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전쟁의 서막과 연합의 움직임
* * *
"준비됐나!"
"예!"
"자! 가보자고!"
기병대의 맨 앞의 선봉에 있는 남자, 브라이언은 씨익 웃으며 헬름을 닫았다.
"톤 왕국을 위하여!"
"위하여!"
"돌격!"
브라이언의 외침과 함께 말에 올라탄 기사들은 순식간에 언덕 위를 내려왔다.
"쳐라!"
아직 해가 뜨고 있는 새벽, 칠라렌의 병사들은 잠에서 덜 깬 얼굴로 언덕을 내려오는 기사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끄아아악!"
"적습이다!!"
"모두 깨워!! 적습이다!"
"톤 왕국이 선제공격을 해왔다!!"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칠라렌 성국의 병사들과 기사들은 바쁘게 움직였지만 정예로 이루어진 브라이언의 기사들은 순식간에 칠라렌의 진영을 휩쓸었다.
"끄아아악!"
"...."
천막에서 나온 아빌론은 자신에게 달려오는 기사의 말을 맨손으로 넘어뜨렸고 기사는 목이 부러졌는지 잠시 들썩이더니 축 늘어져 버렸다.
"반갑소 아빌론!"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군."
"하하하! 어차피 붙을 것 아니었습니까?"
브라이언의 유쾌한 웃음에 아빌론의 머리에 힘줄이 서더니 그는 자신의 건틀릿을 차고 브라이언에게 덤벼들었다.
쩡!
검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며 브라이언의 말이 날아갔지만 그는 펄쩍 뛰어 아빌론의 앞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겨우 저 정도의 병력으로 우리를 부수러 왔나?"
"몇 명이던 타격을 입히면 그만 아닙니까! 하하핫!!"
아빌론이 순식간에 다가와 자신의 턱을 노리자 브라이언은 능숙하게 그의 팔을 쳐내고는 검을 휘둘렀다.
"....!"
가슴에서 피가 솟구쳤지만 아빌론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자세를 잡고 덤벼들 준비를 했다.
"몰아내라!!"
하지만 저 멀리 잠에서 깬지 얼마 되지 않은 리에티가 사엘라의 보호를 받으며 나오자 브라이언은 눈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 제길!"
아빌론은 그의 의중을 눈치챈 듯 그를 막으려 앞으로 뛰어갔지만 순식간에 열 명의 기사가 그를 덮쳐왔다.
"블라인!!!"
앞으로 나아갈 수 없던 아빌론의 외침에 기사들과 대치하고 있던 블라인은 팔라딘들에게 그들을 맡긴 채 브라이언에게 달려갔다.
"자네의 주인은 어디 갔나?"
".... 내 주인은 리에티님과 엘라님 두 분이다."
"팔라딘이라는 자가 그리 줏대 없어서야."
카앙!
브라이언은 블라인의 검을 튕겨내자 블라인은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었다.
"이런!"
결국 브라이언을 시야에서 놓쳐 버린 블라인은 주변을 살펴봤지만 이미자신에게 달려드는 두 명의 팔라딘의 목을 베어내고 리에티의 코앞까지 와있는 브라이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여인의 몸으로 기세가 대단하군! 아르웬님의 실력에는 못 미치지만 그 정도라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겠어!"
"당신이 감히 날 평가하다니..!"
사엘라의 빠른 검에도 브라이언이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검을 받아내자 그것을 지켜보던 리에티는 지휘를 포기하고 브라이언에게 달려들었다.
"드디어 소문의 주인공을 보게 되는군!"
"당신을 이곳에서 죽이겠습니다."
"그리하게!"
두 명이 달려들었음에도 브라이언을 막을 수는 없었고 오히려 사엘라와 리에티는 계속해서 밀려야만 했다.
"리에티님!"
"제길!"
쩡!
브라이언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을 빼들고 리에티의 팔을 쳤고 그가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은 멀리 튕겨나가 버렸다.
"큭...!"
"죽기 전에 이곳에서 돌아가게, 톤 왕국의 위대한 레온 폐하께서는 평화를 원하시니."
"...."
"어차피 칠라렌은 우리와 싸울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다시 얘기하지만 아르웬 성녀는 우리가 잘 보호할 테니 돌아가게."
"그럴 수는 없어!"
리에티는 자신의 품에서 단검을 빼들고 브라이언에게 덤벼들었지만 브라이언은 이미 눈치를 챈 듯 그의 왼팔을 베어버렸다.
"아아아악!"
"리에티님!!!"
"리에티 추기경!!"
그의 왼팔이 하늘에 떠오르자 사엘라와 블라인은 천을 꺼내어 그를 지혈했고 브라이언은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봤다.
"죽일 수 있지만 죽이지 않겠다, 성녀를 포기하지 않고 조용히 돌아가지 않으면 이걸로는 끝나지 않을 거야."
"브라이언....!!"
리에티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자신들을 습격한 브라이언을 올려다봤지만 브라이언은 검에 묻은 피를 옷소매로 슥 닦아내고는 주인 없는 말에 올라탔다.
"나는 헬하임 제국과 너희 칠라렌 성국을 상대할 의향이 있어 모든 건 준비되어 있고."
"이러한 비겁한 습격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 잘 알 텐데 브라이언!!!"
블라인이 그를 보며 눈을 치켜뜨자 브라이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상관없다, 톤 왕국의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다면.. 나는 더 심한 짓도 할 수 있어 그리고 전쟁에 비겁한 게 어디 있나?"
".... 개자식이.."
"승리하는 자가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것... 여기 있는 모두가 잘 알 텐데?"
"....."
블라인과 사엘라는 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리에티의 치료가 우선이었기에 쉽사리 그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이건 톤 왕국과 상관없이 내 스스로 너희에게 주는 '경고'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내 눈에 칠라렌의 칼끝이라도 보인다면..."
"...."
"자네들이 감당해야 할 걸세! 하하하! 자! 다들 물러난다!"
브라이언은 기사들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고 칠라렌 진영에 남은 것은 죽어있는 팔라딘들과 병사들뿐이었다.
".... 죽었나?"
"아직입니다, 아직.. 살아계십니다."
온몸에 피를 묻히고 있는 아빌론은 피를 많이 흘려 축 늘어진 리에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고 주변을 둘러봤다.
"물러난다."
"아빌론님...! 하지만...!"
"지휘관이 쓰러졌는데 전쟁을 치를 수는 없다.. 그가 다시 일어나거나... 대신 지휘봉을 잡을 사람을 구해야지."
"...."
"아니면 블라인, 사엘라 자네들이 해보겠나?"
"아닙니다."
블라인과 사엘라는 결국 고개를 떨궜고 아빌론은 팔라딘들에게 명령해 리에티를 마차에 태웠다.
"아빌론님."
"....."
아빌론은 조용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귀족에게 귀찮다는 듯이 팔을 휘저었지만 귀족은 그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 가라고 했을 텐데?"
"이대로 물러난다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 지휘관이 쓰러졌는데 전쟁을 할 수는 없어."
"아빌론이 맡으시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나는 리에티만큼의 능력이 없네!"
결국 귀족의 말에 아빌론은 화가 난 듯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허름한 옷과 갑옷을 입고 자신의 앞에 서있는 그는 능글맞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웃기나?"
"웃기긴요, 전혀 웃기지 않습니다."
남자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으려 노력했고 그럴수록 아빌론의 머리에 서는 핏줄이 점점 늘어갔다.
".... 자네를 이곳에서 죽여도 아무도 알지 못할 걸세."
"아아! 죄송합니다 아빌론님!"
오버스럽게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는 남자에게 아빌론은 결국 주먹을 들어 올렸지만 그는 뒤로 물러나 그의 주먹을 피했다.
"...."
"죽이기 전에 제 말을 끝까지 들어보시겠습니까?"
".... 제길.. 끝까지 짜증 나는 사람이군."
아빌론은 결국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남자는 아빌론이 앉아 있는 곳에 나무 상자를 끌고 와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라스몬드 공작과 하몬 백작에게 도움을 요청하실 생각입니까?"
"...."
"그들은 계속 전쟁을 반대했던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겠지, 지휘를 할 수 있는 귀족들은... 많지는 않지만 몇 있을 걸세."
"과거 군대를 이끈 일루안님이었다면 톤 왕국의 비겁한 선제공격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나타나셨을 텐데요 그렇죠?"
".... 나를 계속 열받게 할 셈인가?"
"아뇨! 죄송합니다!"
다시 남자가 웃으며 고개를 숙이자 아빌론은 주먹에 쥐었던 힘을 풀고는 시신들을 옮기는 병사들을 바라봤다.
"자네 말대로 그 녀석이었으면 바로 나섰겠지, 다른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 리에티가 권력을 잡은 이상 나서 줄 사람은 없을 걸세."
"제 생각을 들어보시겠습니까?"
"....?"
"지금은 기회입니다, 리에티님의 생각대로 아르웬님을 다시 돌려받고 칠라렌 성국의 입지를 대륙에 다질 수 있는."
"..... 기회?"
"예."
남자가 자신 있게 이야기하자 아빌론은 계속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빌론님과 리에티님은 엘라님을 유일한 성녀로 내세워 과거 성국의 위용을 되찾으실 생각... 아니신가요?"
"...."
리에티의 생각을 정확히 맞춘 남자의 말에 아빌론은 그가 수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지금 이건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기회입니다, 분명 톤 왕국에서는 저희의 선제공격을 기다렸겠지만 브라이언 공작은 톤 왕국의 생각과는 달리 겁을 주고 싶었겠지요."
"겁?"
"예, 언제든 자신이 나서면 지휘관을 죽이고 저희를 벌할 수 있다는 그런 건방진 생각 말입니다."
"...."
"지금 그것을 깨고 아빌론님께서는 톤 왕국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저들은 분명 준비돼 있을 걸세, 저항이 만만치 않을 텐데?"
아빌론의 말에 남자는 그의 손을 덥썩 잡았다.
"저를 써주십시요."
".... 너의 무엇을 믿고?"
"저를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이곳에 나온 귀족들은 모두 물러나길 원할 것이고 남은 추기경들 또한 후퇴를 바라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엘라님과 리에티님, 아빌론님의 입지는 성국에서 어떻게 될까요?"
"...."
남자의 말을 들으며 아빌론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봤다, 꼬질꼬질하지만 그의 굳센 눈빛과 여유로운 웃음은 분명 범상치 않았다.
"이름은?"
"팔라인입니다."
"팔라인..?"
"예."
아빌론은 어디선가 봤던 모습에 그를 자세히 바라봤고 팔라인이라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품에서 반지 두 개를 꺼내어 아빌론의 손에 주었다.
"이건...!"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지만... 여러 사람에게 부탁받은 것이 있어서 이리 먼저 찾아왔습니다."
"자네..."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아빌론님."
팔라인은 옷을 가다듬고 다시 아빌론에게 고개를 숙이며 씨익 웃었고 아빌론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일루안 후작님의 제자이자 라스몬드 후작님의 부탁으로 그분의 영지에서 온 준남작 팔라인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