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8화 첫 투자에 착수하다(2)
1997년 2월 28일, 강북 고급 아파트 안방.
은혜의 부드러운 살결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원래 신혼부부들은 대부분 옷을 입지 않고 잔다.
그도 그럴 것이 눈만 마주치면 할 때니까.
그래서 잘 때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자니 이렇게 깨어날 때도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깨어날 때가 많다.
“예뻐…….”
자는 모습이 참 예쁘다. 물론 몸매는 더 예쁘다. 이런 생각을 하니 또 발동이 걸렸다. 건강한 남자라서 아침에 일어날 때 텐트를 친다. 그러니 세울 필요도 없다. 그래서 나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은혜에게 달라붙어 그녀의 가슴을 조심히 탐했고, 여전히 잠에 취해 있는 은혜는 꿈꾸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에 올라탔고, 그제야 은혜가 살포시 눈을 떴다.
“또……?”
“안 될까요?”
우리는 서로에게 존댓말을 쓰기로 했다. 그리고 존댓말이 가장 어색할 때가 이럴 때다.
“……돼요.”
허락이 떨어졌고, 이제는 탐닉의 시간이다. 그렇게 30분이 넘게 탐닉의 시간이 흘렀고 갑작스러운 부부 관계라 마지막 절정의 순간에 콘돔을 착용하지 못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을 떠올렸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후였다.
“혹시…….”
처음으로 나를 흘겨보는 은혜다.
“미안해요, 자다 깨서…….”
피임을 못 했다.
“……괜찮아요.”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꼭 안고 웃어 주는 은혜다.
‘너를 위해서라도!’
나는 제대로 멋진 남자로 살 것이다.
* * *
주방.
은혜는 속옷 위로 앞치마만 걸치고 나를 위해 요리하고 있고, 나는 식탁에 앉아 호시탐탐 또 기회만 노리며 미리 주머니에 넣어 둔 콘돔을 만지작거렸다.
‘내 로망이지.’
은혜가 저러고 요리하는 것은 내가 부탁했기 때문이다.
“된장찌개 끓고 있어서 위험한 거 알죠?”
내가 무엇을 계획하는지 알고 있기에 경고하는 은혜다.
“압니다, 알아요.”
“우리 낭군님은 짐승이신 거 아시죠?”
회귀한 후 이 몸뚱이에 감사하는 것은 딱 하나다.
엄청난 정력!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는 것이다.
하여튼 나는 이 몸뚱이의 정력에 만족하고, 은혜는 대만족해지고 있다. 물론 처음에는 아프다고 울었지만 말이다.
‘버진…….’
하늘이 나를 보우하시는 모양이다. 사실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 아내 은혜가 정말 고마울 뿐이고, 이래서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자였다.
“은혜 씨, 나는 아침 먹고…….”
“아침 먹고는 돼요. 그래도 오늘이 삼일절이라 우리 낭군님이랑 오전까지는 놀아 드릴 수 있겠네요.”
나보다 더 바쁜 사람이 사법연수원생인 은혜다.
“그게 아니라 아침 먹고 본가 좀 다녀올게요. 그런 후에 구치소에 가서 둘째 처남 좀 만날 생각입니다.”
“저도 같이 가요.”
“시댁에 자주 가면 좋을 것 없어요. 구치소는 저 혼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그래야 험한 말도 좀 하고, 혼도 좀 내고 그러죠.”
“저를 나쁜 며느리 만들 생각이세요?”
“은혜 씨는 참 좋은 며느리입니다.”
사실 어머니는 신혼집에 오고 싶으셔서 안달이 났지만 아버지께서 엄금하셨기에 못 오셨다.
“제가요?”
“제가 은혜 씨 덕분에 개과천선을 했잖습니까, 하하하!”
“그건 저 만나기 전부터 하셨잖아요.”
“부모님이 아시는 것은 제가 바보온달이고, 은혜 씨가 평강공주라는 사실입니다. 부모님을 실망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아침 먹고 저랑 조금만 놀아 주시고, 공부하세요. 그러다가 연수원 1등으로 수료 못 하면 제 마음이 아픕니다.”
서울대 법학과 입학, 사법시험 1차 시험, 사법시험 2차 시험을 모두 수석으로 합격했고, 사법시험은 재학 중에 통과했다.
이제 내 아내 은혜에게는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수료하는 것만 남았다. 하지만 나 때문에, 또 결혼식 일정 때문에 그게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천재들이 모인 곳이다.’
하여튼 나 때문에 너무 시간을 많이 빼앗기고 있는 은혜다.
“제가 1등을 하길 바라세요?”
“제가 못 해본 것이거든요.”
“공부를 정말 못 하셨어요?”
“제가 꼴등이었습니다.”
“그것도 1등이라면 1등이죠, 뒤에서 1등, 호호호!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큐는 저 닮고 지혜는 우리 낭군님 닮았으면 좋겠네요.”
은혜의 아이큐가 154란다. 그래서 멘사 회원이란다. 하여튼 머리 좋은 것 하나는 타고났고, 그 머리 좋은 것에 공부를 해야 할 이유까지 확실하고 노력까지 더했으니 지금까지 1등만 했던 은혜다.
‘아이가 생기면 머리는 꼭 엄마 닮았으면 좋겠다.’
내가 결단력 있고 거기다가 미래의 기억까지 가지고 있지만 아이큐는 120 정도밖에 안 된다. 물론 120도 높은 거라면 높은 거지만 154보다는 확실히 낮은 수준이니 우리의 2세가 태어나면 머리는 엄마 닮았으면 좋겠다.
‘물론 성격도 외모도…….’
딸이면 엄마 닮았으면 좋겠다.
* * *
판교 본가 안방.
“새아기도 데려오지…….”
어머니가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말씀하셨다. 어머니께서는 며느리가 보고 싶은 것이고 아버지도 말씀은 안 하시지만 나보다 며느리가 더 보고 싶은 눈빛이시다.
“판사 후보 며느리는 요즘 바쁠 수밖에 없습니다. 사법연수원만 수료하면 지금보다는 시간적 여유가 생길 거니까, 그때는 자주자주 데려오겠습니다.”
“판사 며느리 안 쉽네…….”
어머니께서 힐끗 아버지의 눈치를 보셨다.
“판사 며느님한테 전화할 생각은 추호도 마! 공부한다잖아, 공부!”
“아들 공부는 신경도 안 쓰신 양반께서 며느리 공부를 신경 쓰시네요.”
어머니가 아버지께 눈을 흘겼다.
“범이야 공부에 취미가 없었지.”
괜히 불똥이 내게 튈 것 같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공부에는 담을 쌓고 살았던 백범이다. 사실 아버지께서 신도시 개발 때문에 졸부가 되기 전까지 어린 백범은 아버지를 꼭 닮은 구석이 많았고 그 어린 나이에도 군말 없이 똥지게를 지며 아버지의 농사를 돕던 그런 소년이었다. 그런데 졸부가 된 후에 달라졌고 돈이 생기니 달라붙는 똥파리가 많아지면서 변해 버렸다.
“며느리가 머리가 좋으면 손자 손녀도 당연히 머리가 좋을 거잖아.”
이건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내게 큰 기대를 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처럼 들렸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임자, 더 더워지기 전에 동치미 김치말이 국수나 먹자고.”
분명한 것은 어머니께서는 김치 명인이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여전히 소박하게 사신다.
‘저리 소박하신 분이 어떻게…….’
강남 마담뚜한테 1억을 던질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다.
“알았네요. 귀한 며느리님한테 김치 만드는 법도 알려 줘야 하는데…….”
어머니께서는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하셨다. 분명한 것은 어머니도 내 아내 은혜를 애지중지 여기고, 보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다.
“무슨 일로 왔어?”
“입금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300억을 주신다고는 하셨지만 진짜 300억을 바로 입금하실 줄은 또 꿈에도 몰랐다.
“참 빨리도 확인한다. 그제 여기 은행 지점장이 벌벌 떨더라.”
300억이 단번에 인출됐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 그 지점장은 본사에서 엄청나게 문책을 당했을 확률이 높다.
“그러겠죠, 이거 드리려고 왔습니다.”
나는 조심히 아버지께 차용증을 내밀었다.
“차용증이네?”
“예, 안사람 말로는 증여세가 45%라고 하네요.”
물론 나도 아는 사실이다. 결혼한 지 일주일밖에는 안 됐지만 내 말보다 은혜의 말과 생각이 더 잘 먹히는 우리 집이다.
물론 증여세라는 것이 증여를 해준 사람이 내는 세금이지만 아버지의 돈이 곧 내 돈이니 이런 편법을 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겠다고?”
아버지께서 나를 흘겨보셨다.
‘반응이 의외네.’
이런 말씀을 하실 줄은 생각도 못 하고 왔다.
“저는 아버지께 투자를 제안했지, 증여를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이 방법이 싫으시다면 아버지의 명의로 회사를 설립할까 합니다.”
사실 졸부 집 아들인 내가 이런 말을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재벌들이 상속세를 편법으로 탈세하는 것은 상속 및 증여세의 비율이 최고 45%기 때문일 것이다.
‘증여세를 똑바로 내면…….’
그룹 경영권 자체가 위태로울 때가 많다. 물론 그것 역시 재벌의 구차한 변명이다.
“나는 너한테 300억 증여했고, 통장에 보니 400억 정도가 있으니 증여세를 낸 후에 네 말대로 판교 땅을 살 생각이다.”
아버지께서 돈에 초연하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나도 몰랐다.
“진짜 증여세를 내실 겁니까?”
“할아버지 얼굴에 먹칠할 생각은 마라.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
내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만큼 아버지께서도 자신의 아버지를 존경하고 계셨다.
‘배우셨다면?’
배울 기회가 있었다면 아버지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 되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못 배우셔서 농사만 짓고 살다 보상금을 두 번이나 받아 졸부가 되셨지만 말이다.
“운이 좋아서 보상금을 두 번이나 받아서 세다가는 죽어도 다 못 셀 정도로 부자가 됐지만 그건 잠시 우리한테 맡긴 돈이다. 하여튼 나라에서 받은 돈이니 세금이라도 잘 내야지.”
아버지는 이런 분이시다.
이런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나는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것이다. 물론 그 부끄러움에 내가 가진 야망을 축소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가질 수 있는 것을 모두 가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는 이제 진짜의 내가 아니라 백범이니까.’
다시 각오를 다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