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기사로서의 도리
* * *
"세레나."
"...."
"무시하지 마~."
"... 그만하고 짐이나 챙겨."
"정말이야?"
"....."
"정말 이게 맞다고 생각하냐구~."
"... 맞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이야."
칠라렌 성국의 세 번째 성녀 세레나는 무작정 짐을 챙기며 자신의 동생과도 같은 마리아의 손을 맞잡았다.
"라스몬드 공작이 일단은 이 성국을 빠져나가라고 했어, 아르웬이 있는 톤 왕국으로 향하라고."
"라스몬드 공작은 힘은 잃지 않았지만~ 믿을만한 인물은 아니라니까~."
"그냥 좀 따라와!"
마리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세레나를 바라봤지만 세레나는 이미 결심을 굳힌 듯 그녀를 이끌었다.
"알겠어.. 갈 테니까 놔줘.. 리에티 녀석이 족쇄를 채워놓아서 힘이 거의 다 빠졌단 말이야~."
"회복은 가면서 해."
"하지만~."
"가야 해, 리에티와 그를 추종자로 모인 젊은 귀족들에게 죽기 전에."
"....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못 나가도 가야지."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응~?"
마리아는 계속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세레나에게 물어왔고 세레나는 화가 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정신 차려! 나가기 어렵다는 이유로 이곳에서 머문다면 우리는 분명히 죽어!"
"죽는다? 누가 말입니까?"
"...!!!"
"어딜 이렇게 몰래 빠져나가시는 거지요?"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사엘라가 그녀들을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던 거지?"
"... 다급하게 옷을 챙기실 때부터입니다."
".... 사엘라, 비켜.. 우리는 너의 주인과 악연이 없어."
"악연이 없다.. 정말 그럴까요?"
".... 분명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리에티님의 명령에는 마리아님을 풀어주라고 하신 명령이 없었으니."
"...."
세레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사엘라는 검을 뽑아들고 그녀의 목에 겨눴다.
"자리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님 또한 방으로 돌아가시고.."
".... 우리는 빠져나가야 해서 말이야."
"세레나~ 이러다 진짜 죽어~."
"조용히 해 마리아!"
세레나는 자신의 품에서 단검을 하나 꺼내들었고 마리아는 자신의 언니가 걱정스러운지 말리려 했지만 세레나는 그녀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죽으실 거라는 것을 알고서도 나가려 하시다니.. 머리가 어떻게 되신 겁니까?"
"살려면 해봐야지."
"후후... 어리석네요."
사엘라의 비웃음 섞인 말에 세레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어찌 됐던 방법은 생기기 마련이라서."
"....!"
"미안하구나 사엘라! 조금 비켜서 거라!"
"당신...!"
세라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엘라의 옆에서 누군가가 달려왔고 그 엄청난 속도에 그녀는 겨우 반응하며 검을 들어 올렸다.
"벡... 커!"
"반갑구나, 블라인과 함께 토벌을 나갔다 들었는데 언제 돌아온 건지."
"..... 크윽!"
"안타깝구만.. 조용히 나갈 수 있었는데, 리에티 그 녀석이 똑똑하기는 똑똑해."
"당신.. 죽었다고 들었는데..."
"미안하지만 아니야."
"당신을 막아야 한다면.. 어쩔 수 없죠...!"
사엘라가 다시 자세를 잡았지만 아빌론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벡커는 그녀에게 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궁지로 몰아넣었다.
"아직은 부족한가 보구나!"
"이이.... 익..!"
벡커의 엄청난 힘에 사엘라는 벽에 처박힐 수밖에 없었고 놓친 검을 주우려 했지만 어느새 자신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 있는 라이칸을 올려다보았다.
"라이칸... 당신까지..!"
"마리아님은 내 주인이시니 내가 데려가마 불만은?"
".... 없습니다."
결국 사엘라는 두 팔을 들 수밖에 없었고 라이칸은 마리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늦은 것 같군요."
"아니 라이칸.. 잘 와주었어~ 기다리고 있었다구~."
리에티에게 감금당해 야윈 마리아의 모습에 라이칸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기사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성국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캉!
"후~ 이제 살 것 같네~."
마리아의 발목에 묶여있던 족쇄가 라이칸의 검에 끊어지고 마리아는 그제서야 몸이 편해졌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벡커, 계획은 짜고 날 구했겠지?"
"계획이라.. 모든 계획이 짜져있지는 않네 라이칸, 그저 라스몬드와 하몬이 대충 탈출 경로를 짜놓았을 뿐."
".... 그 둘이 웬일이지?"
"리에티가 교황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성녀들을 빼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겠지.. 자네는 두 성녀님을 모시게 내가 앞장서지."
벡커가 주변을 살피며 앞으로 걸어나가자 라이칸은 두 성녀를 보호하며 그를 따라갔다.
"라이칸 어떻게 빠져나온 거지?"
"... 조금 일이 있었습니다."
세레나의 물음에 라이칸은 자신의 몸에 있는 상처들을 가리켰다.
"마리아님을 지키다 기사들이 모두 죽고 저 혼자 남았을 때 온몸이 묶인 채로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너의 움직임을 막으려면... 그 정도는 해야겠지.."
"정원사... 아니 벡커가 갑자기 나타났고 열쇠를 하나 던져주더군요."
"열쇠?"
"예, 그러고는 '때가 되면 나오라.'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었습니다."
".... 벡커가 모두 생각할 만큼 저렇게 똑똑했나."
"으음~ 아닐 거야."
마리아의 말에 세레나는 그녀를 돌아봤고 마리아는 힘이 돌아온 듯 환하게 웃으며 일행이 주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주변에 환각을 펼쳤다.
"아마도 벡커의 뜻이 아니라 교황... 라티에니의 뜻일 거야."
세레나는 마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라티에니는 분명 성왕이라 불릴 만큼 강단 있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자신들을 칠라렌 성국으로 부른 시점부터 그는 무언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만한 사람이지.. 죽을 때까지 그의 의중을 파악한 이가 아무도 없었으니까.."
"도대체 무얼 알고 있었기에..."
"쉿."
"...."
네 사람은 복도를 계속해서 걸어갔지만 새하얀 갑옷을 입고 있는 아빌론이 천천히 앞에서 걸어오자 몸을 긴장시켰다.
"성녀들은?"
"아직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마리아 성녀는 족쇄를 채운 채로 방에, 라티엘은 온몸을 묶어 지하실에 던져놨습니다."
"... 세레나 하나만 남았군.."
"예."
"그녀를 찾는 대로 내게 보고하고 계속해서 감시를 붙여라 어떻게 빠져나갈지 모르는 여자이니."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흩어지고 아빌론은 네 사람의 앞에서 멈춰 섰다.
"...."
무언가 느낀 듯 아빌론은 계속해서 주위를 살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나오게."
"...."
"다 보이니 나오라는 말일세 벡커, 라이칸... 그리고 두 성녀."
"대단하군."
아빌론의 말에 벡커는 두 성녀를 자신의 뒤로 보낸 채 검을 들었고 그에게 검을 겨눴다.
"자네와 싸우기는 싫네."
"....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내주겠는가?"
"...."
벡커의 눈을 바라보던 아빌론은 무언가 고민이 되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대신, 라티엘은 안됩니다."
"..... 알겠네."
"그녀는 리에티에게 많은 죄를 지었으니.. 그녀까지 당신들에게 내어준다면 리에티가 굉장히 화를 내겠지요."
"고맙네 자네."
"당신 때문에 보내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아빌론은 벡커에게서 눈을 떼고 세레나를 바라봤다, 엘라와 같은 백발을 가진 그녀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봤고 그 초록색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당신의 세 번째 약속 때문이지요."
".... 고마워 아빌론."
"더 많은 시간을 봐드릴 수는 없습니다.. 어서 가시길."
세레나에게 인사를 받은 아빌론은 그들을 지나쳐 조용히 복도를 걸었다.
[저에게 홀로 찾아오다니, 무슨 일이십니까 세레나.]
[세 번째 부탁은 아빌론 당신에게 할게.]
[무슨 수작이십니까?]
[전혀.. 이 성국에서는 더 이상 지내기 싫어, 리에티는 분명 내가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것 때문에 죽이려 발악하겠지.. 그전에 도망가는 게 좋아.]
[.....]
[그의 비밀을 알려줄게 그러니.. 조만간 내가 마리아와 라티엘을 탈출 시킬 때 모르는 척했으면 좋겠어.]
[.... 비밀..?]
[그래.]
아빌론은 과거를 떠올리며 세레나가 간 길에 놓여 있는 조그만 양피지 조각을 주워들었다.
"...."
'헬하임 로드웰과 성국의 예비 교황 리에티는 서로 알고 있다.'
"리에티.."
아빌론의 머리에 힘줄이 섰고 아빌론은 치솟는 분노에 주먹을 쥐었다.
".... 어찌.. 과거를 망친 이와 손을 잡는단 말인가... 어찌..."
하지만 세레나가 남긴 글은 심증일 뿐 확증은 없었다, 정치와 관계에서 무지했던 자신이 한심스럽고 짜증 났지만 지금이라도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여 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세레나~."
"...."
"어떻게 아빌론을 꼬신 거야~?"
"꼬신 거 아니야."
"흐응~."
마리아가 놀리듯 그녀를 콕콕 찌르며 물어왔지만 안 그래도 좁은 길을 지나가고 있는 상황이 짜증 났는지 세레나는 그녀를 째려봤다.
"나중에 알려줄 테니까 그만해."
"흐응~ 미워~."
마리아의 어린아이같은 모습에 세레나는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아르웬과 함께 왔다면...'
아르웬은 이미 반란군의 수장이라 불리고 있는 일루안과 칠러웨이 두 사람과 톤 왕국으로 향한 후였고 자신 또한 그녀를 다시 만나야만 했다.
'우리는.. 모두 있어야 완벽하니까..'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세레나의 눈빛이었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성국의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모든 건 너만 알고 있거라.]
[왜죠 교황님..? 이걸 알린다면...]
[그래야 모두가 산다.]
라티에니의 마지막 말, 그것은 자신이 모든 걸 포기하고 성국을 빠져나오게 만들었다.
"... 아르웬과.. 그 남자를 찾아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