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25화 결국 협잡(1)
1997년 3월 4일 오후 5시, 북한산 뒤편에 있는 고급 한정식집.
이곳은 과거에는 고급 요정이 즐비했던 곳으로, 그때는 대부분 밀실 정치의 무대로 사용되거나 돈 많은 일본 관광객, 아니, 쪽발이 관광개들에게 기생 관광 서비스를 제공하던 곳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고급 한정식집으로 변했지만 몇몇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의원님, 태양기업 백범 대표입니다.”
태평양법무법인 대표는 투자 파트너십을 체결한 이후 열심히 움직였고, 내 앞에는 야당 중진 의원이 자리하고 있다.
“안녕하십니까? 백범이라고 합니다.”
“나, 권이요.”
국회의원은 야당 대권 주자인 김대준 총재의 최측근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대한민국 5대 법무 법인에 드는 대형 법무 법인의 대표가 자신에게 연락했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구도 동교동이 권력을 잡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여당에 합류한 전직 대법관 출신께서 대쪽 이미지로 지지율을 높이고 있고, 이인* 의원도 출마를 고심하고 있다. 3김 시대의 거두 모두 이번만큼은 자기 차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야권이 분열되어 여당이 정권을 유지할 거란 말이 많았다.
“젊은 사업가께서 이름이 참 좋으시군요.”
이럴 때는 내 이름이 참 이로울 때가 많다.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노력 중입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정치와 경제는 분리될 수 없고, 오히려 하나라 생각한다.
“내 듣기로는 백범 대표는 독립군의 후손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저 이름 없는 의병의 손자입니다.”
내가 독립군의 후손이라고 자랑할 자리는 아니다.
친일 프레임이 묶이면 떳떳할 정치인은 몇 없다.
내 할아버지께서 청산리에서 구식 소총으로 일본군과 혈투를 펼칠 때 꽤 많은 정치인의 부친이나 친척이 학도병 지원 연설을 하고 다녔다. 그러니 어떤 측면에서 내가 국가유공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양날의 검일 때가 존재할 것이다.
‘스스로 더럽다고 생각하는 족속들은?’
깨끗한 존재를 시기하고 배척하는 법이고 나는 충분히 배척받을 위치에 놓여 있다.
‘말로만 훌륭하신 독립운동가!’
그렇게 말로만 나불거리는 것이 대한민국이다.
아는 사람이 있는가?
을사오적의 이름을!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부대신 권중현.
‘배운 적도 없다.’
그래서 이런 대한민국에 사는 것이다.
“겸손하시군요. 김구 선생을 보좌하신 백선우 선생의 손자로 알고 있는데요?”
다시 한번 내 조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아마 그래서 이 자리에 나왔을지도 생각이 든다.
“예, 그렇습니다. 제 조부님이십니다. 하지만 아버님께 들은 이야기로는 제 조부께서는 그저 이름 없는 의병이면 충분하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하여튼 독립군의 후손이라는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때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대의 일도 일어날 것이다.
“백 대표님.”
태평양법무법인 대표께서 나를 불렀다.
“예, 대표님.”
“의원님과 좋은 말씀 나누십시오.”
이 말은 이만 일어나겠다는 소리다. 한마디로 강남 마담뚜처럼 자리만 만들어 주고 떠나겠다는 것이다.
자신은 아직 여당이나 야당, 어느 한쪽을 선택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줄타기하시겠다?’
태평양법무법인 측은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리고 태평양법무법인 대표의 행동을 말릴 이유도 없다.
“벌써 가시게요?”
야당 중진 국회의원도 태평양법무법인 대표에게 물었다.
“백범 대표가 꼭 만나 뵙고 싶다고 하셔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런 시기에 법조계에서 정치계와 밥이라도 먹으면 협잡이라고 난리가 나지 않습니까? 하하하!”
“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러시다면 더는 잡지 않겠습니다.”
정치 인생이 긴 의원답게 태평양법무법인 대표의 의중을 간파했고, 그렇게 태평양법무법인 대표는 특실에서 빠져나갔다.
물론 태평양법무법인 대표는 다른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태평양법무법인 대표께서는 우리가 아직 미덥지 않은 모양입니다.”
솔직하게 김대준 총재는 대선 4수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미더울 수가 없다. 여당의 대권 주자는 여전히 강력하고, 국민의 지지율도 상당히 높다. 물론 그 지지율은 여당에 장악된 언론사의 여론몰이 때문에 조작된 것이 상당하다.
“의원님, 야당 생활이 힘드시죠?”
“허허허, 우리가 언제 여당이었던 적이 있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렇다. 그리고 야당 생활은 항상 힘들고 쪼들린다.
“그러니 이제 바뀔 때도 된 것 같습니다.”
나는 담담한 어투로 말했고, 내 말에 야당 중진 의원이 더 놀란 눈빛으로 나를 봤다.
“백범 대표는 그렇게 생각합니까?”
떠보듯 내게 묻는 야당 중진 의원이다.
“권불십년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여당이 너무 오래 여당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어서 말씀드렸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너무 한쪽에서 정권을 잡고 휘두르면 국민들의 불만이 생기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오, 정말 이번에야말로 정권이 바뀌어야 대한민국에 진정한 봄이 옵니다.”
정치적 봄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서민들은 혹독한 겨울을 견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국회의원과 마주 앉아 외환 위기의 대책을 논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제는 막는다고 해서 막아질 일이 아니니까.
“의원님.”
“예, 말씀하세요. 백범 대표.”
“제가 무례한 행동 한번 하겠습니다.”
“뭐라고요?”
내 뜬금없는 말에 국회의원이 나를 보며 되물었고, 나는 서류 가방에서 노란 봉투를 꺼냈다.
“바른 정치를 위해 사용해 주십시오.”
“아…….”
1억짜리 무기명채권 10장이다.
아마도 저 국회의원과 김대준 총재에게 내가 가장 먼저 야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한 기업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손위 처남을 위해서!’
구차한 변명이다. 하지만 결국 정치권을 이용해서 손위 처남의 무죄를 입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 사업을 위해서라도 이 정치후원금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으음…….”
나는 말꼬리를 흐렸고 국회의원은 신음을 터트렸다.
“제가 이런 무례한 짓을 했다는 것까지 잊어 주십시오.”
“백범 대표.”
묘한 표정으로 나를 다시 부르는 야당 중신 의원이다.
“예, 의원님.”
“보험입니까?”
기업인들은 보통 대선 때가 되면 누가 당선될지 몰라 여당과 야당 양쪽에 정치자금을 제공한다. 그래서 그가 내게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저는 이번에는 꼭 총재께서 당선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요? 그런데 왜 잊어 달라는 겁니까?”
“기억하면 뇌물이지 않습니까?”
내 말에 야당 중진 의원이 나를 빤히 봤다.
“그러니 기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 조부께서 이름 없는 의병이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었지요.”
“이름 없는 의병들과 또 이름 없는 민초들은 한두 푼 모아 독립자금을 마련했습니다. 그저 저는 그런 이름 없는 의병의 손자입니다.”
내 말에 야당 중진 의원의 눈동자가 떨렸다.
‘왜? 국회의원이라도 시켜 주게?’
나를 자기 당에 영입하고 싶은 눈빛이다. 하지만 나는 4년짜리 임시직에는 당장 관심이 없다.
‘왕의 남자면 족하지.’
물론 대권도 5년짜리 임시직이기는 마찬가지다.
“아,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세상에는 절대 기억되지 않는 돈은 없는 법이다.
“과찬이십니다.”
야당이 곧 여당이 된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형님을 피의자로 만든 국회의원을 정치적으로 작살을 낼 것이다.
‘정치권의 정치 공작으로 만들어서!’
거짓 증언을 한 사람들을 양심선언을 시켜 이슈를 만들 계획이다. 그런 행보를 위해서라도 야당 중진 의원을 만나야 했고 만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오늘은 그것을 위한 사전 포석과 내 행보를 원활하게 하려는 조치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내 듣기로는 태양광 발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사실 제 사업 때문에라도 이번에는 총재께서 꼭 당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수 진영은 항상 북한과의 긴장감을 조성하며 국민들에게 표를 강요한다. 그러니 내가 사업을 추진하기에는 진보 쪽이 정권을 잡는 것이 이롭다.
‘문제는?’
주변이 깨끗한 진보 정치인들이 경제적으로 무능할 때가 많다는 것이고, 기업인들의 발목을 잡을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내가 미래의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업 때문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제 생각으로 북한의 핵 포기 이후 대북 지원 사업은 경수로가 아니라 태양광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안전한 원자력발전소도 지원되어야겠지만 북한의 주택마다 태양광 패널을 설치해 자가발전이 가능해진다면 북한 주민의 삶이 향상될 거라 생각합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데 야당 중진 의원은 기발한 생각이라는 눈빛을 보인다.
‘깨끗하지만 무능한 정치인?’
물론 저 야당 중진 의원이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그저 경제적으로 무능하다는 것만 확인했다.
“하하하, 좀 엉뚱하지만 획기적인 발상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