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는 주먹으로
"..."
피로 물든 방 안에서 조용히 시신들을 내려다보던 칠러웨이는 한숨을 쉬고 빠져나가려 했지만 갑작스레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에 주변을 둘러봤다.
"무슨..."
칠러웨이가 뒤를 돌아본 순간 트레버의 시신이 꿈틀대더니 바닥을 짚고 벌떡 일어섰다.
"...."
칠러웨이는 당황한 듯 뒤로 물러섰지만 이내 터져나간 트레버의 머리에 피가 모이는 것을 보고는 조용히 주먹을 들어 올렸다.
"놀랐어."
"..."
트레버의 머리뼈가 다시 모여 움직이는 것은 기괴했지만 트레버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원위치로 복귀한 눈으로 칠러웨이를 바라봤다.
"나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이는 처음 만나보는데, 어디서 왔지?"
적의가 가득 차있었던 전과는 달리 트레버는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칠러웨이에게 물어왔지만 칠러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놀란 거냐?"
"...."
"너와 같은 능력의 인간이 존재할 줄은 상상도 못해서?"
"아니."
".... 그럼 왜 말을 안 하지?"
"내가 낯을 좀 가리거든."
칠러웨이의 농담에 트레버는 그의 말이 재밌었는지 거의 회복된 얼굴로 씨익 웃었다.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인데.. 뭐 먼저 공격한 것은 내가 사과하지."
"...."
"어디서 왔는지 말해줄 수 있나?"
트레버는 자신과 동족이라 생각했는지 칠러웨이에게 손을 내밀었고 칠러웨이는 그의 손을 쳐냈다.
"나도 몰라."
"....?"
"나도 모른다고."
"나를 공격하지 않고 보고만 있다는 건... 음... 그래, 자네의 질문을 받도록 하지."
"...."
칠러웨이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조용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친숙한 옆집 아저씨처럼 생긴 그의 모습은 칠러웨이가 상상했던 악당과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악인은 악인이었다.
"됐어."
"흠.."
"노예 시장을 운영하는 녀석에게 질문할 건 없다."
"운영?"
"그래."
"..."
칠러웨이의 말에 트레버는 잠시 생각하더니 뭐가 웃긴지 큭큭댔고 칠러웨이 또한 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그리 웃기지?"
"내가 운영을 한다?"
"그래."
"하하하하!"
"...."
"오해할만하겠군."
트레버는 자신의 상황이 파악이 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누워있는 기사들과 머리가 없는 노예 상인을 가리켰다.
"이 공국이 어떤 공국인지 알고 있나?"
".... 중립국이라는 거... 그리고 용사가 세운 나라라는 것.."
"그래, 잘 아는군."
트레버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뒤에 놓여있던 의자를 끌고 와 털썩 주저앉았다.
"미안하군, 회복해도 멀쩡한 자네랑은 달리 나는 체력이 꽤 소진되거든."
"...."
"이 공국은 자네 말대로 용사가 세운 땅이야 말 그대로 대륙의 전쟁을 막고 평화 유지를 하기 위한 땅이라 이거지."
자신의 말에 칠러웨이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트레버는 씨익 웃었다.
"하지만 이 땅이 세워지기 전과 후는 바뀐 것이 거의 없다 무슨 말인지 아나?"
"...."
"이해 못 한 표정이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용사는 평화를 유지할 필요가 있어 하지만 공국의 대공은 용사가 아니다."
"...."
"용사의 피를 잇기는 했지만 용사가 아니라는 뜻이지."
"그럼..."
칠러웨이의 이마에 주름이 깊어지자 트레버는 미소를 짓고는 옆에 있던 물을 들이켰다.
"공국에 오는 귀족들은..."
"알고 있어, 한자리를 꿰찼던.. 그런 사람들인 것."
"그래, 잘 아는군.. 그들이 모이면 항상 문제는 발생해 예를 들어 이런 것."
트레버가 창살을 가리키자 칠러웨이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은 몇 달 전부터 내가 관찰하던 곳이다, 삼일 정도 뒤면 꼬리가 밟힐 예정이었는데 오늘 변수가 나타났지."
"뭐?"
"내 아래 있던 기사들이 어디론가 다닌다고 해서 조심스럽게 접근하던 중이었는데.. 지금 일이 이렇게 돼서야 팔려간 녀석들의 위치도 알 수 없어졌지."
"...."
칠러웨이는 트레버의 말에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는 머리를 짚었다.
"온 지 얼마 안 됐다고 해서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다, 최대한 조심했어야 했는데 구레드.. 제국의 그 영감이 자네를 이곳으로 데려온 거지?"
"...."
"그 영감은 십수 년 전부터 이런 쪽으로 냄새를 잘 맡아서 제국에서는 노예상들이 거의 활동을 못했거든."
"제기랄."
"그렇게 자책할 필요 없다, 끄응.."
트레버는 회복된 머리가 아파지는지 잠시 신음 소리를 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니까."
"하아.."
"게다가 자네가 이 노예상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서 공격했던 내 잘못도 있으니 이건 서로 넘어가도록 하지."
트레버의 말에 칠러웨이는 미안한지 얼굴 표정을 펴지 못했지만 트레버는 통쾌하게 '하하하' 웃으며 칠러웨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나저나 이제 대답해 줄 수 있겠나?"
"뭘.. 말입니까?"
"이제서야 존댓말을 해주는군."
"죄송합니다."
"그래서?"
"...."
"자네 정체."
"...."
트레버의 직설적인 말에 칠러웨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모릅니다."
"...."
"이게 뭔 능력인지 몰라요, 눈을 떠보니 숲이었고 칼에 맞고 나서는 회복하는 몸을 보며 그제야 이상하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른다는 얘기구만."
"예."
트레버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손목을 검으로 그었다.
"뭘...?"
"잘 보시게."
트레버의 팔목에서 흐르는 피는 점성을 가진 듯 진득하게 바닥에 떨어지더니 마치 생명이 있는 생명체처럼 다시 몸으로 돌아왔다.
"...."
"어때 뭘로 보이나?"
"모릅니다."
"나는 정확히 펠 왕국의 칼레버 숲에 서식하는 '페루'라는 녀석과 조합된 인간이다."
칠러웨이는 트레버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다시 보니.."
트레버의 눈동자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날카롭게 서있었고 그의 몸 이곳저곳은 화상을 입은 듯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 페루라는 생물이 뭡니까..?"
"모르나?"
"예.."
".... 페루라는 건 펠 왕국 주민들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생물 중 하나야 죽이면 다음날 다시 살아나 있고 죽이면 다시 살아나 있는 뭐 그런 생물이지."
"...."
"그렇다고 해서 불사신은 아니야, 몸 안에 결정체를 보유하고 있지 나 같은 경우에는.."
트레버는 웃으며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고 칠러웨이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파괴되기 전까지는 죽지 않는다.. 이 말씀이시네요."
"그래, 회복하는데도 엄청나게 체력이 소모되어 팔이나 다리가 잘려나가면 삼일은 누워있지."
"...."
"그런데 머리를 터뜨렸으니 당장 쓰러질 지경이야."
"죄송합니다."
"아닐세."
트레버의 미소에 칠러웨이는 머리를 긁적였고 트레버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버티기 힘든지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당신 같은 키메라들을 누가 만들고 있는 겁니까?"
"사제."
"예?"
"타나스의 사제들."
"...."
칠러웨이는 자신이 마주쳤던 키메라를 만드는 사제를 떠올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자식들인가요.."
"자네의 경우에는 어떤 종류의 키메라가 들어갔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군.. 결정체 자체가 따로 있는 건가..?"
".... 죽지 않는 건 확실하죠."
칠러웨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트레버는 한숨을 쉬었다.
"트레버님은 왜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겁니까..? 타나스의 사제들이라면 대륙 전체에 널려 있을 텐데."
"나 같은 경우에는 그 녀석들을 잡으러 이 공국에 들어왔지만 전대 대공에게 은혜를 받았어."
"아.."
"속 안부터 썩어 문드러졌다는 것을 깨달았던 건 얼마 전이었고 공국을 바꾸기 전까지 절대 녀석들과 싸울 수 없다는 걸 알고는 근본부터 고치려 노력하고 있지."
"...."
"자네는?"
"헤라임 제국과 칠라렌 성국이 연합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칠라렌 성국 내에서 타나스 사제들의 움직임도 발견해 도움을 청하러 구레드님과 왔는데..."
"... 무슨 일인지 알겠군."
"예.."
트레버는 자신도 답답한지 시신들을 둘러보고는 품 안에서 양피지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건..?"
"원래는 안 보여주려 했지만.. 나보다는 자네가 적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트레버가 펼친 양피지 안에는 꽤 많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뭡니까?"
"내가 얘기했지, 지금의 대공은 진짜 용사가 아니라고."
"예."
"지금의 대공은 그저 용사가 나타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뿐이야 내가 선대 대공에게 들은 이야기이니 지금은 뭔가 잘못됐다는 거지."
"...."
"이건 내가 사람들을 전 대륙으로 보내 조사했던 후보들일세."
"후보들이요?"
"대륙에서 가장 강하고 용사에 근접한 이들이지."
칠러웨이는 명단 안에 브라이언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이 사람은 아닐 겁니다."
"그래?"
"예, 용사보다는 괴물... 그러니까... 인간이 아닌 그 무엇에 가까울 겁니다."
"오호.."
"성녀들은 조사해 보신 겁니까?"
"그들은 아닐세 용사는 키로스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다 들었거든."
"...."
꽤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트레버를 보며 칠러웨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트레버는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양피지를 칠러웨이에게 넘겼다.
"뭐 하시는...?"
"자네에게 부탁 좀 함세."
"....?"
"구레드 공작과 함께 왔다 했지?"
"예.."
"용사를 찾아주게 이곳은 내가 맡도록 하지."
"무슨...!?"
"자네가 실수한 것 알지?"
"...."
"뭐 그것 말고도 이미 구레드가 다른 이들에게 알리려 한 이상 나는 여기까지야 알다시피 나는 죽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고 그와 함께 당장 이곳을 떠나게."
"하지만...!"
"타나스의 사제들을 많이 만나본 결과 이대로 조용히 있을 녀석들이 아니야 이 공국은 말했다 싶이 너무 위험하네 아무리 소문의 구레드라도 살아남기 힘들어."
"트레버!!!!"
커다란 외침 소리가 들리고 문이 활짝 열리자 수비대장 파르마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자네가 이런 짓을 하다니!"
"파르마인! 오랜만일세!"
"칠러웨이 무사한가!!"
파르마인의 병사들이 자신의 주위로 몰려들자 트레버는 순식간에 그들을 밀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정신차려!!! 놓치지 마라!"
갑작스러운 상황에 벙찐 병사들에게 소리친 파르마인은 그를 쫓아 달려나갔다.
"구레드님."
".... 그 표정 뭐야.. 지원군을 데리고 왔더니."
"덕분에 더 피곤해졌습니다."
구레드는 칠러웨이의 표정을 보며 무언가 일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숨을 쉬었다.
"염병할.."
방안에는 구레드의 욕지거리만 조용히 맴돌았고 그들이 수습하기에는 이미 물은 엎질러져 범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