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29화 내 쉴 곳은 그대뿐!
강북 고급 아파트.
집에 도착하니 저녁 9시가 훌쩍 넘었다. 하지만 아파트는 불이 꺼져 있다. 내 아내는 고된 사법연수원생이기에 오늘 저녁도 결국 나 혼자 먹어야 할 것 같다. 주방에서 먹을 것을 찾으니 찬장에 있는 라면 하나가 전부다.
-밥은 먹고 다니는 거니?
그러고 보니 수십만 원짜리 한정식을 시켜 놓고 물만 마시고 나왔다. 은혜와 함께하는 저녁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내 아내 은혜는 당연히 밤낮없이 법률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사법 연수생이라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상태다.
“라면으로 한 끼 때우자.”
졸부라고 해서 매일 진수성찬만 먹는 것은 아니다.
피식 웃음이 나오는 순간이다. 돈을 벌기 위해 협잡질을 하고 다니느라 밥도 못 먹고 다니는 내 꼴이 우습다.
‘미리 파출부를 구해 놓을 것을!’
소소한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 오늘 내가 라면으로 한 끼를 때워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딩동, 딩동!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자기 집인데 초인종을 누르는군.’
내부 인터폰으로 확인하니 내 아내 은혜였다. 인터폰으로 봐도 공부를 하느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자기 집에 들어오면서도!’
초인종을 누르는 내 아내 은혜다.
철컥!
바로 문을 열어 줬고, 무슨 일인지 나를 바라보는 내 아내 은혜의 눈동자는 먹먹해 보인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네?’
저렇게 먹먹한 눈동자는 울보 장모님을 꼭 닮은 것 같다.
‘사법연수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법조계는 권위적이고 그에 따라 자신들이 가진 권위를 이용해 이런저런 못된 짓도 많이 저지르는 곳이고 내 아내 은혜는 꽃처럼 곱다.
‘폐쇄적인 집단은……!’
퇴폐적일 때가 많다는 생각까지 들어서 나도 모르게 걱정되었다. 이 순간, 누구든 내 사람들을 건들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에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은혜에게 물었다.
“백범 씨……!”
내 이름을 부르자마자 은혜의 눈동자에서 또르륵 눈물이 흘렀고, 그 눈물과 함께 내 품에 안겼다.
“은, 은혜 씨…….”
당황스럽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상상이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지나갔고 만약 내가 생각하는 그 안 좋은 생각 중에서 하나라도 현실이 된다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말았다.
‘정말 무슨 일이 있었나?’
걱정이 앞선다. 사실 내 버팀목은 운명처럼 또 필요 때문에 만난 은혜인데 그 버팀목이 쓰러졌을 때 나는 나를 통제하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정말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내가 뭐라고…….”
내 품에 파고든 은혜는 내 품에 안긴 채 계속 고맙다는 말만 했다.
‘휴…….’
안심되는 순간이다. 한마디로 괜히 내가 나만의 상상의 날개를 펼친 것이다.
“뭐가요?”
왜 이러는지 알면서 되물었다. 이제는 내 아내 은혜에게 대범함을 보여줄 때다.
“나 때문에…….”
“그러니까, 뭐가요?”
이런 상황에서 생색을 내면 없어 보인다.
“나 때문에 무릎까지 꿇었다면서요. 왜 그러셨어요?”
이제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그리고 내게 한없이 감격하는 눈빛이다.
‘감동이 이어지는 삶!’
나는 은혜에게 그런 삶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철저히 계산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무릎을 꿇어야 할 때가 있으면 주저 없이 꿇고, 포기해야 할 것이 있다면 포기할 것이다.
‘그림을 크게 그리고 있지만!’
협잡질을 시작하면서 돈도 많은데 꼭 이래야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사실 협잡질은 내 탐욕이 낳은 도구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위대해지는 것과 거대해지는 것은 분명 다르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내가 하는 일은 훗날 나와 은혜의 발목을 분명 잡게 될 것이다.
‘하여튼 장모님 일을 알면 기절하겠군.’
감동을 너무 잘 받는 은혜다. 물론 이런 감동을 하라고 미리 계획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그게 뭐가 대단하다고 사람 놀라게 울어요?”
“백범 씨……!”
“나는 또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괜히 놀랐잖아요. 아무 일도 아닌 것 가지고. 사람 놀라게 하고.”
내 나이 30살에 맞지 않게 살짝 뽀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존심하고 자긍심이 가득한 당신이 나를 위해서 무릎을 꿇었잖아요. 오로지 저 때문에요.”
은혜가 나를 올려봤다.
“당신 때문이면 100번이고 꿇죠.”
나는 오늘 협잡질을 하면서도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었다. 그에 비교한다면 피해자에게 무릎을 꿇었던 것이 오늘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정당하고 올바른 일일 것이다.
“당신은 정말 내 사람이네요.”
내가 했던 행동보다 지금 내가 한 말 때문에 더 감명을 받은 것 같은 은혜다.
“우리 은혜 씨는 장모님을 똑 닮았네.”
“예?”
“울보, 그거 똑 닮았네요.”
나를 올려다보는 은혜를 보며 밝은 미소를 보여 줬고, 오늘 이후 내 아내 은혜는 나를 더욱 존경하게 될 것이다.
* * *
욕실.
쫘아악!
집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진수성찬과 다름없는 라면 한 개를 끓여 은혜와 나눠 먹었다.
‘햇반을 개발해야겠어.’
필요가 개발을 이끌어 내는 법이다. 그리고 내게는 미래의 기억이 있고 충분한 자본도 있다. 그러니 내가 마음을 먹는다면 못 할 것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침실에 들기 전에 샤워했다.
스르륵!
그때 욕실 문이 열렸고, 아무것도 입지 않은 은혜가 살짝 부끄러워하며 들어오더니 샤워하던 나를 살포시 안았다. 이 순간 은혜의 풍만한 가슴이 내 등에 밀착되어 나도 모르게 흥분하고 말았다.
‘누구를 위해서 종은 울리나?’
오늘은 나를 위해서 초인종이 울렸나 보다.
“고마워요, 내 사람……!”
은혜가 내 뒤에서 속삭였고, 그녀와 내 몸이 밀착되어 있어서 그녀의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지금의 행동은 나를 위해서 여자로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혈기왕성한 30대이기에 그저 고마울 뿐이다.
‘그건 그렇고…….’
여기서 하면 또 피임에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여튼 그렇게 우리는 젊은 부부라 욕실에서 같이 거품 샤워를 했고, 새로운 짜릿함을 만끽하는 밤을 보내고 다시 샤워하고 침대에 누웠다. 은혜는 사법연수원 생활이 고단했는지 바로 잠들었다.
‘라면 반쪽 먹고는 힘드네, 하하하!’
내일 일어나자마자 라면을 박스로 사 놔야겠다.
‘내 쉴 곳은 오직 그대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남자의 본능 때문에 나도 모르게 은혜의 가슴 쪽으로 손이 갔고, 내 손끝에 뭉클함과 촉촉한 촉감이 느껴졌다.
“아아아~”
아주 작게 은혜의 신음이 내 귀에 들렸고 은혜가 살짝 눈을 뜨며 나를 봤다.
“괜찮아요.”
이건 또 해도 된다는 소리다. 내가 몇 번이고 해도, 그리고 자신이 아무리 피곤해도 나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허락하겠다는 소리다.
‘공부하느라 피곤하니 재워야지.’
머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몸은 이미 은혜의 몸 위로 올라가 있었고, 그런 나를 은혜가 꼭 안았다.
우린 잘 때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잔다. 그러니 바로 서로를 위해 불태우면 된다.
신혼은 이렇게 뜨겁다.
* * *
1997년 3월 7일 밤 9시, 순천만 인근 방파제.
작은 골방이 답답하다는 말에 백범의 막내 처남인 은철은 선희와 함께 밤 산책을 나왔고, 둘은 평화롭게 방파제 길을 걸었다.
“안 추워?”
바닷바람은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시원해서 좋아.”
금은방 집 막내딸인 선희는 마음이 답답했기에 부는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미안해.”
막내 처남 은철은 어린 선희가 자기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하다고 말했다.
“뭐가?”
“나 때문에 네가 괜히 고생하잖아.”
“고생은 오빠가 하지, 아침 일찍 염전에 나가서 일하잖아. 우리 아빠랑 오빠들 때문에 내가 더 미안해. 힘들지?”
어린 선희가 은철의 손을 꼭 잡았다. 둘은 어리지만 참 어른스럽고 결국 이들의 도피는 하나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도피였다.
“안 힘들어, 적당히 몸 쓰니까 머리도 가벼워지고 잡념도 없어져서 좋아.”
“피, 거짓말. 잘 때 계속 끙끙거리면서…….”
“오빠는~ 괜찮아.”
은철이 은희를 보며 웃어 보였다.
“오빠, 우리 그냥 서울로 올라갈까?”
자기 때문에 은철이 고생을 하는 것을 보는 선희는 부쩍 서울로 올라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사실 여수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으로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정신없이 도망쳤을 때 제일 먼저 보였던 도시였기에 온 거였다.
“여기 생활이 힘들어?”
“내가 힘들 것이 뭐가 있어? 오빠가 힘들어 보여서 그렇지.”
“나는 괜찮아. 그리고 서울로 그냥 올라가면…….”
은철은 선희의 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가 아빠한테 잘 말해 볼게.”
“너, 힘들구나.”
괜히 씁쓸해지는 은철이었다.
“오빠?”
그때 선희가 은철을 불렀다.
“왜?”
“저기 방파제 위에 사람 있어.”
아주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이런 시간에 방파제에 사람이 서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한 선희였다. 하지만 여수에서는 방파제 밤낚시를 하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어? 그러네, 이 시간에 낚시하는 사람이 있네.”
은철도 신기하다는 듯 방파제 위에서 낚시하는 사람을 봤다.
“할아버지다.”
선희가 방파제 위에서 낚시하는 사람이 지적장애가 있는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아보고 은철에게 말했다. 사실 낚시를 하는 할아버지는 이상할 정도로 은철과 선희에게 잘해 줬다. 그리고 선희와 은철은 그런 할아버지와 알고 지낸 후부터 지적장애를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네…….”
“우리, 저기로 가보자.”
선희가 은철의 손을 잡고 방파제 위로 이끌었다.
“할아버지!”
선희가 방파제에서 낚시하는 지적장애 할아버지를 불렀고,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은철과 선희를 봤다. 지적장애 할아버지는 낚시꾼이 버리고 간 낡은 낚싯대를 들고 고기를 잡고 있었고, 그의 옆에는 찌그러진 양동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소대장 동무!”
어둠 속에서도 할아버지는 은철을 보며 하얀 이를 보이며 웃었다. 항상 그렇게 할아버지는 은철을 소대장 동무라고 불렀고 처음에는 그게 이상했는데 젊은 청년을 보면 모두 소대장 동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기에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였다.
“이 밤에 뭐 하세요?”
“바나나 잡고 있어.”
“예?”
분명 낚시하고 있는데 할아버지는 바나나를 잡고 있다고 말했고, 선희는 그런 할아버지가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나나 많이 잡았다. 소대장 동무.”
할아버지는 은철을 보며 환하게 웃었고 은철 옆에 있는 선희를 보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야야, 바나나 많이 잡았다. 하하하!”
할아버지는 선희에게 자랑하듯 말했고 옆에 놔둔 찌그러진 양동이 옆에는 꽤 큰 우럭이 몇 마리 담겨 있었다.
“저 물고기를 바나나라고 하시나 봐.”
선희는 은철만 들을 수 있게 말했고, 은철도 할아버지가 가엽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바나나 많이 잡으셨어요?”
선희가 할아버지에게 맞춰주듯 물었다.
“많이 잡았다. 야야, 바나나 먹고 싶지? 그래서 많이 잡았다.”
할아버지는 선희에게 항상 야야라고 불렀다.
사실 선희는 입덧을 시작하면서 바나나가 먹고 싶었지만, 은철과 가출할 때 가져온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은철에게 아무 말도 못 했다.
따지고 보면 선희는 집에서 막내로 금지옥엽처럼 키워졌고 그래서 고생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란 아가씨였다. 그러니 은철의 육체적인 고생만큼 선희도 정신적인 고생을 이 여수에서 꽤 많이 경험하고 있었지만,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은철 때문에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바나나가 먹고 싶은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할아버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신기한 선희였다.
“야야, 바나나 많이 잡았다. 이제 가자.”
모를 소리만 하는 지적장애 할아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