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24화 대찬 여자 심은혜
사법연수원 내부 화단.
사법연수원 내부 구내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끝낸 사법연수원생들이 자판기 커피를 하나씩 뽑아 들고 화단으로 나왔다.
여기서도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처럼 남자는 남자끼리, 있는 집 자식은 있는 집 자식끼리 모여 담소를 나누었다.
은혜는 당연히 개천에서 용이 난 부류에 끼어 있었다. 물론 가끔은 서울대 졸업자 부류에 낄 때도 많았다.
“은혜 씨, 요즘 다이어트 하나 봐?”
은혜는 오늘 본의 아니게 여자 연수생들의 부류에 끼었다. 다섯 명의 여자 중 은혜가 가장 수수하게 입고 있었다. 다른 네 명의 사법연수원생들도 품위를 유지한다는 듯 수수해 보였지만 대부분 명품을 두르고 있었다. 물론 명품을 입는 것이 나쁘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예?”
“얼굴이 요즘 홀쭉해졌네요. 호호호!”
“공부하다 보니 그렇죠, 뭐.”
은혜는 백범 때문에 강제 다이어트(?)를 당하고 있기에 얼굴이 홀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에게 덤벼드는 백범이 떠오르는 은혜였다.
‘하여튼 짐승이셔~’
백범만 생각하면 미소가 머금어지는 은혜였다.
“호호호,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이 나이를 먹도록 계속 공부만 하네요.”
“맞아요, 우린 사법연수원이라는 조롱에 갇힌 새 같아요.”
“은혜 씨, 요즘 강남 뚜쟁이한테 연락 오고 그러지 않아요?”
은혜에게 질문하는 여자의 눈빛이 참 묘했다. 질문하는 여자의 이름은 강소연으로, 무슨 이유에서인지 은혜에게 라이벌 의식이라고 말하고 싶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 은혜 씨 결혼한 것 몰라요?”
그때 조롱 이야기를 하던 사법연수원생이 강소연에게 말했다.
“은혜 씨, 결혼하셨어요?”
놀란 척 되묻는 강소연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을 본 은혜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것 봐라?’
사실 은혜는 예전부터 강소연이 자신에게 경쟁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 급하게 했어요. 시댁에서 급하다고 하셔서 하게 됐네요.”
“은혜 씨, 청첩장도 안 보내고 서운해진다.”
사법연수원 동기라면 엄청난 인맥이지만 은혜는 그중에서도 백범에게 필요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만 청첩장을 보냈다. 그리고 진심으로 자신과 친하고, 개천에서 용이 난 사람들에게만 청첩장을 보냈다.
“죄송해요, 너무 급해서 실수가 많았네요. 그냥 조촐하게 결혼식만 했어요.”
결혼은 했지만 신혼여행도 못 갔다.
“듣기로는 아니던데? 강동우 대법관님이 주례를 서 주셨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주례는 대법관님이 해주시기는 했어요.”
은혜는 이럴 줄 알았다는 눈빛을 보였고, 주변 여자 사법연수원생들은 은혜와 강수연이 제대로 한번 붙었다는 눈빛을 보였다.
“강동우 대법관님도 서울대 출신이시죠?”
뜬금없이 인맥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이다. 그리고 은혜는 이 자리에 괜히 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아시면서 물으시네요.”
그저 담담하게 대답하는 은혜다.
“아, 서울대 인맥이 벌써 시작되는구나. 이래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판검사는 정해져 있다는 말을 하는 거구나.”
강소연이 묘한 뉘앙스로 말했다.
“꼭 그런 것은 아니고요.”
“참, 듣기로는 엄청난 부자라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 모양이네요.”
은혜가 결혼하는지도 몰랐다는 듯 물었던 강소연이 은근슬쩍 백범에 대해 말했다.
‘내 인맥에 돈이 붙었다고 까려고 이러나?’
괜히 괘씸해지는 은혜였다.
“소문에는 거의 땅으로 졸부가 된 분의 아들이라고?”
강소연의 선공이 시작되었다.
“신랑분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던데 모르셨어요?”
“무슨 소문이요?”
“호호호, 내가 들은 소문을 전해도 되려나 모르겠네요.”
“말씀해 보세요. 말씀하고 싶으셔서 빙빙 돌려 여기까지 오신 것 같은데.”
“뭐라고요?”
“저도 저희 신랑 소문이 궁금해서요.”
“나도 들은 이야기인데, 여자들과 스캔들이 엄청나다네요. 뭐, 소문은 항상 부풀려지는 거니까, 너무 크게 신경 쓰지는 마시고요.”
제대로 시작하는 강소연이었다.
“아, 그렇구나. 우리 신랑이 그렇게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네요. 사실 키도 크고 잘생기기도 했고 재력도 엄청나니 그럴 수밖에 없죠.”
“신경이 안 쓰이세요.”
“그런 문제를 신경 써야 하나요? 결혼 전 일인데 과거 없는 여자 없듯이 과거 없는 남자도 없잖아요.”
“은혜 씨, 보기보다 정말 대범하시네요.”
“소연 씨는 제가 결혼한 지 모르시시더니 그런 이야기는 들으셨네요? 소연 씨도 강남 사모님들한테 연락 좀 오나요?”
은혜의 반격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예?”
“연락 너무 기다리지 마세요. 아무한테나 연락하고 그러는 분들 아니거든요.”
“뭐라고요?”
여자가 은혜를 흘겨봤다.
“은혜야.”
그때 법조계 집안 출신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이 모인 쪽에서 은혜를 불렀다.
“저는 이만 가봐야겠네요. 저를 부르신 분 아시죠? 한성법무법인 대표님 자제분인데, 제가 소개해 드릴까요? 연수원 수료하고 변호사 개업하셔야 하잖아요.”
너는 연수원 성적이 안 되니 변호사나 개업하라고 돌려 말한 것이다.
“…….”
강수연은 그저 은혜를 흘겨볼 뿐이다.
“말씀 나누세요. 참, 소연 씨, 대법관님께서 제 주례를 서 주신 것은 소연 씨와 저의 차이를 말해 주는 겁니다. 모르실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은혜 씨, 무례하시네요.”
“무례라는 단어의 뜻은 아시나요? 저는 이만.”
은혜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한성법무법인 아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별꼴이야 정말!”
강소연은 그저 은혜의 뒷모습을 보고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 * *
“왜 자격지심밖에 없는 애들 사이에 끼어 있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모두 동등한 입장은 아니라고 말하는 장구현이었다. 그는 한성법무법인 대표의 아들로, 한성법무법인은 대한민국 10대 법무 법인에 포함된 중견 법무 법인이다. 열 손가락에 꼽히지만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법무 법인이었다.
“나도 따지고 보면 저쪽이잖아.”
장구현은 서울대 재학 때부터 은혜와 알고 지내던 사이지만 그렇다고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백범과 결혼한 이후부터 친한 척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사법연수원은 정글이었다.
“너도 저쪽?”
“응, 법조계에도 분명히 선이 그어져 있잖아.”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은혜였다.
“은혜, 너는 네 힘으로 당당히 그 선을 넘어섰잖아.”
“내가 결혼을 잘한 모양이네.”
이래서 돈이 좋다는 생각이 드는 은혜였고, 그래서 씁쓸해졌다.
“그리고 은혜야.”
“응, 선배.”
“연수원 끝나면 어느 쪽으로 움직일 생각이야?”
“어느 쪽?”
“대형법무법인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많이 오잖아. 저번에는 백영기 선배도 왔었고.”
은혜는 판사가 되고 싶지만 은혜의 사정을 잘 아는 선배들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선배, 나는 판사가 되고 싶어.”
“아직 미련을 못 버린 거야?”
포기할 것은 포기하라고 말하는 투로 말하는 장구현이었다.
“정말 미련일까?”
“내가 이런 말을 하기는 좀 미안하지만 네 오빠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기에 판사임용은 어려울 거야. 그러니 우리 아버지 법무법인으로 와.”
-내 후배 은혜의 결혼식 주례를 강동우 대법관이 맡았다. 강 대법관은 대법원장까지 가실 분이고 은혜가 우리 한성에 온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구나.
장구현은 자기 아버지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스카우트 제안이다.
“그렇지.”
“연좌제가 철폐되었다고는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너도 잘 알잖아. 그러니 우리 아버지 법무법인도 한번 생각해 봐라.”
“대법관님 때문에?”
은혜는 장구현을 빤히 보며 물었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대법원장까지 가능하신 분이시고 검사, 변호사 위에 호령하시는 분이 또 판사님이시니까. 아버지께선 그런 분이 너의 결혼식에 주례까지 서주셨으니 앞으로도 신경 써 주실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선배 아버지께서는 대법관님을 잘 모르세요.”
“과연 그럴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다르다. 복잡 미묘할 때,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을 때, 그런 판결을 해야 할 때 네가 변호사로 있는 사건이 있을 때는 팔은 안으로 굽어지겠지. 그게 인맥이고 학연이다.”
“선배, 그러니 더더욱 나는 변호사가 아닌 판사가 되어야 해. 그래야 주례를 서주신 대법관님께 누가 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내게는 아직 시간이 많이 있어.”
사법연수원 기간은 2년이다. 그리고 은혜는 이제 막 사법연수원생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내 남편을 믿어.’
오빠의 재심청구 준비를 하고 있단 말까지는 꺼낼 필요가 없다는 걸 잘 아는 은혜였다.
“은혜야, 나도 네가 판사가 됐으면 좋겠어. 하지만 다른 길도 열려 있으니까, 정말 나중에 어쩔 수 없게 되면 우리도 생각해 보라는 말이야.”
“고마워, 선배. 그렇게 되면 오늘 선배가 한 말을 잊지 않을게.”
장구현에게 미소를 보이는 은혜고 이것이 바로 은혜 나름의 처세술이었다.
“그 말 꼭 기억한다.”
장구현도 은혜를 보며 미소를 보였다.
“대표님께 고맙다고 꼭 말씀을 드려.”
또 하나의 인맥을 만드는 은혜였고 이 인맥은 당연히 백범에게도 도움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