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5화 멋진 여자를 만나다(3)
“그 말씀은 앞으로는 달라진다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평생을 개망나니로 살 수는 없으니까요. 파락호 생활도 이미 정리를 끝냈습니다.”
물론 번갯불에 콩을 볶아 먹듯 맞선자리에 나왔기에 정리가 되지 못한 부분이 더 많다.
그리고 여자 부분에 대해서는 아예 정리를 하지 않았다. 내가 이 자리에 나오기 전에 한 일은 핸드폰 번호를 바꾸는 것이 전부라면 전부다.
‘진실하게 사귄 여자도 없으니까.’
내가 연락을 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백범 씨가 이렇게 브리핑을 해주셔서 저도 저에 대한 브리핑을 드려야겠네요.”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공평해야죠.”
“그럼 듣겠습니다.”
차분한 자세로 그녀를 바라봤다.
‘착하고 진솔하게 사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군.’
충분한 돈이 있으니 못된 짓을 하며 악착같이 살 이유는 없다.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살아볼 참이다.
“저는 어릴 적부터 공부를 참 잘했어요. 아니, 공부를 잘해야 했어요. 평범한 가정이라고 들으셨겠지만, 우리 집은 정말 가난해요.”
이미 예상한 일이다.
가난한 집 애들은 빨리 철든다.
물론 가난한 것을 비관하고 비뚤어지는 애들도 많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과거의 백범 씨 같은 오빠가 한 분 있고, 다른 점이 있다면 의협심이 남다르기는 하죠. 그리고 더 심한 남동생이 둘이나 있어요. 오빠는 폭행으로 교도소에 있고요, 첫째 남동생은 어제 구치소로 이감됐어요. 합의를 못 하면 교도소에 갈 것 같아요.”
이보다 솔직하게 브리핑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마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오빠가 부끄럽지는 않나 보군…….’
오빠를 설명할 때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심은혜에게 오빠는 부끄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면 가족과의 정이 없기에 이런 말을 쉽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
“놀라셨죠?”
사법연수원생이 이런 자리에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것 때문인 것 같다.
‘목표가 판사인가?’
심은혜는 현재 사법연수원생이다. 판사로 임용되기 위해서는 혈족들이 깨끗해야 하고, 최소한 현재 교도소 수감자는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좌제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대한민국이니까.
판사 임용에서 주변인도 임용에 고려될 것이다.
“너무 솔직하셔서 조금은 놀랐습니다.”
“막내는 이제 22살인데, 어린 아가씨를 임신시켜서 살 집이 필요하고요. 여기까지는 제가 맞선 자리에 나와야 할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살짝 말꼬리를 흐리는 심은혜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생이 되니 1억의 신용 대출이 나왔는데, 오빠와 두 남동생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니 마이너스 통장의 마이너스가 1억이네요. 게다가 어머니가 많이 아프세요.”
“효녀시군요.”
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300섬에 인당수에 몸을 던진 것처럼 심은혜는 맞선으로 자기를 팔려고 이런 자리에 나온 것이다.
‘심 씨네.’
한마디로 심청전 현대 버전이라고 하면 딱 맞을 것 같다.
“거기다가 어머니 병원비가 필요해 지인에게 돈을 많이 빌렸어요. 그래서 이 자리에 나올 수밖에 없었네요. 이런 저랑 결혼하실 수 있겠어요?”
이것저것 따지지도 않고 바로 결혼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이다.
‘나도 급하지만 심은혜도 급하군.’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변호사가 되어 대형 법무법인에 입사하면 돈 문제는 바로 해결될 것인데, 돈이 궁해서 이런 자리에 나왔다는 것은 진로를 변호사보다 판사를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판사가 되고 싶으십니까?”
내 뜬금없는 질문에 심은혜가 나를 빤히 봤다. 내가 생각보다 예리하다는 눈빛이다.
“예, 그런데 빚이 과도해서 판사로 임용되기 힘들 수도 있다고 선배들이 말하더군요.”
이 말의 숨겨진 뜻은 법조계 선후배도 심은혜가 빚이 많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거기다가 오빠가 교도소에 복역하고 있는 것에 대한 우려가 없는 것을 보면,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막을 수 있다는 의미로 느껴졌다.
“사실 저는 변호사가 되려고 했다면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여기까지가 오늘의 저네요.”
이 상황에서 제일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은 강남 마담뚜다.
‘뭐 이런 시추에이션이 다 있냐는 표정이군.’
하여튼 상황이 참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다.
“사모님, 너무 놀라시는 것 같은데 이제 저희 둘끼리 이야기하고 식사해도 될까요?”
“호호호,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제가 오늘 실수를 많이 했네요.”
“예?”
“제가 백범 씨와 은혜 씨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군요. 두 분 모두 대찬 면이 있네요. 이런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각각 업그레이드를 시켜서 준비할 것을 그랬어요.”
강남 마담뚜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고 사라졌다.
* * *
“은혜 씨, 저랑 결혼하실래요? 저는 돈이 없지만 제 아버지께서는 돈이 많은 졸부입니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저랑 다르게 훌륭한 분입니다. 평생 농사만 지었지만 졸부라고 폄하해서는 안 될 분입니다.”
“아버님을 존경하시네요.”
“예, 존경합니다. 벼락부자가 되었지만 돈을 막 쓰면서 살지 않았고, 돈으로 누구 위에 군림한 적 없고, 돈을 무기로 휘두른 적 없으십니다. 그것만으로도 제 아버지는 존경받아도 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제 할아버지께서는 모두가 존경해야 하는 독립군이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희 집안도 명예로운 집안이네요.”
나만 똑바로 살아간다면 충분히 훌륭한 집안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 같다.
“맞는 말씀이세요.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은 마땅히 존경받아야죠.”
어쩌면 심은혜는 내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기에 이 자리에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드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저 여자, 야망도 꽤 큰 여자일 것이다.
‘야망을 품은 슬기로운 여자?’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가면을 쓴 여자?
둘 중 하나라는 판단이 선다.
‘둘 다 바쁘겠지?’
분명한 것은 둘 다 나를 귀찮게 할 여자는 아니다.
“저는 사업자금이 필요하고, 은혜 씨는 빚을 갚고 판사로 임용되셔야 하니 제가 은혜 씨의 남편감으로 딱 적당할 것 같습니다.”
만난 지 딱 30분 만에 청혼하는 거라서 심은혜는 살짝 놀란 눈빛을 보였다.
“저한테 청혼하시는 건가요? 저희, 만난 지 30분밖에 안 됐는데요?”
“제가 많이 급해서요.”
심은혜에게 미소를 보여 줬다.
“으음…….”
“저따위가 은혜 씨보다 훌륭한 여자를 만날 확률은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참 의외의 말씀을 많이 하시네요.”
“이런 맞선 자리에 나온 여자들은 대부분 제 아버지의 돈만 보고 나오죠. 은혜 씨를 정확히는 모르지만 차차 알아가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런 여자입니다.”
솔직하다는 것은 당당하다는 것이고, 그 당당함을 지킬 능력을 가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래도 은혜 씨는 최소한 솔직하시잖아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남자들끼리 술자리에서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여자들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겁니다. 여자를 무시하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런 말처럼 남자도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저도 솔직한 성격이고요. 최소한 이제 개망나니로는 안 살 생각입니다. 제 아버지의 돈이 아니라 제가 벌어서 은혜 씨를 서포트해 드리겠습니다. 남자가 사업하고 여자는 내조하라는 법은 없죠. 제가 외조를 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마음이 급하기 때문입니다. 은혜 씨의 인생을 흠집 있는 인생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것과 충분히 존경받는 인물이 되겠다는 것은 분명하게 약속을 드립니다.”
“정말 자신감 하나는 탁월하시네요.”
정말 나를 신기하게 보는 심은혜다.
“예, 저는 세상을 바꿀 겁니다.”
“예?”
“돈으로 세상을 바꿔 보려고요. 그래서 은혜 씨가 필요합니다.”
심은혜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심은혜는 그런 나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내가 돈을 가지고…….’
심은혜가 명예를 가진다면 결혼한 후에 태어날 아이가 대통령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 같다.
‘그림은 크게 그리는 것이 좋지.’
따지고 보면 결혼도 사업이고, 장사다.
나를 누구에게, 어떻게 파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나를 팔고 심은혜를 샀다.’
공평한 거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