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검은 탑과 두 기사
* * *
헬하임 제국의 황성을 관통하는 강 상류에서 거품이 일더니 여섯 명의 사람들이 순서대로 나왔다.
"허억... 헉.."
"괜찮나!?"
"저는 괜찮습니다, 나머지 세분은..!?"
"괜찮은 것 같네."
데브라와 클라인은 바닥에 엎어져 가쁜 숨을 내쉬는 네 사람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이 나이 먹고.. 헉... 억.. 이렇게 뛰어본 적이.. 있었나...?"
"팬저우드님 그러게.. 운동.. 하라고... 헉.. 허억..."
아르티네와 팬저우드는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데브라와 클라인이 업고 온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주변을 살폈다.
"그나저나 혼란을 틈타 잘 빠져나왔군."
"...."
늙은 노인의 눈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흰 자만 보이고 있었는데 그가 맹인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이 자는 왜 데리고 나온 겁니까? 데브라!"
".... 저는 모릅니다 팬저우드가 낸 아이디어라서."
"그렇다는데요?"
"갈리드님... 허억.. 헉... 잠시만.. 좀 이따.."
팬저우드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늙은 노인은 썩어버린 검은 치아를 드러내며 씨익 웃고는 땅을 만졌다.
"흙이 이리도 좋은 것인지 처음 알았는데... 멋지군."
"...."
갈리드는 흙을 매만지는 노인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당신 덕분에 아버님께서는 당시 큰 곤욕을 치르셨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 곤욕이라.."
노인은 그 순간 갈리드의 팔을 잡았고 갈리드는 팔을 빼내려 했지만 강한 그의 악력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검은 물의 냄새로도 그 역겨운 황실의 피는 숨길 수가 없지.. 안 그런가? 자유기사 데브라."
".... 날 아시나?"
"자네가 만 명이 넘는 내 기사들을 박살만 내지 않았어도 아마 5년은 덜 갇혀있었겠지."
"크흠... 뭐 그때는 반역이다 뭐다 해서 로드웰 폐하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니까..."
노인의 말에 데브라는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고 클라인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로드웰은 잘 지내는가..? 황실의 피여.."
"아버지는 쓰러지신 후 나를 검은 물이 있는 곳에 넣으셨다.."
"음."
"내 형인 파울로가 주도한 일이었지만."
"파울로가 누군지 나는 모르지만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분명 분노를 가졌군."
"...."
"하지만..."
순간 노인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살기가 그에게서 빠져나오자 데브라는 순식간에 검을 빼들어 그의 목을 노렸다.
"어이."
"....."
"그분과 이 사람들을 구하다가 죽을 뻔했다, 실제로도 내 동료가 저 밑에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상태로 있어.. 만약 여기서 싸움 한번 하겠다면..."
"설마."
"...."
"내가 아무리 감옥에 썩어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은 벌이지 않지."
"그만!! 그만!!"
두 사람의 기싸움이 이어지자 물을 모두 뱉어내고 정신을 차린 아르티네는 데브라의 멱살을 잡았다.
"칠러웨이가! 칠러웨이가 어떻게 됐다구요!?"
".... 검은 탑에 홀로 남았어, 폭발도 그 친구가 일으킨 것 같고..."
".... 왜 혼자 오셨어요!!!!"
아르티네는 데브라의 가슴을 치며 울먹였지만 데브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 친구가 살아온다고 약속했으니 꼭 살아올 거야 우리는 살아남는데만 집중하자고."
"왜 그렇게 확신을 하시냐고요!!!!"
"허허.. 젊은 처자가 목소리 한 번 우렁차군..."
"노인네는 빠져요!"
아르티네의 말에 시무룩해진 노인에게 갈리드는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당신... 누군지 압니다."
"오? 나를?"
"예.."
"다행이구만! 아직까지 내 이름이 남아있어서!"
"당연하지요.. 대륙에서 자유기사 데브라 다음으로 이름났던 기사를 어찌 기억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네가 황자인가!? 똘똘하게 생겼구나! 똘똘하게 생긴 녀석은 살아서 나중에 큰일을 해라!]
갈리드는 과거 황성이 불타고 있을 때 봤던 그의 모습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됐습니다."
갈리드가 고개를 돌리고 검은 물을 씻어내자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르티네에 이어 정신을 차린 팬저우드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이렇게 많았나?"
"당연합니다, 당시에 어렸던 제가 그쪽에게 목숨을 구원받았으니."
"음."
"분명 그때 그러셨죠, '나중에 내가 잡히면 살려주면 된다!'라고."
팬저우드가 손을 내밀자 노인은 그 손을 맞잡았고 팬저우드는 씨익 웃었다.
"감각이 발달하신 겁니까? 아니면 그 눈이 보이는 겁니까?"
"십오 년간 감옥에 있어보게, 자네도 미치기 직전에 감각이 모두 극대화되는 경험을 얻을 수 있을 걸세."
"사양하겠습니다."
"후후..."
"잠시만.. 저도 한마디만 해도 되겠습니까?"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던 중 클라인이 말을 가로채자 시선이 집중됐고 클라인은 저 멀리 황성을 가리켰다.
"칠러웨이가 시간을 끌어주는 동안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저기가 정리되는 것은 최대 2일... 빠르면 하루도 안될 겁니다."
"음, 그럼 당장 출발하지."
데브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클라인은 어디론가 휘파람을 불었고 산 중턱에서 수풀에 숨겨져 있던 마차가 다가왔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조심히 가십시요."
"다른 녀석들에게는 정보를 얻으라고 얘기하고.. 자유 기사들한테는 데브라가 톤 왕국으로 갔다 소문내게."
"예."
클라인과 몇 마디를 나누던 남자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데브라는 고맙다는 듯 그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가시죠."
마차 안에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은 일행을 보며 클라인은 계속해서 주변을 살폈고 데브라 또한 마차의 고삐를 잡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됐네, 마부로서는 늙은 녀석이 딱이지."
".... 칠러웨이는..."
"...."
마차가 흔들리며 움직이자 클라인은 황실 밑바닥에 남아있을 칠러웨이를 떠올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고 데브라 또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길을 바라봤다.
"죽지는 않을 게야."
".... 당신.."
"데브라 당신이라면 대충 알 텐데?"
데브라와 클라인은 몸이 고된 듯 마차 안에 누워 이야기를 하는 노인을 바라봤고 노인은 피식 웃었다.
"만들어진 존재는 그리 쉽게 죽지 않아... 그리고..."
"거기까지만."
"....."
"아무도 모릅니다, 저도 대강만 알고."
"그럴 리가.."
"그만."
"후후.."
노인은 순간 바뀐 데브라의 분위기에 그와 싸우기는 싫은 듯 짧은 웃음을 터뜨렸고 데브라 또한 인상을 펴고 한숨을 쉬었다.
"그가 누구던 상관없습니다, 모두는 아니지만 그 덕분에 구한 이들이 산더미입니다."
".... 음.. 그렇군."
"그나저나 데브라."
"말해라 아르티네."
아르티네의 부름에 데브라는 아까 전 보여줬던 표정은 어디 가고 딸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 노인네는 누구예요?"
".... 노인네.."
"아르티네.. 이 사람은 노인네라기보다는..."
"괜찮네, 반역자는 반역자이니."
"갈리드님.."
"이 자를 너무 높여 부르지 말게 팬저우드경."
"예."
자신의 호칭에 시무룩해진 노인을 보며 팬저우드는 당황한 표정으로 아르티네를 말리려 했지만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갈리드가 입을 열자 다시 자리에 앉았다.
"기사 도살자 가이덴 폴 겐, 반역자의 선두에 서서 제국의 모든 기사들을 죽이려 든 남자 맞습니까?"
"후후... 그 별명은 조금 오그라드니 빼주겠나?"
"어쩔 수 없습니다, 현 역사서에 적혀있는 이름이니..."
"가이덴이라고 불러주게, 이제는 그저 노인일 뿐이니 신경 쓰지 말고.."
갈리드는 그를 노려보며 주먹을 쥐었지만 가이덴 폴 겐은 미소를 지으며 보이지 않는 자신의 눈에 천을 묶었다.
"팬저우드, 얘기해 주세요 저자를 왜 구하자고 했는지."
"... 갈리드 황자님.."
"이제 황자라는 이름은 버렸습니다, 저는 그저 톤 왕국으로 망명하는 한낱 인간일 뿐."
"....."
팬저우드는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한숨을 쉬더니 가이덴의 옆으로 다가갔다.
"가이덴 폴 겐님."
".... 가이덴이라 부르라니까."
"저희에게 힘을 보태주십시요."
"....."
팬저우드의 부탁에 갈리드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가이덴 또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힘을?"
"예."
"팬저우드!!! 저자는...!!!"
"갈리드.. 그만."
갈리드는 불같이 화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팬저우드는 그를 가로막았다.
"스승으로서 너에게 말하겠다."
"...."
"우리는 이제 쫓기는 입장이며 나라, 영지 모든 걸 잃었어 파울로 황자는 분명 너의 라인에 있던 이들을 도륙하겠지."
"..... 예."
갈리드는 반박할 수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팬저우드는 조용히 가이덴을 바라봤다.
"십오 년 전 반란의 주동은 구레드 드 펠테로 공작이었다는 것 기억 나나?"
"...."
"정확히는 공작은 나라를 위해서 검을 들고 일어선 것이다."
"제가 알고 있는 역사는...!"
"모든 역사를 믿지 말라 이야기했지 않느냐?"
갈리드는 자신이 봤던 역사서와는 다른 것을 팬저우드가 말하려 하자 과거 거의 반죽음이 되어 돌아왔던 로드웰 황제가 떠올라 다시 주먹을 쥐었지만 팬저우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이야기해 주지."
"....."
"구레드 드 펠테로 공작, 그리고 나 가이덴 폴 겐이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던 것은 맞다."
"그렇다면... 반란이 아닙니까!!"
"맞지, 그 부분은 부정하지 않지.. 역사서에는 나와 구레드 공작은 최고로 나쁜 녀석들로 나올 게다."
"....."
"하지만 로드웰 황제는 그 당시 수만에 달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며 정복자 노릇을 했었다.. 그리고 그가 죽인 많은 시신들은 어디론가 사라졌었지 아무도 모르게."
"무슨 말을....!"
"이것 보이나? 그때 당시 조사하다가 생긴 상처일세."
가이덴은 역시나라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고 자신의 다리에 난 커다란 흉터를 보여주었다.
"칠라렌 성국에 몰려있는 키메라의 실험... 정체를 모를 누군가가 처음으로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하나?"
"....."
"구레드와 나는 그 주범을 로드웰이라 생각하고 있다."
"당신.. 무슨 소리를..."
"충격받는게 당연하겠지, 그 반란이 있고 난 후 십오 년간 잠잠했던 것 같으니.. 그 녀석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빠르게 진행하다 또 '반란'이 일어나면 안 되니까 긴 시간 동안 일을 천천히 진행하는 것 같군."
가이덴이 상처투성이인 몸을 만지작거리자 갈리드는 큰 충격을 받은 듯 주저앉아야만 했다.
"실낱같은 증거를 잡아낸 우리는 처음에 로드웰이 참회하길 바랐지.. 녀석의 어린 시절을 봐왔으니까..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가장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무슨 소리를..."
"데브라, 자네가 막아선 기사들은 당시 '무언가를'알고 있었어... 우리가 증거를 조금이나마 잡았을 그때 찾아온 그들은 내 기사들로 알려져 있었지만... 신관들과 팔라딘들이었지.. 하지만 모두 죽어버렸고.."
"거짓말을...!"
"결국 나와 구레드는 '미친 반란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로드웰 녀석에게 입이 틀어막힌 채 지하 감옥에 갇혀야만 했지.."
"...."
"시간이 없네 데브라, 톤 왕국이던 어디던 빨리 움직이게... 쉬기에는 시간이 너무나도 많이 지나버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