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는 주먹으로
* * *
"이봐."
"...."
"이봐.. 내가 미안하다니까."
한 청년을 따라 숲을 걷고 있는 노인은 울상을 지으며 미안한 목소리로 청년을 잡으려 했다.
"잉?"
"...."
"어?"
하지만 신체능력이 꽤 뛰어난 청년은 그의 손길을 획 피해버린 뒤 자신이 가고 있던 길을 아무렇지 않게 걸어갔다.
"야!!!"
"..."
"야!! 칠러웨이!!"
결국 화가 났는지 노인이 크게 자신을 부르자 그제서야 칠러웨이는 뒤를 돌아봤다.
"왜요."
"왜요?"
"예 왜요."
".... 너는 존칭도 없냐?"
"예 잘나고 촉 좋으신 구레드'님' 무슨 일이신데요."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칠러웨이의 모습에 구레드는 당장 화를 낼 듯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지만 겨우겨우 참아내고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미안하다니깐.."
"이게 미안하다는 말로 끝날 문제입니까?"
"... 그.. 수상한 냄새가 나는 녀석이라 어쩔 수 없었어, 자네도 오해하고 달려들지 않았나?"
"기사들을 몇이나 죽일 뻔했습니다, 힘 조절을 해서 다행이지.."
"...."
칠러웨이의 말에 구레드는 혼나는 강아지 마냥 몸을 움츠렸고 그를 바라보던 칠러웨이는 이마를 짚고는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진짜... 다음부터 이런 일에 안 휘말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는데..."
"그 노예상의 우두머리를 잡는 것이라고 해도.. 그곳에 아무런 말도 없이 출입하는 건.. 충분히 오해를 살만한..."
"... 아직도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하시는 겁니까?"
".... 아니 그러니깐.."
"트레버 그 기사단장은 일이 크게 벌어지면 분명 연관된 귀족들이 모두 일어날 거라 생각한 겁니다."
"알고 있다니깐.."
"그러니깐 이제 인정 좀 하세요!"
칠러웨이의 다그침에 구레드는 한숨을 쉬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 알았다니깐.."
"더 이상 트레버와 공국 얘기는 하지 마시구요."
"... 그래.."
"실수는 실수입니다."
한참을 구레드에게 얘기한 칠러웨이는 한숨을 쉬고는 허리춤에 매달린 물통을 그에게 던져주었다.
"고맙네."
"... 그건 됐고.. 앞으로 어쩔 생각인지 여쭤봐도 됩니까?"
칠러웨이의 말에 구레드는 잠시 턱을 괴고 생각하더니 트레버에게 건네받은 양피지를 꺼내들었다.
"이게 용사의 명단이라고 했었지."
"예."
"이 얘기를 듣고 꽤 충격을 먹었었지, 여태껏 공국에 있는 대공들이 용사라고 생각했으니까."
"..."
"후우.."
구레드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한숨을 내쉬고 칠러웨이를 바라봤다.
"용사를 찾으면 피올레 대공과 한 약속이 틀어질 수도 있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 하지만 그녀의 자리를 보존해 준다고 약속해놓고 어기기는 참 어렵지."
"... 예."
입술을 꽉 깨문 채 자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던 피올레의 모습을 떠올린 두 사람은 마음이 착잡해졌지만 그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타나스의 사제들을 막는 것이었다.
"일단은 진짜 용사를 찾으면 피올레의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될 거라 생각을 하니까."
"... 그렇죠.. 그리고 떠날 때도 얼른 찾으러 가라고 했으니까요."
공국을 떠나기 전 두 사람은 피올레에게 들러 상의를 하려 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래, 타나스의 사제들이 나타났다면 용사는 이 대륙에 필요할 거야."였다.
"대공의 자리에 오래 앉아 있었으니 분명 대륙의 정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 일단 용사를 찾는 게 첫 번째 계획이지."
"두 번째는 뭡니까?"
칠러웨이의 물음에 구레드는 잠시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두 번째는.."
"뜸 들이지 말구요."
".... 내가 일단 공국에 남아있는 거지."
"예?"
갑작스러운 말에 칠러웨이는 장난치지 말라는 듯 그를 바라봤지만 구레드의 표정은 진지했다.
"아니.. 이제는 도망치겠다는 겁니까?"
"너는 말을 멋대로 해석하는 게 능력이더냐!"
"아니 맞잖아요! 힘들어 보이니까 바로 돌아가겠다는 것 아닙니..."
깡!
"후우.. 후우.. 버릇없는 자식."
구레드가 결국 화를 못 참았는지 지팡이로 머리를 때리자 칠러웨이는 "악!"소리를 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안 아픈 거 다 알아."
"고통은 느끼거든요!"
"이유도 안듣고 멋대로 생각하니까 짜증 나서 때린 거야 알아!?"
"그러니까 그 잘나신 계획이 뭐냐구요!!"
칠러웨이의 외침에 구레드는 한숨을 쉬더니 윗옷을 벗었다.
"도망가려는 게 아니다."
"뭐 하시는..."
"봐."
구레드가 옷을 벗자 칠러웨이는 그의 몸에 새겨져있는 수많은 상처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대륙 전체를 자네와 함께 돌아다니기에 이 몸으로는 무리가 있어.."
".... 고문입니까?"
"그래 꽤 오랜 시간 동안 당했지."
"...."
"피올레 대공을 설득하는 것까지는 어찌 따라와봤지만 이 나이가 되니까 휴식을 해도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미리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그랬으면 제대로 어른 대우해 줬을 거냐?"
"...."
"그리고 내가 말했어도 톤 왕국에 들러 나를 놓고 너 혼자 이곳으로 왔다면 몇 달은 더 걸렸을 거다, 이곳에 오기까지도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꽤 오래 걸렸으니까."
구레드의 말에 칠러웨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괜한 나뭇가지만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이 고문만이 문제가 아니야 감옥 안에 봤지?"
"예.."
"그 검은 물은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사람을 약화시켜."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
"지금은 괜찮으십니까?"
"죽겠지 뭐."
구레드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는 것을 칠러웨이는 알고 있었지만 그의 정정한 모습을 봐왔던 칠러웨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그 검은 물은 냄새로 인한 정신적인 부분보다 신체적인 능력을 아주 많이 떨어뜨려."
"...."
"게다가 늙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약해졌을지 상상도 안가."
구레드는 자신의 몸 곳곳에 있는 검은 반점을 씁쓸하게 바라봤다.
"뭐 어쨌든, 그런 이유로 인해서 혼자 가는 게 낫다고 하는 거다 위험상황이 와도 날 안 지켜도 되니까."
"만약에.. 양피지가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면.."
"그건 걱정하지 말고, 양피지 내가 살펴본 결과로는 그렇게 거짓말하는 것 같지 않아."
"뭘 보고 아시는 겁니까?"
"내 동물적 감각과 느낌."
"예?"
"감각과 느낌이라고."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
칠러웨이가 그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자 구레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내 촉이 한 번 따라가보라고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트레버 그자의 말이 의심이 가지도 않고."
"그 촉 때문에 분명 망하지 않았..."
"내 촉이 그렇게 틀리지는 않았잖아!!!"
"아니.. 그래도 뭐 안 맞았으니까.."
"이놈의 시끼..."
깡!
다시 머리를 맞은 칠러웨이는 입을 다물었고 구레드는 한숨을 쉬며 양피지를 가리켰다.
"어쨌든 노예상을 들락거린 것 맞지 않았나?"
"예.. 그건 그렇죠."
"거기 적힌 명단을 잘 살펴봐."
칠러웨이는 양피지를 펼쳤지만 왕국과 사람의 이름만 쓰여 있을 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 봤는데요?"
"잘 보라니까."
"...."
"펠 왕국 '사일트럴', 가르텐 왕국 '헤일 사미로', 칠라렌 '리에티', 톤 왕국 '브라이언', 헬하임 '마운트 디 바인', 하마르 공국 '왈츠 디 피올레', '크라운 디 만테'..."
양피지에 적힌 리에티, 브라이언, 왈츠 디 피올레의 이름은 X 표시가 돼있었고 칠러웨이는 몇 명의 이름을 더 읽어내려갔다.
"그 사람들이 누군지 아나?"
"모릅니다.."
"이 하마르 공국은 대륙의 귀족들이 모여있는 곳답게 다양한 정보들이 있지, 내가 알아본 바로는 대륙 전체에 있는 강자들을 적어 둔 거야."
"... 누구나 강해질 수 있지 않습니까?"
"누구나 다 강해질 수 없어, 자네가 가진 신체의 특별함은 특히나 보기 드물지."
"...."
칠러웨이는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구레드는 양피지에 적힌 몇 사람의 이름을 가리켰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맞는다고 생각이 드는 인물들은 사일트럴, 크라운 디 만테, 카를로스 만타움, 아인트 민 아이작 이 네 사람이다."
"이유가 있습니까?"
"특별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어, 내가 알기로는 과거에 나타난 용사 또한 검이 빛났다고 하더구만."
"...."
"자네가 얘기해 준 브라이언같이 최강의 검이라 불리면서 특별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 능력은 절대 흔하지 않아."
"...."
"나는 공국에서 피올레와 함께 용사의 자리를 만들고 있을 테니 자네는 신중하게 잘 살펴서 용사를 데려오길 바라네."
구레드의 말에 칠러웨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양피지를 품속에 넣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있는 불안감은 떨쳐지지 않았다.
"만약 용사가 저기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떡합니까?"
"기도해야지."
"...."
"키로스님은 간절히 기도하면 이루어주신다고도 얘기해, 내가 얘기한 네 사람을 모두 찾아 제대로 만나보고 돌아와."
"하아... 또 저만 귀찮게 됐네요."
칠러웨이가 한숨을 쉬자 구레드는 그에게 꿀밤을 먹이려 일어났지만 칠러웨이가 자신을 갑자기 껴안자 어벙한 표정으로 칠러웨이를 바라봤다.
"뭐야!? 징그럽게!"
"절대 죽지 마세요."
"...."
"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죽었는지 모릅니다."
"걱정 마라."
칠러웨이는 어느새 구레드를 일루안처럼 생각하고 있었고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같이 다녀서인지 구레드 또한 정이 많이 들어 칠러웨이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너도 절대 죽지 마라, 톤 왕국 구경시켜주기로 한 거 잊지 말고."
"금방 다시 돌아올게요."
"가봐."
구레드가 손을 휘젓자 칠러웨이는 고개를 꾸벅 숙여 그에게 인사한 뒤 숲을 빠르게 뛰어갔고 구레드는 그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어떻게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