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3화 멋진 여자를 만나다(1)
하여튼 맞선은 보기로 했다. 내게 확답을 받으신 아버지는 내일 파종 준비를 해야 한다시며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셨고 부창부수라는 말처럼 어머니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오늘 주무시고 가시죠?
-이런 성냥갑 같은 집에 있으면 숨이 턱턱 막혀.
-이렇게 큰 성냥갑도 있습니까?
-너 좀 변했다.
-예?
-안 하던 농담도 이 아버지한테 하고. 파종 준비해야 해, 농사라는 것이 때를 놓치면 안 되거든.
내게 그 말을 하시고 부모님은 판교로 돌아가셨고, 나는 이 넓은 아파트에 썰렁하게 혼자 남아 심심한 마음에 TV를 켰다.
[9시 NBC 뉴스데스크입니다.]
이것도 좀 이상하다.
“MBC잖아.”
내가 기억하고 있는 1997년과 지금의 1997년은 살짝 다른 것 같다.
[정계를 은퇴한 태평양재단 김대준 대표가 오늘 공식적으로 대권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이번 대권 출마는 진정한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대변하기 위한 것이라며…….]
“김대준?”
또 이상하다.
TV 화면에 보이는 사람은 분명 내가 아는 DJ인데 아니 DJ와 묘하게 닮았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것 같다.
‘뭐지?’
당황스럽다. 아니 혼란스럽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번 김대준 대표의 대권 출마 선언에 새한국당 이희창 총재는 국민을 우롱하며 대통령 병에 걸린 구시대의 정치가 망령처럼 다시 깨어났다고 강력하게 비난했습니다.]
“신한국당이잖아.”
그리고 이희창이 아니라 이회창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내가 어디로 떨어진 거지?’
나도 모르게 겁이 덜컥 났다. 이곳으로 환생한 지 3개월이나 지난 상태다. 물론 그때는 교통사고 때문에 정신이 없었고 또 병원 생활을 했기에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것을 찾아낸 것이다. 다른 것은 다 똑같은데 사람의 이름들이 다 다르다.
마치 공상과학 소설에 나오는 평행 세상에 떨어진 기분마저 드는 순간이다. 그리고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너무나 생생하다.
그리고 나는 바로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했고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내 나름대로 검색해 확인했다.
“똑같은데?”
신기한 것은 김영삼 대통령은 그냥 김영삼 대통령이었다. 하여튼 여긴 대한민국이면서 대한민국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인터넷에서 찾은 모든 정보는 이곳을 대한민국으로 정의하고 있으니까.
“고민해도 답은 없다!”
내가 내린 결론은 딱 이것이었다. 그러니 이곳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고 내가 아는 일들이 그대로 다 일어났기에 내가 가진 미래의 기억을 이용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하하, 그냥 맞선이나 잘 보자.”
결혼해야 사업 자금 300억이 생기니까.
* * *
3일 후, 강남 유명 호텔 카페.
사업비를 마련하기 위해 오늘 맞선을 봐야 할 상대는 다섯 명이다. 어머니는 이 다섯 명과 맞선을 보기 위해서 강남 뚜쟁이한테 자그마치 1억을 쓰셨다고 실토했고, 강남 마담뚜의 호구로 전락했다.
‘졸부는 졸부야!’
한마디로 우리 집은 돈밖에 없다는 소리고, 나는 개망나니라는 소리다. 원래 내가 얼마나 못났으면 맞선 자리 다섯 건에 1억을 내놓을 정도니 기가 찰 노릇이다.
‘환생했는데 졸부 집 아들?’
나쁘지 않다.
최대한의 비빌 언덕이 마련됐다.
그리고 졸부인 아버지께서는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막돼먹은 졸부도 아니다.
충분히 존경받아 마땅할 농사꾼이고, 700억 자산가로 거듭났는데도 검소하고 바르게 사는 분이니 고마울 뿐이다.
‘나만 잘하면 되는 거지.’
하여튼 진짜 제대로 된 집안이라면 나 따위를 사위로 둘 생각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맞선 상대는 다들 하나씩은 하자가 있을 것이다.
-1번 규수 댁은 교육자 집안이에요. 이번에 지역구에 출마할 예정이고요.
강남 마담뚜가 내게 귀띔해 준 말이 떠올랐다.
‘한마디로!’
개망나니로 통하는 내게 딸을 팔아서 선거 자금 마련하겠다는 복안으로 이 자리에 나온 것이다.
‘진짜 에이스는 나 같은 놈을 거들떠보지도 않겠지.’
나는 회귀 및 환생한 후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그러니 여전히 개망나니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뭔가 이뤄 놓았다면?’
맞선 시장에서 내 몸값이 좀 오를 것인데, 부모님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였기에 나는 완벽히 저평가된 채 이 자리에 앉았다.
‘명품으로 휘감으셨군.’
하여튼 내 앞에 지금 명품으로 휘감은 교육자 집안 출신 딸내미가 나를 깔보는 눈빛으로 앉아 있다. 그리고 저렇게 명품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여자들은 자신이 명품인 여자가 거의 없다.
물론 명품을 좋아한다고 이상한 여자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저 여자의 이미지를 뭐라고 할까?’
재벌과 졸부의 차이라고 할까?
명품으로 휘감았는데 왠지 그게 전부일 것 같은 느낌.
딱 그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현실적으로는 나랑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지금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돈밖에는 없으니까.
‘그래도 싫으면 나오지를 말든가!’
딱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빛이고, 등 떠밀려 억지로 나왔다는 눈빛이다.
“안녕하세요. 백범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바닥을 친 내 몸값을 올리기 위해 최대한 정중해야 한다.
가끔은 진흙 속에서도 진주를 찾는 법이다.
그리고 내가 좋다고 바로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 맞선이 다 실패로 돌아가면 강남 마담뚜는 받아먹은 것이 있기에 다음에도 맞선을 주선해야 하니 오늘 맞선 상대에게 잘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맞선 상대를 정해 줄 강남 마담뚜에게 내 이미지를 재고하게 해야 한다.
“안소미라고 해요. 백범 씨는 어느 대학 나오셨어요?”
정략결혼을 위한 맞선이기에 나에 대해서 이미 알고 나왔을 것인데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학벌로 나를 깔아뭉개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그리고 기선 제압을 하겠다는 의도기도 할 것이다.
‘학벌로 기를 죽이겠다고?’
내가 받은 정보로는 저 아가씨는 유학파다. 하지만 미국 유명 대학을 졸업한 것도 아니다. 미국에도 돈만 주면 졸업장을 받을 수 있는 학교가 있다. 아마 그런 대학을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미국은 기부 입학이 가능하니까.’
하여튼 상대는 대놓고 나를 무시하겠다는 심산으로 첫 대화부터 공격적인 질문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사업비가 궁해도 저 여자랑 결혼하면 평생 골치가 아플 거라는 확신이 섰다.
“모르고 나오셨어요?”
담담한 어투로 되물었다.
“예?”
마누라가 예쁘면 처가에 뭐든 해줄 수 있다. 하지만 그저 나를 졸부의 아들로 보고 자기 아버지 선거 자금줄로만 본다면 나도 당연히 노땡큐다.
“신상명세서를 받지 않으셨어요? 저, 광서대 졸업했습니다. 광서대가 어디에 있는 대학인지 잘 모르시죠?”
광서대가 어디에 있냐고?
경기도 인근에 있는 삼류 대학이다.
“아, 그러시군요.”
뭐 이런 것이 다 있냐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손목시계만 보기 시작했다.
‘다음 맞선이 있는 모양이군.’
대한민국에는 졸부가 많다. 저 여자에게 나는 수많은 졸부 집 아들 중에 후보 몇 번쯤 될 것이다.
‘국회의원도 아니고 국회의원 후보 딸내미 주제에.’
욱하는 순간이다.
* * *
“아버지께서 판교에서 농사를 크게 하신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 수백억대의 자산가라고 들었는데…….”
이 정도면 참을 만큼 참았다. 그리고 여자가 질문할 때마다 강남 마담뚜도 여자가 느끼지 못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나는 바로 지갑을 꺼내서 내 명함 뒷면에 아버지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 여자에게 내밀었다.
“이 명함은 뭐죠?”
“저희 아버지 전화번호입니다. 저보다 제 아버지께 궁금한 것이 많은 거 같은데 아버지께 직접 물어보세요. 질문의 답이 흡족하면 다시 저한테 연락을 주시고요. 저는 오늘 맞선이 네 건이나 더 있어서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내 말에 뭐 이런 것이 다 있냐는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여자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꼴이네, 정말.”
여자는 그렇게만 말하고 쌩하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