지 않을 참이다.
‘하지만!’
내 아내 심은혜는 나중에 관심을 두게 할 생각이다. 그리고 바로잡게 유도할 참이다.
“네가 모시고 온 분이시니 내가 잘 돌봐드리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정신이 오락가락하시지만 일은 정말 잘하는 분이십니다.”
염전에서 일했다는 내 말을 들으셨기에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알았다. 그래, 나이가 드셔도 일을 하셔야 행복한 법이다.”
나이가 들어도 일을 해야 보람이 생기는 법이다. 하여튼 그렇게 내 인연이 된 김찬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이제 남은 것은 괘씸한 막내 처남댁 처가군.’
* * *
일산 백화점 유아와 출산용품점.
백범이 서울로 돌아가자마자 백범의 부친은 일산에 볼일이 있다며 아내에게 말하고 여기로 왔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백화점 점원이 유아와 출산용품점을 둘러보고 있는 백범의 부친에게 공손히 말을 걸며 다가왔다.
“애를 낳을 건데…….”
“며느리님께서 임신하셨나요?”
“그게 아니라, 그렇소.”
아니라고 말하면 자신이 늦둥이를 가졌다고 생각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고 말하는 백범의 부친이었다.
“아, 그러시군요.”
“내가 임산부에게 뭐가 필요한지 잘 모릅니다.”
모두에게 정중한 백범의 부친이었다.
“그럼 고객님,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여기에 있는 것들 다 임산부하고 태어날 아기한테 필요한 거죠?”
“예, 그렇습니다. 고객님. 저희 매장에는 임산부와 태어날 신생아에게 필요한 모든 물품이 갖춰져 있습니다.”
“그래요?”
백범의 부친이 되물었고 점원은 미소로 화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마음에 드시는 제품들이 있으면 골라보세요.”
“그럼 여기에 있는 것들 하나씩 다 주세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예?”
점원은 황당함에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사서 가도 뭐가 마음에 들고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진열된 거 하나씩 다 주세요.”
“혹시 손자신가요? 손녀이신가요?”
대박을 쳤다는 생각이 드는 백화점 점원이었다.
“그것도 잘 모르겠소. 그럼 두 개씩 주시오. 손자가 쓰는 거 하나하고 손녀가 쓰는 것 하나씩 주시오.”
“아……!”
백화점 점원은 입이 쩍 벌어질 뿐이었고 백범의 부친은 태어나서 처음 아니 졸부가 된 후에 처음으로 돈질을 하셨다. 그렇게 한 트럭 가득 출산 및 유아용품을 사서 판교 본가로 돌아왔다.
“이게 다 뭐예요?”
백범의 모친이 입이 쩍 벌어져서 남편에게 물었다.
“사돈댁이 필요할 것 같아서…….”
아내에게 말꼬리를 흐리는 백범의 부친이었다.
“직접 가서 사오셨어요?”
같이 시장에 가자고 해도 가지 않던 자신의 남편이 이렇게 출산용품을 구입해 오니 놀랄 수밖에 없는 백범의 모친이었다.
“십년감수를 했잖아.”
“그렇기는 하죠. 그런데 청담동 처녀 보살이 딸이라고 했어요.”
“그래?”
“남자아이 것은 다 반품해야겠네.”
백범의 모친은 백범의 부친에게 눈을 흘겼다.
“진작 말해 줬어야지.”
“당신께서 이러실 줄 몰랐죠.”
그때 트럭 한 대가 판교 본가로 들어왔다.
“주문하신 출산 및 유아용품 도착했습니다.”
“당신도?”
백범의 부친이 자기 아내에게 물었다.
“사돈댁 총각이랑 아가씨랑 아무것도 없어서 나도 좀 샀어요.”
이래서 부창부수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잘했소, 돈이야 썩어 나는 집이지만 썰렁했는데 잘된 일이야.”
“주인님…….”
그때 김찬 할아버지가 백범의 부친에게 다가와 주인님이라고 불렀고 그 호칭에 백범의 부친이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아, 이런 거였군.”
“주인님…….”
“어르신, 저는 주인님이 아닙니다. 그냥…….”
자신을 뭐라고 부르라고 할지 떠오르지 않는 백범의 부친이었다.
“예?”
“동생이라고 부르십시오. 이제는 한 식구가 됐으니 아우라고 부르십시오.”
“아우님?”
“예, 그리 부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무슨 일을 할까요?”
“예?”
“일해야죠.”
“벌써 저녁인데 무슨 일을 합니까? 쉬세요. 쉬신 후에 내일 저랑 같이 과수원 거름이나 주러 가십시다.”
“밤에도 일해야죠.”
“밤에는 쉬는 겁니다. 하하하!”
“……예.”
항상 일해 왔던 김찬 할아버지이기에 판교 생활이 적응되지 않았다.
* * *
전두성의 사무실.
박태수의 앞에는 중졸 검정고시(檢定考試)를 비롯한 검정고시 책과 문제집들이 놓였다.
“공부해라.”
“예.”
“눈썰미가 좋아서 기회는 잡은 것 같다만 능력을 못 키우면 말짱 꽝이다.”
전두성은 여전히 박태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백범의 지시이기에 박태수가 검정고시를 준비할 수 있는 준비를 해줬다.
“예, 알겠습니다.”
“내가 딱 봐도 너는 공부에 별로 소질이 없어 보인다. 머리가 좋다고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니니까.”
전두성의 말에 박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공부해라. 엉덩이에 고름이 찰 때까지 앉아서 공부하면 안 될 것도 되겠지.”
물론 전두성도 공부에는 소질이 없었다. 만약 전두성이 공부에 소질이 있었다면 사채업자 비슷한 일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예.”
“그나저나 대표님께서는 너를 어디에 쓰려고 그러실까?”
백범의 의도가 다시 궁금해지는 전두성이었다.
“그러게요. 저는 싸움질은 자신이 있는데…….”
“쌈질을 잘해?”
“예.”
박태수가 전두성에게 자신이 있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표님 때문에 앞으로 너는 주먹 쓸 일 없을 것 같다. 아마 머리 쓰고 살아야겠지.”
“예…….”
“그러니 공부해. 천운처럼 잡은 기회 놓치기 싫으면.”
전두성은 박태수를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부장님…….”
“왜 내게 할 말 있어?”
“부장님은 저 싫죠?”
“싫다.”
“왜 제가 싫으십니까?”
박태수의 물음에 전두성이 물끄러미 박태수를 바라봤다.
“사람 싫은 것에 이유가 필요할까?”
“이유 없이 저를 싫어하실 이유도 없잖아요.”
박태수의 말에 전두성이 박태수를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을 보였다.
“너는 나 같거든. 딱 지금의 네가 그 나이 때의 나 같아서 싫다.”
“아…….”
“거둬주신 분 배신하면 그게 개새끼다. 내 말 명심해라.”
“예, 부장님.”
“공부해,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뿐이다.”
전두성이 말한 것처럼 부푼 꿈을 품고 여수에서 백범을 따라 상경한 박태수가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밖에는 없었다.
* * *
강북 아파트 정문 앞.
딩동, 딩동!
이틀 만에 집으로 돌아왔고 아파트에 불이 켜져 있기에 나는 심은혜가 초인종을 누르는 것처럼 나도 초인종을 눌렀다.
‘처음에는!’
자기 집에 들어오면서 왜 초인종을 누르냐는 생각을 했었는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그게 같이 사는 부부간의 예의라는 것을 알게 됐다.
철컥!
문이 열렸고 나를 맞이한 심은혜가 나를 보자마자 내게 와락 안겼고 이 순간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살 냄새의 향기가 나를 자극했다. 그런데 내 품에 안기자마자 내 아내 은혜는 훌쩍였다.
‘왜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우는 것은 처가 내력인 것 같다. 그만큼 여리다는 증거일 것이고 내 여린 아내를 나는 내 심장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지켜주고 싶다.
‘무엇하나 지킬 생각을 하지 않았었는데…….’
내 전생과 이 현생의 차이는 딱 이런 마음가짐이리라.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보고 싶었어요.”
내 아내 심은혜가 내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날 정도였나 보네요. 하하하!”
“맞아요. 너무 보고 싶어서 울었어요.”
뭔가 있다. 그런데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
“오늘은 왜 또 울어요?”
나는 이제 내 아내를 기쁘게 울리는 남자로 변해 있었다.
“병원에서 이야기 다 들었어요.”
“요즘 의사들은 정말 입이 싸군요.”
전달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나다.
“백범 씨, 정말 고마워요. 정말 당신은 나를 매번 감동하게 해요.”
“은혜 씨.”
나는 담담한 눈빛으로 은혜를 불렀다.
“예, 백범 씨.”
“나중에 내가 은혜 씨한테 잘못한 일이 있으면 용서해 주세요.”
“백범 씨가 나한테 잘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아닌 진짜 백범이 총각 때 저질러놓은 일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와 은혜 인생에 끼어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겨도 나는 백범 씨를 사랑할 거예요.”
“그래요?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그럼 우리 지금 당장 사랑할까요?”
이틀이나 못 봤다.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이 그립다. 그리고 그녀의 신음도 듣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예?”
은혜가 되물었고 나는 은혜를 번쩍 안아 침실로 향했고 이틀이나 굶었으니 5연타로 내 아내 은혜를 파김치로 만들어놔야겠다.
‘오늘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쌍코피다. 으흐흐!’
제대로 각오를 다져본다.
* * *
파출부 아주머니 덕에 내 식탁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졌고 식탁 중앙에 장어구이가 놓여 있었다.
‘장어구이?’
식탁에 오른 장어구이는 남편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음식이다.
‘내가 부실한가?’
정력 하나는 타고났는데 여수에서 돌아온 후에 바로 장어구이가 식탁에 떡하니 올랐다.
‘만족하지 못한다는 건가……?’
이미 내 아내 은혜는 남자를 아는 몸이 되어 있었고 처음 부부관계를 맺을 때는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능동적으로 변해 있었다. 물론 그것이 내 취향(?)에 부응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장어구이를 보자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하시죠? 많이 드세요.”
장어구이가 놓인 접시를 내 쪽으로 조심히 밀어주는 은혜였다. 그리고 나를 보며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그 미소가 의도적으로 나를 유혹하는 그런 미소다. 물론 은혜는 지금 내가 좋아하라고 저런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다.
‘분발해야겠어.’
오늘 밤은 정말 내가 쌍코피가 터지는 한이 있어도 은혜를 제대로 떨게(?) 만들고 기절시켜야겠다.
‘장어구이라……!’
이걸 먹고 침대에서 죽어보자는 생각까지 드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