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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화 〉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는 주먹으로 (88/90)

〈 88화 〉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는 주먹으로

* * *

"끄으으..."

피가 묻은 붕대로 가득한 침대 위, 남자의 목소리를 듣자 주변에 있던 하녀들은 순식간에 그의 옆으로 모여들었고 치료에 꽤 일가견이 있는 치료사들조차 땀을 흘리며 그를 바라봤다.

"괜찮으십니까?"

"아직 안정을!!"

"리에티님!"

"조용히... 끄으.. 조용히 해라.."

시끄러운 치료사들의 목소리에 얼굴을 찌푸린 남자가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고 치료사들은 그가 일어나자마자 방을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리에티님이 일어나셨다!"

"조용히 하라는 말을 못 들었나?"

"죄송합니다 리에티님.. 알려야 할 분들이 산더미라.."

"...."

"얼른 다른 분들을 데려와!! 리에티님이 일어났다 모두에게 전하거라!"

"예...! 예!!"

그가 일어나자 방안은 어수선해졌고 리에티라 불린 남자는 꽤 많은 피를 흘려서인지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하녀들은 그의 몸이 식지 않게 계속해서 따듯한 물로 몸을 닦아주었고 치료사들은 그의 상처를 보며 치료할 수 있게 방법을 강구했다.

"비켜라.."

"하지만 리에티님...!"

"상황.."

"예?"

"... 못 들었나?"

"아.. 네!"

"상황은... 끄윽..!!"

리에티가 소리치자 문 앞에 정자세로 대기하고 치료사들이 물러가기를 기다리고 있던 성기사는 빠르게 그의 앞으로 뛰어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 성기사인가?"

"예 그렇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상황을 보고해라."

"아빌론님이 전선에서 톤 왕국의 브라이언과 대치 중입니다."

"블라인과 사엘라.. 모두 그곳에 있나..?"

"예."

"다른 상황은? 자세히 이야기해 보거라."

"그게.."

"밀리고 있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그럼?"

"...."

성기사가 우물쭈물거리자 리에티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금세 상황을 파악한 듯 성기사는 고개를 땅에 처박고 소리쳤다.

"저.. 전장에서는 팔라인이라는 준남작이 갑자기 나타나 현재 아빌론님을 도와 지휘봉을 잡고 있다 합니다!"

".... 팔라인?"

"예."

"우리 성국의 사람인가?"

리에티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성기사를 바라봤고 성기사는 확실한 목소리로 그에게 대답했다.

"예, 신원은 보장이 되어있습니다."

".... 팔라인...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군.."

"예 꽤나 우수한 성적으로 견습 기사를 끝내고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팔라인이라는 이름을 들으며 리에티는 턱을 만지작거렸지만 일게 준남작이 전장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내가 누워있는 짧은 시간 동안에 나타난 것인가..?"

"짧지는 않으셨습니다."

리에티는 짧지 않았다는 성기사의 말에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고 어느새 빠져버린 근육의 양에 얼마나 자신이 오래 누워있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누워있었지?"

"약 한 달가량 누워계셨습니다."

"제길."

죽지 않은 것은 천운이었지만 브라이언의 검에 다친 후 리에티는 자신이 꽤 오랜 시간 동안 침상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 자네들이 조용한 걸 보니 상황은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맞나?"

".... 그게."

"거짓 없이 답하거라."

잠시 주먹을 쥐고 화를 식히던 리에티는 문득 자신의 옆에 모인 성기사들이 조용한 것을 알고는 그들에게 물었다.

"예.. 팔라인 준남작은 꽤나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전장에 남아계신 아빌론님도 그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 내가 직접 봐야겠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군.."

"리에티님...!"

리에티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깊은 상처 탓에 비틀거렸고 그 모습이 불안한지 성기사들은 그의 팔을 잡았다.

"안됩니다, 아직 다친 곳이 아물지 않았습니다."

"크윽...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한다...!"

계속해서 리에티가 고집을 부리자 열 명이 넘는 성기사들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고 리에티는 당황한 듯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누워계셔야 합니다, 꼭 필요하신 일이라면 저희가 전장으로 달려가 그 자를 데리고 오겠나이다."

"후우.. 후우..."

"어서 누워계십시요, 가장 중요한 분이 이리 몸을 아끼지 않으시면 어찌합니까."

리에티가 신음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성기사들이 그를 만류했고 리에티는 강제로 다시 침대 위에 누워야만 했다.

"리에티님!!"

콰앙!

"...."

성기사들이 겨우 그를 눕히고 진정시킨 것도 잠시 문을 열고 한 기사가 빠르게 뛰어들어오자 성기사들은 일이 생긴 것을 알고는 그를 좋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무슨 일이지..?"

"이일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그러니 리에티님은 누워서 안정을..."

"아무리 그래도 상황을 보아하니 급박한 일 같은데 말하거라."

"깨..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리에티님! 그.. 그게."

"어허!"

성기사들은 입을 열려는 기사를 막으려고 했지만 리에티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성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그만 다들 뒤로 물러나."

".... 리에티님.. 아직 일을 하시기에.."

"내가 벌인 일이다."

"...."

"내가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알겠습니다."

리에티의 강경한 태도에 성기사들이 물러났고 리에티는 침대 위에서 다시 일어나 기사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무슨 일이지?"

"리.. 리에티님.. 정말.. 정말 이리 일어나시어 다행입니다."

".... 쓸데없는 소리는 됐고."

"그.. 그게.. 제단에 라스몬드 공작님이..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 라스몬드 공작이..?"

"예."

"날 부축해라 라스몬드 공작에게 간다."

예상 밖의 인물이 찾아왔다는 말에 리에티의 눈이 커졌고 그는 성기사들의 부축을 받아 비틀거리며 라스몬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이곳에 계십니다."

"이곳에..?"

리에티가 도착한 곳은 과거 라티에니가 머물렀던 방이었고 기사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라스몬드 공작님, 기다리시던 리에티 추기경님이 오셨습니다."

".... 라스몬드."

"오셨습니까?"

"제 부름에 응답해 주신 겁니까?"

"후후후..."

기사들을 물린 리에티는 방안에 있는 늙은 남자를 바라봤고 그의 옆에는 젊은 두 남자가 서있었다.

"라틴 인사하거라 리에티 추기경이시다."

"반갑습니다, 라스몬드 공작님의 아들 라틴입니다."

"라틴..?"

리에티는 과거 멀리서 보았던 라틴의 뚱뚱한 모습과는 달리 날렵하고 건강한 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과거에는 식사 조절을 하지 못하여... 아마 알아보기 힘드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못 알아봐 죄송하군요, 제가 보시다시피 몸이 좋지 않아.."

"이해합니다, 제 눈으로 봐도 몸이 많이 안 좋으시군요."

"옆에 있는 사람은..?"

"아 소개가 늦었군요."

옆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를 리에티가 바라보자 라틴은 그제서야 생각난 듯 그를 소개했다.

"제 호위 기사이자 현재는 저희 영지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기사입니다, 과거부터 재능을 보이더니 요새 들어서는 꽃이 만개하듯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라틴님.. 리에티님 처음 뵙겠습니다, 라스몬드 공작님과 라틴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 기사 핀입니다."

".... 핀.."

리에티는 핀의 또렷한 눈과 거친 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라틴은 미소를 지으며 핀의 등을 툭툭 쳐주었다.

"리에티님."

"실례했습니다, 라스몬드 경.. 라틴님 죄송하지만 아버지와 할 얘기가 있으니..."

"아, 저희가 눈치가 없었군요..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자신을 보는 라틴에게 라스몬드는 고개를 끄덕였고 라틴과 핀은 기사들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라틴님."

"쉿.. 핀 항상 목소리가 크구나."

".... 하지만.."

"눈이 많구나 핀, 다른 곳에 가서 이야기하자."

라틴은 성기사들과 하인들을 쓱 둘러보더니 어디론가 걸어갔고 핀은 그를 뒤따랐다.

"... 핀."

"네."

"어떤 것 같나?"

주변의 눈치를 보던 라틴이 귓속말을 하자 핀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에 서있는 성기사들을 가리켰다.

"... 검을 오래 잡지 않았던 자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귀족들의 자제들이 대부분이고..."

"아버지가 어찌하실 것 같으냐?"

"저로서는..."

라틴의 물음에 핀은 고개를 숙였고 라틴은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그의 어깨를 잡았다.

"너랑 내가 얼마나 됐지?"

"꽤.. 오래.."

"그리고 칠러웨이님과 데브라님이랑 산전수전 다 겪었고."

"...."

"솔직하게 네 의견을 대답해 봐."

"솔직하게 말입니까..?"

"그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 아무거나."

핀은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라틴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마 리에티님에게.. 도움을 주지 않을까 합니다."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나?"

"예.. 아무리 보아도 도움을 줘야 할 상황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으으음..."

라틴은 턱을 괴고 무언가 생각하듯 제단 주위를 둘러보더니 결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께서 그리하신다면."

"라틴님 설마.."

"그리하신다면 따라야지, 나는 그저 공작가의 도련님이니까."

"...."

핀에게 조금 실망한 듯한 기색이 보였지만 라틴은 개의치 않는 듯 방에서 나오는 리에티와 라스몬드를 바라봤다.

"실망했나 핀?"

"...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데?"

"아니라니까요.."

입이 삐쭉 나온 핀을라틴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걱정 마라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핀."

"예.."

"아무리 칠러웨이님과 데브라님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칠라렌 성국의 사람이다."

"예 알고 있습니다."

데브라가 톤 왕국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라틴은 그에게 힘을 보태어주고 싶었지만 자신은 칠라렌 성국의 사람이기에 그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예?"

"네가 일을 좀 해야겠다 핀."

라틴이 자신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짓자 핀은 분명 자신에게 힘든 일이 생길 것을 알았지만 그를 위해서는 자신은 목숨을 바칠 수도 있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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