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침묵의 기사
* * *
"...."
한 남자가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산 중턱에 앉아 있었다.
"하아.."
꽤나 근심 걱정이 많은 듯 남자는 긴 한숨을 내뱉었고 개미 한 마리 지나다니지 않는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는 거야?"
청년의 이름은 칠러웨이, 그는 구레드, 하마르 공국의 피올레와 한 약속을 지키러 펠 왕국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펠 왕국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
지도에 그려진 길은 가파른 바위들을 따라 이어지고 있었고 거의 직각이라 부를만한 언덕은 강한 체력을 가진 칠러웨이조차 질리게 만들었다.
"이틀을 안 쉬고 안 자고 걸었는데 뭐가 보여야 힘을 내지..."
혼잣말을 하는 것도 어연 한 달, 그는 처음 이 대륙에 도착했을 때보다도 더 큰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는 그래도 엘라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 몸을 움찔거린 칠러웨이는 조용히 주머니에서 바짝 말린 빵을 입에 물었다.
"뻑뻑해.."
텁텁한 입을 당장이라도 물로 헹구고 싶었지만 칠러웨이는 물이 얼마 남아있지 않은 물통을 흔들어보며 한숨을 쉬었다.
"언제까지 이 짓을 반복해야 할지.."
뚜둑..
딱딱한 빵이 가루로 부서지며 칠러웨이의 옷으로 후두둑 떨어졌지만 칠러웨이는 빵가루를 치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푸른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길.."
용사를 찾아 무작정 구레드와 떨어지긴 했지만 넓은 대륙에서 바늘 찾기와 같은 일을 생각을 하니 칠러웨이는 가슴이 답답하고 막막해졌다.
"더럽게 뻑뻑하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지만 밀려오는 외로움에 칠러웨이는 갑자기 울컥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거야.."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무작정 시작했던 싸움과 엮이고 설키는 사람들에 의해 칠러웨이의 마음은 계속 지쳐만 갔고 눈앞에서 죽음을 맞는 사람들을 보며 그의 정신은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
하지만 칠러웨이는 자신의 곁에 남아있는 몇몇 사람들 덕에 정신을 잡을 수 있었고 결국 여기까지 왔지만 지금 자신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르웬.."
자신의 곁에 항상 있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위안을 주던 그녀조차 지금 톤 왕국의 보호라는 명목 아래 나라 밖으로 마음대로 나올 수 없었다.
"그만하고 싶다.. 그냥.."
칠러웨이는 이곳에서 도망이라도 칠까 생각했지만 그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선택이었기에 그는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 가자.."
결국 마음을 다잡은 듯 칠러웨이는 바위 위에서 일어나 높은 산을 바라보았고 천천히 손을 뻗었다.
"조금만 더 가면 펠 왕국이 나올 거니까 거기서 좀만 쉬자."
입술을 꾹 깨물고 칠러웨이는 바위 틈에 손을 집어넣으며 천천히 암벽을 등반했다, 과거라면 언제라도 체력이 빠져 저 아래로 떨어질지 몰랐지만 지금 그의 육체는 무엇을 해도 힘이 줄어들지 않았기에 그는 쉬지 않고 올라갔다.
"허억.. 허억.."
하지만 무한대로 뿜어져 나오는 체력이 아닌 이상 그도 인간이었고 암벽의 끝까지 올라온 칠러웨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제발.. 펠 왕국.."
"움직이지 마라."
칠러웨이는 갑자기 들려오는 사람의 목소리에 반갑기도 했지만 자신의 목에 있는 시퍼런 칼날에 몸을 긴장시키며 앞을 바라보려 했다.
"...."
"손가락이 하나라도 움직인다면 그대로 떨어뜨려주지."
조용한 목소리의 남자는 칠러웨이에게 경고했고 칠러웨이는 왠지 모를 그의 살기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싸울 생각 없습니다."
"그건 내가 판단하지."
"정말 싸울 생각 없습니다, 이 높은 곳을 기어올라왔는데 뭣하러 당신이랑 싸우면서 죽겠습니까."
".... 저 높은 곳을 올라왔으니 경고하는 거다."
칠러웨이는 그의 말에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머릿속에 있는 지도를 떠올리며 구레드가 경고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칠러웨이.]
[짧게 얘기하세요, 다 알아들었어요.]
[처음 행선지인 펠 왕국으로 향할 때 제국과 맞닿아있는 거대한 암벽은 절대 올라가지 말게.]
[예예..]
[대충 듣지 말고!!]
[아 알았다구요!]
[잘 듣게 그곳은 제국을 경계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요새가 있네, 몇 번이나 제국은 그곳을 통해 암살자들을 보냈고 심지어는 몇 천의 병사들을 암벽으로 올려보낸 적도 있어.]
[예..]
[그러니 가장 경계가 삼엄하고 저 암벽을 올라오는 자들이 있다면 당장 목을 칠 정도로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으니...]
[하암~.]
[이 자식이...! 잘 들으라고!]
[아아악! 왜 때려요!!!]
"... 제길."
구레드의 말을 떠올린 칠러웨이의 머릿속에서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입에서는 욕지거리가 뱉어져 나왔고 정신이 아찔해져왔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 예."
"제국에서 왔나?"
"저.. 그게 설명하자면 긴데..."
"대답은 짧게 예, 아니요로 대답해라."
".... 아니요."
"다시 얘기하지만 허튼짓은 하지 말길 바라지."
'자꾸 왜 반말이지?'
점점 말이 짧아지며 자신의 말을 싹둑 자르는 그의 태도에 칠러웨이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시 묻겠다, 제국에서 오지 않았다면 어디서 왔지?"
"그게.."
"대답은 예, 아니요로만 하라고 했을 텐데!!!!"
"...."
"크흠.."
칠러웨이가 자신을 올려다보며 '뭐 어쩌라고.'라는 듯한 표정을 짓자 그는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칠러웨이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댔다.
"대답해라."
"... 하마르 공국에서 왔습니다."
"하마르 공국?"
"예."
"하마르 공국이 무슨 일로 저 암벽을 타고..?"
"아 그게.. 제가 길을 잘못 들어서."
"...."
"...."
칠러웨이의 말에 그는 할 말을 잃은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칠러웨이도 자신이 부끄러운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증거는?"
"... 품에 손 좀 넣어도 되겠습니까?"
"허락하지."
칠러웨이는 조심스럽게 품 안에 손을 집어넣고 펠 왕국으로 오기 전 구레드가 왈츠 디 피올레에게 건네받았던 하마르 공국의 증표를 꺼내들었다.
"진짜군."
"예.. 하마르 공국에서 직접 받아왔으니까 진짜겠죠..?"
"...."
눈앞의 기사가 증표를 이리저리 훑어보자 칠러웨이는 고개를 다시 살짝 들어 그를 살폈다.
'뭐 저리 하얘?'
추위 때문인지 복면을 쓰고 두꺼운 옷으로 온몸을 꽁꽁 감췄지만 복면 위와 옷 사이로 보이는 하얀 피부에 칠러웨이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확인했다."
"예."
증표를 다 살펴본 기사는 칠러웨이에게 다시 건네주었고 칠러웨이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래서."
"예?"
"그 콧대 높은 하마르 공국이 이 구석진 펠 왕국까지 무슨 일이지?"
"아 그게.."
"펠 왕국이 헬하임 제국에 공격을 받을 때도 가만히 있던 녀석들이.."
"... 그.."
"자신들이 필요할 때만 이렇게 사람을 보내 요구 사항을 얘기하지..."
".... 어 저기.."
"허례의식에 찌든 귀족 녀석들이 모여있는 공국은 쓰레기 집합소나 다름없어."
기사가 자신의 말만 계속해서 이야기하자 안 그래도 화가 잔뜩 나있던 칠러웨이의 얼굴은 점점 더 붉어졌다.
"녀석들은..."
"저기요!!!"
"히끅!"
칠러웨이의 고함에 놀랐는지 기사는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채 딸꾹질을 하며 그를 바라봤다.
"말 좀 합시다!"
".... 아.. 그.. 그러시게.."
"그리고 말 놓지 마시죠?"
"...."
"공국 싫어하는 것 알겠는데 나는 공국에서 온 심부름꾼이지 그쪽 사람은 아니거든요!?"
".... 네.."
"펠 왕국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한테 예의 없다는 말 들으면 좋아요?"
"아니요.."
"그럼 좀 들으세요!"
칠러웨이의 말에 정신을 차린 듯 기사는 손을 가운데로 모으고 그의 꾸중을 조용히 들었다.
"후우... 피차일반 고생하는 사이에 서로 얼굴 붉히지 맙시다?"
"네.. 조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결국 기사는 고개를 숙이고 칠러웨이에게 사과를 했고 칠러웨이는 의기양양하게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그럼 그곳에서 오신 이유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이요..?"
"예, 펠 왕국의 사일트럴이라는.."
사일트럴이라는 말이 들리자 기사는 턱을 괴고 조용히 칠러웨이를 바라봤고 칠러웨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 안 사십니까?"
"그 사람을 왜 찾는 겁니까?"
"말했잖아요 전할 게 있다고."
"전하세요."
"예?"
칠러웨이는 기사의 말에 이상한 듯 눈을 찌푸렸고 기사는 어서 말해보라는 듯 그를 바라봤다.
"싫어요."
"...."
"저는 사일트럴이라는 기사를 만나러 왔다니까요?"
"사일트럴님은 바쁘시니 저에게 전하세요."
"아니 그러니까.."
기사의 말에 칠러웨이는 장난이라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내쉬었지만 기사의 눈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 직접 만나야 해서."
".... 하마르 공국이 나설 정도면 대륙에 큰일이 생겼다는 거군요."
"...."
"혹시 칠라렌 성국과 톤 왕국의 전쟁에 대한 일인가요?"
"...."
마치 자신의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처럼 기사가 계속해서 질문을 하자 칠러웨이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고 그런 그가 답답한지 기사는 주먹을 쥐고 그를 바라봤다.
"당장 말하세요."
"그.. 사일트럴님에게 직접..."
"만나실 수 없을 거라 얘기했을 텐데 끈질기시군요."
"저는 심부름꾼일 뿐..."
".... 할 수 없네요."
칠러웨이의 완강한 태도에 기사는 답답한 듯 복면과 투구를 벗었다.
"여자?"
"맞아요."
"...."
드러난 기사의 윤기 있는 회색 머리카락은 풀어져 그녀의 어깨 위로 흘러내렸고 복면 아래 드러난 얼굴은 광이 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
그녀의 머리색과 잘 어울리는 회색빛 눈동자가 칠러웨이를 꿰뚫듯 바라봤고 칠러웨이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고개를 돌렸다.
"아까는 무례를 범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이 펠 왕국의 자작이자 이 암벽을 포함한 겔 영지를 맡고 있는 '사일트럴 디 펠 로난'이라고 합니다."
"... 사일트럴 디 펠 로난...?"
"전장에서는 '침묵의 사일트럴'이라고 불립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