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침묵의 기사
* * *
"로난님."
"쉿."
"... 하지만.."
"조용히 하세요, 피켈 저렇게 내버려 두면 어떻게든 얘기하겠죠."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앞에는 멍하니 창살로 막아진 창문을 바라보는 남자가 있었다.
"그래도.. 하나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말하세요 피켈."
"저 남자가 무슨 짓이라도 한 겁니까?"
"...."
피켈의 말에 로난은 입을 다물었고 피켈은 '그럼 그렇지.'라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절벽을..."
"절벽을?"
"절벽을 올라왔어요."
"저길 말입니까?"
로난의 말에 피켈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래요.. 자기 말로는 공국에서 왔다고 하는데.. 일단은 저도 생각해 볼 테니 들어가서 대기하라고 했어요."
".... 또 그놈의 의심병이 도지신 겁니까?"
"... 시끄럽네요."
로난을 잘 아는 듯 피켈은 머리가 아픈지 고개를 내저었고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로난은 문을 열고 남자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반갑네요."
"...."
남자의 인사에 로난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앞에 앉았고 조용히 그를 지켜봤다.
"이제는 믿겠죠, 제가 이 영지의 영주라는걸."
"예.. 뭐.."
남자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로난은 책상을 톡톡 두들기며 더 이야기해보라는 듯 재촉하듯 얼굴을 들이댔고 남자는 부담스러운지 몸을 뒤로 쓱 뺐다.
"이름은?"
"칠러웨이..라고 합니다."
"칠러웨이?"
이름을 들은 로난은 피켈을 바라봤고 피켈은 처음 듣는 이름이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데..?"
"아마 그럴 겁니다."
"잠깐."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피켈은 칠러웨이의 이름을 되뇌더니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눈을 크게 떴다.
"칠라렌 성국의 일루안과 반역을 꾀하고 성녀들을 톤 왕국으로 빼돌린...!"
"빼돌렸다는 말은 좀.."
칠러웨이는 왠지 모르게 자신이 죄인이 된 것 같아 머리를 긁적였고 피켈은 심각한 얼굴을 한 채 로난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 그런 사람이란 말이지..?"
로난은 조용히 턱을 괴고 생각에 빠졌고 피켈은 의자를 가져와 로난의 앞에 앉았다.
"칠라렌 성국에서 쫓기고 있을 텐데... 하마르 공국 또한 이 일과 연관이 있는 건가?"
"아 그게.. 말하자면 좀 긴데 괜찮습니까?"
"잠깐."
피켈이 궁금한 듯 물어왔지만 로난은 피켈의 입을 막고 칠러웨이를 바라봤다.
"당신은 나라를 버린 기사가 아닌가?"
"...."
"... 더욱이 믿을 수가..."
로난이 의심 가는 표정으로 칠러웨이를 바라보자 피켈은 그녀에게 소리쳤다.
"가만히 좀 있어보세요!"
"히끅!"
"대륙의 존폐가 걸린 일입니다! 지금 톤 왕국과 칠라렌 성국의 전쟁에 제국까지 개입되고 있다는 얘기가 있어요! 고작 그런 이유로 듣지 않는 건 말도 안 됩니다!"
피켈의 말에 로난은 풀이 죽은 듯 고개를 푹 숙였고 피켈은 한숨을 쉬더니 계속 얘기 해보라는 듯 손짓했다.
'... 영주 맞아..?'
"... 나는.. 그냥.. 궁금해서.."
"너무 예의가 없지 않았습니까 로난님, 우리 펠 왕국은 구석에 박혀있는 왕국이라 이런 소식을 듣기 힘듭니다."
"... 미안.."
"그러니 이럴 때는 그냥 들어주는 게 좋습니다, 거짓인지 진실인지는 나중에 판단하면 되구요."
"응..."
로난의 모습에 칠러웨이는 그녀가 영지에서 깍두기 취급받는 것은 아닐까 고민했지만 그래도 풀이 죽어있는 로난에게 사과하며 피켈의 깍듯한 태도에 자세를 고쳐앉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피켈님 말대로 저는 칠라렌 성국의 리에티라는 자와 대립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성녀들과의 인연이 있어 최대한 그를 도왔죠."
"리에티.. 그 자가 칠라렌 성국을 휘어잡았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건 진짜인가?"
"예.. 뭐 교황 자리에 가장 근접해 있다고는 저도 소식으로만 들었습니다, 일루안님이 토벌과 반역의 누명으로 인해 돌아가시고 나서는 톤 왕국으로 다섯 번째 성녀 아르웬님과 톤 왕국으로 넘어갔습니다."
"음..."
그의 얘기를 듣던 로난과 피켈의 얼굴은 심각해졌고 칠러웨이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기가 아니었냐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일루안이 죽었다는 얘기는 거짓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군요 로난님."
"그러게.. 반역으로 죽을 인물은 절대 아니었는데..."
과거 일루안과 만난 인연이 있는 듯 로난은 한숨을 쉬었고 피켈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후에는 자유기사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습니다..도중에 데브라님을 만나 설득을 했지만 거절... 그 와중에 타나스의 사제 사에트와 만나 전투를 치렀습니다."
"... 타나스의 사제들.."
"또 헬하임의 일황자 파울로가 황제의 자리를 두고 갈리드 이황자를 제거하려 했고 그것에 휘말렸습니다.. 결국 데브라님의 아들이신 페르온이 전사.. 그 후에는 갈리드 황자를 지하 감옥에서 구출해 톤 왕국으로 옮기게 됐고 먼저 타나스의 사제들을 해결하자는 생각에 공국으로 찾아가 부탁을 했습니다."
"...."
칠러웨이는 계속해서 일에 휘말리며 당한 뒤통수에 주먹을 쥐었고 피켈과 로난은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에 입을 다물었다.
"공국의 왈츠 디 피올레는 이름만 용사였습니다, 지하 감옥에서 구출한 구레드님의 부탁으로 현재 여기 적힌 인물들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 이건.."
로난은 자신의 이름이 양피지에 적힌 것을 확인하고는 "내가 혹시?"라는 얼굴이었지만 피켈은 고개를 내저었다.
"로난님은 아닐세."
"... 피켈, 네가 뭔데 판단해?"
피켈의 말에 로난은 기분이 나쁜 듯 그를 째려봤지만 피켈은 자신의 말이 틀렸냐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스스로도 알지 않습니까? 용사라는 이름을 가질 만큼 비범한 사람이 아니란걸?"
".... 너.. 너...!"
"아닙니까?"
"...."
로난은 위엄 있는 모습은 어디 가고 눈물을 툭툭 흘리며 그를 바라봤고 피켈은 칠러웨이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니 로난님은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 대에 이어 침묵의 재능을 받아 영주의 자리를 이어나가고 계시지만 이렇게 조금만 놀려도 울 만큼 재미난 분이라서."
"... 무슨 말을 하시는지 알겠네요."
"칠러웨이 당신도...!"
칠러웨이마저 피켈의 편에 들자 로난은 울먹거리며 그들을 노려봤고 피켈은 늘 있는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아 했다.
"그럼 다음 행선지로 향할 수밖에 없겠네요, 모든 얘기를 들려드렸으니 이건 풀어주시는 겁니까?"
"아 미안하군요."
'혼자서도 풀 수 있지만..'
칠러웨이가 자신의 손에 묶인 쇠사슬을 들어 보이자 피켈은 까먹었었다는 듯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목에 칭칭 감긴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로난님! 피켈님!!!"
칠러웨이가 자리에서 일어난 그 순간 갑자기 한 병사가 뛰어들어왔고 땀범벅인 그의 모습에 피켈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그러니까.. 저기.. 헉.. 헉.."
"천천히 똑바로 얘기하거라."
"이상한 것들이 나타났습니다..!"
"이상한 것들이라니?"
"그.. 그게 나.. 나가보셔야 아실 것 같습니다..!"
피켈은 그의 말을 듣고 빠르게 방에서 뛰쳐나갔고 로난과 칠러웨이 또한 그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
".... 저건."
"기사들과 병사들을 준비시키고 성문을 닫아!"
영지의 앞에는 수많은 구울들이 땅에서 솟아나고 있었고 로난은 그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고 명령을 내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 갑니다."
"칠러웨이!?"
성문을 닫으려 했지만 밀려오는 구울들에 여의치 않자 그 모습을 보던 칠러웨이는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키에에엑!
먹이라도 발견한 듯 구울들은 칠러웨이를 순식간에 덮쳐왔지만 칠러웨이의 주먹이 뻗어져나가자 수십의 구울들이 떨어져 나갔다.
"피켈 뭐 하는...!"
황당해 하는 피켈의 어깨를 로난이 잡으며 다급하게 말했지만 눈앞에서 구울들이 순식간에 쓸려나가는 것을 본 그녀 또한 멍하니 칠러웨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사에트!!!!!!!!"
분노 어린 칠러웨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저 먼 곳에서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세 사람이 땅에서 솟아나듯 나타났다.
[저런 놈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사일트럴 디 펠 로난만 데려가면 된다.]
[이 정도 구울로는 안되겠는데?]
세 사람은 무언가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절벽 아래에 손을 휘저었다.
그그그...
"... 이 소리는..."
"설마.."
땅의 울림이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절벽 아래에서는 거대한 키메라가 천천히 벽을 짚으며 올라오고 있었고 그 모습에 당황했는지 피켈은 뒤로 넘어져야만 했다.
"피켈."
"로.. 로난님.."
"성벽 아래로 병사들을 모두 피신시켜."
"하.. 하지만.."
"네 주인은 누구지?"
아까 전의 모습은 어디 갔는지 날카로운 얼굴로 로난이 피켈을 바라보자 피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사들과 병사들을 성벽 아래로 대피시켰고 로난은 조용히 거대한 키메라를 바라봤다.
"저걸 깨울 줄이야.."
온몸은 썩어있었고 뼈가 이곳저곳 드러난 모습이었지만 그 거대한 위압감은 로난의 몸을 꽁꽁 묶었고 저 멀리 타나스의 검은 사제 옷을 입고 있는 이들은 킬킬대며 웃었다.
[사일트럴 디 펠 로난.]
"...."
[우리를 따라간다면 자네의 사랑하는 영지민과 기사들을 살려주지.. 하지만.. 따라가지 않는다면..]
콰앙!
"꺄악!"
키메라가 집어던진 거대한 바위는 성벽의 한곳을 부숴버렸고 로난은 그 여파에 뒤로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사일트럴 디 펠 로난, 조용히 따라오지.]
"어이."
[....]
"어이!"
[.....!]
[어.. 언제..]
[벌써..?]
하지만 한 남자의 부름에 세 사제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고 어느새 사지가 날아간 구울들의 머리를 잡고 있는 칠러웨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 몇 초 안 센다."
[....!?]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