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22화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2)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에는 자원이 없고, 자본이 없으니 경제를 살리려면 남아도는 노동력을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산업수출은행의 도움 아래 많은 기업이 수출을 위해 밤낮으로 공장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 기업들이 은행장님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아부에 가까운 발언에 은행장은 흡족한 눈빛을 보였다.
“허허허, 허허허!”
그저 밝은 표정으로 웃기만 하는 산업수출은행 은행장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은행장님.”
“말씀하세요. 백 대표.”
“그렇게 각고의 노력으로 벌어들인 달러가 결국 원유와 기타 에너지를 수입하기 위해 60퍼센트 이상이 다시 해외로 빠져나갑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아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런 측면도 있지요.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니 어쩔 수 없기도 하고요.”
“그렇기도 합니다. 가정에서 쓰는 전기나 기름만으로도 막대한 달러가 다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산업용으로 쓰이는 전기를 생산하는 것도 부족한 실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 가정에서 자체 태양광 발전을 해 전기 사용을 최소화한다면 그것이 바로 수출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도 하겠군요.”
“그래서 저는 미국 태양광 패널 생산 기업으로부터 대량의 태양광 패널을 수입해서 각 가정에 보급하고자 합니다.”
“으음…….”
내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산업수출은행 은행장이다.
“백 대표가 추진하는 사업이 이루어진다면 가정용으로 사용되는 전기의 소비가 확실히 줄어들겠군요.”
산업수출은행 은행장은 내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전기 생산에 필요한 원유나 기타 에너지 수입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에너지 수출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미국 태양광 패널 생산 기업에서는 설치 기술과 태양광 패널 생산 원천 기술도 이전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대량 수입을 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들과 거래할 달러가 필요합니다. 원천 기술을 확보하고 자체 생산이 가능하다면 국내에서 태양광 패널을 생산해 수출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수출로 말을 끝내야 한다. 그리고 내가 태양광 패널을 대량으로 수입하는 목적이 태양광 패널 생산 기술을 확보하려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하하하, 백 대표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좋은 일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현재 태양기업은 산업수출은행에 600억을 예치했습니다. 그 돈을 전부 달러로 환전하기를 희망합니다. 미국 기업에서 태양광 패널을 대량으로 수입하면 태양광 패널 생산 기술을 이전해 주기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600억이라?”
밝은 표정이었던 산업수출은행 은행장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왜 그러십니까? 은행장님, 혹시 산업수출은행에서 달러 수급에 문제가 있습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환전 규모가 상당해서 조금 놀랐습니다.”
“예치된 600억이 하루 만에 달러로 환전되어 인출된다면 산업수출은행에서는 아무런 이익이 없겠죠.”
내 말에 젊은 친구가 말귀를 제대로 알아먹는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는 산업수출은행 은행장이다.
‘보통 이럴 때는!’
꺾기를 한다.
대출을 받을 때도 그렇고 수입을 위해 달러를 환전할 때도 관행인 꺾기를 강요당할 수밖에 없다.
‘오늘 원 달러 환율이…….’
1달러에 798원이다. 현 정부는 여전히 환율 방어에 목매고 있었다.
‘1달러에 798원이면?’
12월 27일이 되면 대략 1,962원이 되니 2.7배쯤 불어나고, 그때까지 쓰일 모든 비용을 제외해도 2배 이상의 단기 이익을 거둔다.
이것이 최소한의 수익이고, 외환 위기에 봉착한 기업이나 그룹에 달러 계좌를 넘기면 3배 이상의 수익을 올리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미국 태양광 패널 생산 기업과 맺은 수출 계약서에는 1997년 12월 28일에 계약된 물량 및 태양광 패널 생산 원천 기술을 모두 이전하고, 1997년 12월 30일에 달러를 송금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요?”
1997년 12월 26일에 미국의 일방적인 계약 파기로 모든 계약이 백지화됐다고 말하면 확보된 달러의 막대한 환차익을 그대로 누릴 수 있다.
‘그런 후에!’
금과 풋옵션에 투자한다.
‘단기적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겠지.’
하여튼 IMF가 닥치고 가난한 대한민국 국민은 나라를 구하겠다고 이름 없는 의병처럼 장롱에 숨긴 금붙이를 꺼내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한다. 그때부터 가진 자들의 추악함이 표출된다.
세계로 수출될 줄 알았던 금은 서류상으로만 수출되며 가진 자들의 부를 더욱 증식시켰다. 물론 그렇게 모인 금이 IMF 구제금융 조기 상환에 도움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분명 가진 자들의 비열함이 그들의 배를 채웠던 시기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주식 선물 옵션에도 투자할 예정이다. 종합지수가 300포인트까지 하락하고,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지 1년 후 다시 900포인트까지 돌파한다. 그런 상태에서 누가 이득을 챙겼을까?
당연히 외국 투자자들과 검은 머리 외국인들이다.
나라가 부도가 날 것을 걱정해야 할 때 매국노처럼 돈 벌 궁리만 하고 있으니 지하에 계실 조부께서 피눈물을 흘리시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저 혼자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일제강점기에 민족반역자들은 나와 똑같은 소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 내게 다른 점은 한 번의 시련 이후 다시는 침략 자본이 대한민국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 거라는 것이다.
“예,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태양기업은 환전된 달러를 산업수출은행에 그대로 예치할 계획입니다. 은행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백범 대표, 그렇다면 12월에 달러로 환전해도 되지 않습니까?”
당연한 질문을 하고 있고 이것은 기름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보 사태가 터진 상태에서 여전히 은행장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증거다.
“예, 그래도 되지만 저희 같은 소기업은 환율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대량 구매 계약이 체결되어서 갑작스럽게 환율이 상승해 버리면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 그렇군요.”
내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산업수출은행 은행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가 외환시장에 주도적으로 개입하고 있기에 거의 고정 환율에 가까운 지금이 환전할 적기라고 생각합니다. 거기다가 미국은 우리 정부가 환율 시장 개입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기도 합니다.”
이미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산업수출은행 은행장과 독대했다는 것만으로도 600억을 달러를 환전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이상을 원하고, 산업수출은행 은행장 역시 내게 그 이상을 내주는 대신 무엇인가를 바라기에 이러는 것이다.
‘낚였다.’
미소가 머금어지는 순간이다. 이제부터 산업수출은행 은행장은 내 호구가 되는 것이다.
‘남은 것은 올가미지.’
뇌물이 올가미의 역할을 제대로 해줄 것이고, 이것은 한보그룹 회장이 했던 짓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 비서님, 책 한 권 구매해 오세요.
-어떤 책을 구매해 올까요, 대표님?
-김 비서님께서는 어떤 소설을 감명 깊게 읽으셨습니까? 나는 이왕이면 두꺼운 책이 좋습니다.
-예?
가끔 내가 뜬금없는 물음을 할 때마다 김 비서는 당황해서 되묻는다. 사실 그에게 나 같은 존재는 낮도깨비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궁금해서요. 저는 소설책도 읽어 본 적이 없어서요, 그냥 수면제더라고요.
-저는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이 정말 인상이 깊었습니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책 제목이 마음에 드는군요. 그 책으로 구매해 오시면 될 것 같군요.
-예, 알겠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종은 울리나?
소설책의 책갈피를 무엇으로 쓰느냐에 따라 앞으로는 나를 위해서 종이 울리게 될 것이다.
‘이걸 꼭 써야 할까?’
만약 이 소설책을 내가 끝내 쓰게 되면 내 첫 번째 불법이 될 것이다. 그래서 준비를 해놓기는 했지만 쓰고 싶지는 않다.
* * *
오동철이 입원한 병원 1인실.
심은혜는 점심시간에 피해자인 오동철을 찾아갔다. 백범은 시간이 없어서 심은혜에게 합의했다고 아직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것은 심은혜가 사법연수원 일정이 빡빡했기 때문이었다.
“예? 벌써 합의했다고요?”
오동철의 말을 듣고 심은혜는 깜짝 놀랐다.
“말씀 놓으세요, 누나.”
오동철과 심은혜는 어릴 적부터 봤던 사이다. 오동철과 심은석이 친구였기에 자주 볼 수밖에 없었고, 어릴 적 오동철은 심은혜에게 마음이 있었지만 예쁘고 공부까지 잘하는 누나이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심은혜는 이제야 자신이 판사로 임용되는 한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이 오셔서 제게 무릎까지 꿇으셨습니다.”
“아…….”
“정말 저도 놀랐다니까요. 그 자식을 용서할 수 없으면 누나를 위해서라도 용서해 주면 안 되겠냐고 하셔서 고소를 취하했어요.”
“아, 그렇군요.”
“형님은 정말 멋진 분이세요. 듣기로는 돈만 많은 졸부라고 그랬는데, 만나니까 소문은 소문일 뿐, 사실이 아니더라고요. 그 자식 대신에 진심 어린 사죄를 해주셨고, 합의를 끝낸 후에 보상금까지 주셨어요.”
오동철의 말에 심은혜의 눈동자가 먹먹해졌다.
‘정말, 내 사람…….’
부부라고는 하지만 심은혜는 백범이 한없이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누나…….”
“말씀하세요.”
“은석이가 형님한테 엄청나게 맞은 것 같아요.”
-은혜 씨, 내가 둘째 처남 사람 구실 할 수 있게 매를 좀 들 겁니다.
그제 백범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오르는 심은혜였다.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할 수는 없지만 둘째 처남에게는 극단적인 방법이 필요할 것 같네요.
“은석이, 그 녀석은 매형한테 맞아도 싸요.”
“형님이 그랬는데, 은석이가 이제 술도 끊고 사람이 될 거라고 약속했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알코올 중독이 완치되면 빵집을 할 거라고 말했답니다.”
“빵집?”
갑자기 빵집 이야기가 나오지 되물을 수밖에 없는 심은혜였다.
“형님한테 우리 지수랑 같이하고 싶다고 말했답니다.”
“아, 그렇군요.”
심은혜는 아무 말 없이 오동철의 병원 수발을 들던 오지수가 떠올랐다.
“사실 은석이 놈이 술만 끊으면 괜찮은 녀석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너무 고마워요.”
“하하하, 말씀 놓으시라니까요, 누나.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저 옛날에 누나 엄청나게 좋아했어요.
오동철이 심은혜를 빤히 봤다.
“으응……?”
“그랬다고요.”
“그랬어?”
“예, 하여튼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릴 처지는 아니지만, 형님을 위해서라도 정말 훌륭한 판사님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그래야겠네.”
심은혜는 이 순간 백범에게 한없이 고맙고 또 미안했다.
* * *
산업수출은행 은행장 집무실.
“은행장님, 산업수출은행의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은행에서는 달러 보유액도 늘어납니다.”
7개월 이상 예치해 놓는 것이다. 그러니 산업수출은행의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다. 거기다가 산업수출은행의 설립 목적이 중소기업의 수출입을 돕는 것이기에 이번 일은 실적이라면 실적이다.
“허허허, 그렇기는 합니다. 말씀하신 600억을 달러로 환전해 드리고 달러로 예치를 받겠습니다.”
한고비를 넘기는 순간이다. 여기까지가 10억의 효과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은행장님, 그리고 태양기업은 회사 운영을 위해 달러로 예치된 계좌를 담보로 대출을 받고자 합니다.”
이제는 전과 확대다. 사실 지금부터가 위험한 도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600억도…….’
IMF가 터지면 1500억이라는 거금으로 불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돈은 IMF의 요구대로 적대적 인수 합병에 쓰일 것이고, 나는 알짜 기업을 차지할 것이다.
물론 1500억 정도로는 정말 큰 먹잇감은 차지할 수 없겠지만 재계에 내 이름을 알리기는 충분할 것이다.
“백범 대표, 예금 담보 대출이라고 하셨습니까?”
의뢰라는 표정으로 내게 되묻는 산업수출은행 은행장이다.
“예, 그렇습니다. 현 정부의 에너지 기획 담당 고위직과 접촉하려고 합니다. 정부가 추진하는 에너지 절감 사업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나다.
“은행장님의 도움이 있으면 담당 공무원과 접촉했을 때 정부 지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부 추진 사업으로 채택되고 실행되면 가정용 에너지로 유출되는 달러를 감소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미래나 지금이나 나랏돈은 눈먼 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물론 나도 그중 한 사람이고, 또 산업수출은행 은행장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정부 시책 사업으로 추진하겠다는 말씀이군요.”
엄청난 감언이설로 은행장을 현혹하고 있는 중이다.
“예,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해외로 빠져나가는 달러를 아끼는 것이 엄청난 애국이지 않습니까?”
이럴 때는 젊은 사업가의 패기를 담은 미소를 보이면 된다.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대출 규모는 얼마쯤 생각하시오?”
“600억입니다.”
예금된 금액을 100% 대출받겠다는 만용을 부리고 있는 나다.
“600억 규모의 달러를 예치하고 600억을 대출받는다?”
“제가 자발적으로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습니다.”
말이라는 것이 이래서 ‘어’ 다르고 ‘아’ 다른 것이다.
산업수출은행 은행장만 들을 수 있게 나직이 말했고, 잠시 나를 뚫어지라 보더니 표정이 밝아졌다.
“허허허, 허허허!”
자발적인 꺾기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사람 좋게 웃는 산업수출은행 은행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