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4화 멋진 여자를 만나다(2)
“백범 씨, 어머니께서 겨우겨우 어렵게 만든 자리예요. 제게 통사정하셔서 구한 자리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강남 마담뚜가 내게 말했다. 그녀는 사실 지금까지 별말 없이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사모님, 죄송합니다.”
나는 바로 강남 마담뚜한테 정중하게 사과했다.
“사모님, 저도 제 조건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맞선은 조건이죠. 사모님께는 인적 인프라가 최고의 사업 아이템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맞선 중매도 사업이라면 사업이다.
그리고 내 말에 나를 조금은 다시 보는 강남 마담뚜다.
“사모님, 저쪽 집안도 제 집안처럼 일류 집안이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그래도 저한테는 최고의 조건을 갖춘 집안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래도 맞선을 나왔으면 최소한 저한테 궁금해야죠. 저 아가씨가 우리 집안이 졸부 집안이라는 것을 모르고 나온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아는 것을 질문한다는 것은 제가 별로라는 증거니 이 정도면 최대한 예의를 갖췄다 생각합니다.”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호호호, 그러네요.”
강남 뚜쟁이는 조금 전까지 나를 그냥 졸부 집안 개망나니로 봤는데, 살짝 달리 보는 눈빛이다. 한마디로 강남 마담뚜한테 점수 좀 딴 순간이다.
‘오늘만 맞선을 볼 것이 아니니까.’
결혼 상대자가 정해지기 전까지 내일도, 모레도 전투적으로 맞선을 봐야 한다. 그때 업그레이드된 신붓감을 만나기 위해서 이러는 것이다.
“백범 씨는 제가 판단한 것과는 다르시네요.”
“감사합니다. 어머니가 보여 주신 사진 중에 사법연수원생이 있던데……. 사모님도 바쁘실 테니 어느 집 여식들 말고 그분 먼저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나보다 더 일정이 바쁜 사람은 강남 마담뚜일 것이다.
“호호호, 저를 신경 써 주시는 건가요?”
“오늘이 끝이 아닐지도 모르니까요.”
“호호호, 그렇기는 하네요. 백범 씨도 아시겠지만, 그 아가씨는 아무것도 없어요. 집안도 평범하고요. 공부 잘해서 사법시험 합격한 것이 전부예요.”
강남 마담뚜는 평범한 집안이라고 했지만, 평범한 집안에서 딸을 졸부 집 망나니에게 팔아먹으려 했겠는가. 아마 경제적으로 평범 이하의 집안일 것이다.
“그러니까요. 그래서 마음에 듭니다. 어떤 집안인지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사람이 중요하죠. 이왕이면 머리 좋은 여자가 좋습니다.”
“호호호, 정말 소문과는 다르시네요.”
이제 나를 보는 눈빛이 완전히 바뀐 마담뚜다.
* * *
내 요구대로 사법연수원생과 마주 앉게 되었다.
‘사법연수원생이 졸부 집 망나니를 상대로 선보러 나왔다?’
강남 마담뚜는 내게 평범한 집안이라고 말했지만, 그 이하일 것으로 추측되고, 정말 돈이 궁해서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나왔을 확률이 높다.
‘엄청난 미인이고, 옷차림이 수수하군.’
사법시험을 통과하면 은행에서 신용 대출을 하면 바로 1억쯤 나오는 시대다. 그러니 마음을 먹으면 명품으로 휘감으려고 해도 충분한데, 옷차림이 참 수수하다. 그리고 그 수수함이 정말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거기다가 상당한 미인이다.
‘화장하지 않은 것 같은 얼굴인데?’
저 정도의 자체 발광이면 꾸몄을 때 엄청날 것 같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울법대 수석 입학 및 졸업자라는 간판이나 사법시험 합격자라는 조건이고, 이 조건은 내가 가지지 못한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인맥을 제공해 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백범이라고 합니다.”
우선 내가 해야 할 일은 망나니라는 이미지부터 지우는 것이다.
새롭게 시작된 삶이니 이전처럼도, 호구인 백범처럼도 살지 않을 것이다.
완벽하고 깔끔하게 살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모든 것을 가질 생각이다.
‘나는 진짜 나를 억제하고 숨길 것이다.’
그러면서 가장 완벽하고 훌륭한 삶을 살고자 한다.
“이름은 정말 존경스럽네요. 저는 심은혜라고 합니다.”
처음 만난 여자와는 다른 반응이다. 최소한 저 여자는 김구 선생의 호가 백범이라는 것은 아는 여자였다.
“지금까지는 김구 선생님의 거룩한 호를 이름으로 쓰고 있어서 죄송할 때가 참 많았습니다.”
“그 말씀은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내 말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한 아가씨다.
“예, 이제는 그렇게 살려고 합니다.”
강남 마담뚜에게 내가 개망나니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나에 대한 정보는 쏙 빼놓고, 아버지가 졸부라는 것만 들었을 가능성도 크다.
‘결혼을 하면 평생 같이 살 여자다.’
그렇다면 똑똑하고 슬기로운 지혜를 가진 여자가 좋다.
‘지식 말고 지혜!’
머리와 돈만 있으면 가질 수 있는 지식 말고, 세상을 슬기롭게 살아갈 여자였으면 좋겠다. 또한 이왕 하기로 한 결혼이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싶다.
“은혜 씨, 혹시 저에 대해서 들으셨습니까?”
“예?”
“못 듣고 나오신 것 같아서 드리는 말입니다.”
“그럼 저에 대해서는 들으셨나요?”
“예,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셨고, 이번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법연수원생이라고 들었습니다. 제게는 과분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꾸미지 않아서 그렇지 엄청난 미녀다. 그러니 꾸며 놓으면 재벌가에서도 업어갈 정도일 것이다.
거기다가 사법연수생이니 머리까지 좋다. 재벌가 망나니들의 아내감으로는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심은혜 저 여자가 자신의 진가를 모르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법시험을 사법시험이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처음이네요.”
많은 사람이 사법고시라고 부르지만 정확한 명칭은 사법시험이다.
“공부하느라 바쁘시죠? 정말 귀한 시간을 저한테 내주셨으니 제가 은혜 씨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저에 대해서 간단하게 브리핑을 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심은혜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
“그럼 그 브리핑을 듣고 저도 브리핑을 드려야 하나요?”
살짝 미소를 보이는 심은혜다. 내가 말한 상황이 재미있다는 눈빛이다.
“하하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법연수원생인 은혜 씨에게는 시간이 제일 소중하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네요.”
“제 이름은 은혜 씨가 아시는 것처럼 백범이고, 나이는 서른입니다. 모르고 나오셨을 거라고 생각하고 제 30년을 간단명료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개망나니로 살았습니다. 파락호로 살았습니다. 파락호에는 많은 의미와 과거의 행동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의미와 과거의 행동들이라고요?”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과거의 백범은 시쳇말로 여자들을 벗기며 돈 쓰는 재미에 살았던 놈이다. 그 행동들은 결혼 후에도 소문이 되어 심은혜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미리 말해두는 것이 좋다.
“그렇기는 하네요. 개망나니, 파락호 참고할게요.”
“그리고 들었겠지만, 저희 집안은 졸부 집안입니다. 그러니 돈밖에 없습니다. 물론 조부께서는 독립운동을 하셔서 독립유공자 집안이기도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는 집안의 먹칠을 하고 살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돈도 있고, 명예도 갖춘 집안이지만 내가 개망나니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들었어요.”
“개망나니?”
“그 이야기는 못 들었고요.”
이럴 줄 알았다.
그리고 강남 마담뚜는 그런 고해성사까지 하냐는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자기가 들은 이야기와 내가 확실히 다르다는 눈빛을 다시 보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말씀을 드린 것처럼 개망나니로는 안 살 겁니다. 사실 제가 아버지께 투자를 제안했는데, 워낙 개망나니로 살다 보니 아버지께 믿음을 못 드렸습니다. 그래서 결혼부터 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러시군요.”
“거기다가 제가 몇 달 전에 교통사고를 크게 당했습니다. 제가 삼대독자라 부모님께서 정말 놀라신 것 같습니다. 대는 이어야 한다고 하셔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것은 심은혜에게 내게 시집을 오면 씨받이 노릇부터 해야 한다는 소리를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몸은 괜찮으세요?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하던데요.”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말에 나를 걱정했다.
‘이 여자, 괜찮네.’
물론 여자는 살아 봐야 안다. 분명한 것은 말투 하나만은 다정다감하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도 내추럴하고…….’
말투와 행동, 눈빛과 표정 모든 부분이 자연스럽고 당당했다.
‘정말 개천에서 용 난 스타일이군.’
자신감과 자존감이 높은 여자일 것 같다. 게다가 내가 그녀에게 정중하게 행동해서 그런지 그녀는 내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
‘이왕 결혼해야 한다면!’
지혜롭고 바쁜 여자와 해야겠다. 그래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하여튼 아버지께서는 제가 결혼하면 투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꼭 빠른 시일에 결혼해야 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내 말에 고개까지 끄덕였다. 정말 듣기에 따라 불쾌하고 황당할 말일 텐데 이해한다는 눈빛이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의 저입니다.”
내 말에 나를 유심히 보는 심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