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기사로서의 도리
* * *
"멈추게."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산 중턱에서 멈춰 섰고 선두에 선 남자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 왜 그러십니까? 데브라?"
"이상하군."
"뭐가 말입니까?"
아르티네와 팬저우드, 갈리드의 구출의 목표를 띄고 톤 왕국을 나선 데브라의 일행은 계곡을 조심히 지나 아르티네의 영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활발해야 할 마을에 사람은커녕 아무도 없는 모습에 데브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멈추는 것이 좋겠네."
"하지만.."
"리타는 빠르게 구출하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리타가 데브라와 칠러웨이만을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려 딸려보낸 카일록은 예상대로 데브라의 말에 태클을 걸었고 데브라는 그를 조용히 바라봤다.
"자네 말대로 리타는 그렇게 명령했지, 우리 셋이었다면 움직이기 편했겠지만 뒤를 보게."
카일록은 데브라의 말에 자신의 뒤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기사들을 바라봤다.
"...."
그 중에는 자신을 믿고 칠라렌 성국에서부터 따라온 기사 또한 있었으며 브라이언의 영지에서 가장 재빠르다는 이유로 뽑혀온 젊은 기사 또한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 예."
"아무리 '빠르게' 구하라는 명령을 내렸어도 자네와 나는 톤 왕국의 기사로서 최대한 우리를 따라온 기사들이 죽지 않는 방향으로 그들을 구하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말일세."
"죄송합니다."
카일록은 자신이 한 과거의 실수들이 떠오른 듯 고개를 숙였고 데브라는 그런 그의 모습을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는 나에게 미안해야 할 것이 아니라 기사들에게 미안해야 하네, 그리고 모두 잃는다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겠지 지금의 자네처럼."
"... 예.. 맞는 말입니다."
"자네는 아직 젊어서 실수를 해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내 나이가 되어보면 모든 게 머리 안에 똑똑히 박혀 계속 떠오를 거야 밤이던 낮이던 죽어간 이들의 얼굴은 절대 잊을 수 없네."
"....."
카일록은 동의하듯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데브라는 다시 주변을 살피기 위해 눈을 돌렸다.
"뭐가 보이십니까?"
"... 음.."
칠러웨이의 물음에 데브라는 잠시 생각을 하듯 턱을 괴며 말했다.
"자네는 보이는가?"
"아뇨.."
"신체능력이 뛰어난 자네가 보이지 않는다면 늙은 나는 어떻겠나?"
"... 뭐.. 저야 잘 모르죠..?"
"나도 보이지 않네."
"...."
칠러웨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데브라를 바라봤고 데브라는 그의 표정에 씨익 웃더니 다시 아르티네의 영지를 살폈다.
"하지만 나처럼 늙은이들에게 있는 본능이 하나 있지."
"어떤..?"
"위험 감지."
"위험 감지 말입니까..?"
"그래.. 허구언 날 전쟁이 벌어지는 이런 대륙에서 오래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떻게 해야 살아남는지 자동으로 터득해져."
"아.."
말을 끝낸 데브라는 조용히 영지의 한구석을 가리켰고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린 칠러웨이의 눈에 커다란 나무가 들어왔다.
"저건?"
"커다란 나무에는 항상 무엇이 있는지 아는가?"
"... 잘 모르겠는데요?"
"큰 나무에는 항상 새와 동물들이 서식하는 법이지.. 하지만 저 나무에 새나 동물들이 보이는가?"
"적어도 제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요."
"그렇지? 그건 동물들이 다 도망갈만한 큰 소리나 많은 인간들이 저곳을 다녀갔다는 소리네."
".... 그렇다면.."
"저 영지에는 톤 왕국과 전쟁을 위한 병력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이 말이지."
"...."
데브라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듯 칠러웨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데브라는 자신의 검을 허리춤에 찬 후 언덕을 내려가려 했다.
"잠깐! 어디 가십니까?"
"... 정찰을 가네만..?"
"지휘관이 정찰을 가다니 말이 됩니까?"
"... 이게 자유 기사의 일..."
"이제 자유기사가 아니시지 않습니까?"
"...."
데브라는 칠러웨이의 말에 적응이 되지 않는 듯 머리를 긁적였지만 이내 자신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내젓는 카일록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구만 내 위치를 망각했어."
데브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하자 칠러웨이는 카일록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언덕을 빠르게 내려갔고 그 뒤에는 두 기사가 따라붙었다.
"조용히 이동합니다, 적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보이면 바로 물러날 테니 알고 계시구요."
"예."
칠러웨이가 방향을 가리키자 기사들은 빠르게 흩어졌고 그는 가장 위험한 성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
성벽에는 전에 전투가 일어났었던 듯 핏자국이 군데군데 묻어있었고 칠러웨이는 성벽 위를 올려다봤다.
'너무 조용하다.'
데브라의 말처럼 수상할 정도로 조용한 영지를 살피던 칠러웨이는 조용히 성벽을 올라갔고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느껴지는 피비린내에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지독한 새끼들.."
칠러웨이가 숨어서 지켜본 성안의 모습은 굉장히 참혹했는데 영지민들을 남녀 가릴 것 없이 피 웅덩이에 모아놨고 그곳에는 어린아이들도 보였다.
"황자와 황제란 사람이... 자국의 백성을..."
이빨이 뿌득뿌득 갈렸지만 칠러웨이는 그나마 어딘가에 살아남아 있을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팬저우드의 영지로 가야 한다! 빨리 움직여!"
칠러웨이가 반쯤 몸을 내밀고 있었을 그때 갑작스레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리자 칠러웨이는 쌓여있는 물건 사이로 몸을 숨겼다.
"그런데.. 너무 많이 죽인 것 아닙니까?"
"너무 많이 죽이긴.. 반란군의 영지인데 저기 모아놓은 녀석들도 아니라고 하지만 어쨌든 간에 반역자 아르티네에 도움을 준 영지민이야 죽이는 건 당연해."
"... 아무리 그래도.."
"그만!"
젊은 기사가 시신들을 보며 마음이 좋지 않은 듯 말하자 중년의 기사는 그의 머리를 툭 쳤다.
"다시 얘기하지만 반역자들에게 쓸데없는 감정을 주지 마, 우리는 명령만 받고 그대로 이행만 하면 돼 알았어?"
".... 예."
"네 마음을 높으신 분들 앞에서 절대 꺼내지 마라 알았어? 너 위해서 얘기 해주는 거니까 쓸데없는 말하지 마."
"...."
"같은 인간을 죽이는데 기분이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 나도 너랑 똑같아 알았어?"
"예.. 죄송합니다."
"내가 아니라 다른 기사였다면 당장에 네 목을 베어버렸을거다, 조금만 참으면 금방 끝날 일이니 만약 정 못하겠으면 선임들한테 부탁해 알았어?"
"예."
두 기사가 지나가고 물건 틈에서 머리만 빼꼼 내민 칠러웨이는 두 기사를 따라 조심스레 움직였다.
"뭐 하다 이제 왔어!"
"죄송합니다, 병사들이 너무 굼떠서..."
"아 됐고! 빨리 움직여! 곧 황자님이 오신다고 하니까 시신들 정리하고 영지 안에 숨어있는 기사 녀석들을 색출한다!"
'기사들은 모두 안 죽었다는 건가?'
칠러웨이는 자신을 숲까지 데려다준 후 부상을 당해 영지로 돌아왔던 케미안을 떠올리고는 숨을 죽이고 그들의 뒤를 계속해서 따라갔다.
"칠러웨이."
"허업...!"
하지만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봤고 뒤에 서있던 여인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들키려고 하는 거야?"
자신의 뒤에 서있던 것은 다쳐서 누워있던 엘로나였는데 그녀는 뭐가 즐거운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를...?"
"데브라에게 들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다쳐서 누워있었는데 어떻게 왔냐구?"
"네."
엘로나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조용히 자신의 배를 보여주었다.
"...."
배에는 큰 상처가 나있었고 칠러웨이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의 배를 바라봤다.
"그렇게 보면 부끄러운데."
"그 몸으로 왜 오신 겁니까?"
"그야 칠러웨이를 따라왔어."
".... 그러니까.."
칠러웨이는 엘로나에게 화를 내려 했지만 무언가 떠오른 듯한 엘로나의 얼굴에 입을 다물었다.
"페르온이 죽기 전에 '칠러웨이님은 안전할까요?'라는 말을 남겼거든."
".... 엘로나."
"뭐랄까.. 마음에 걸렸어 그 말이... 일어나자마자 너는 떠났다고 하고 그래서 바로 달려왔지."
엘로나의 옷은 조금 무리를 한 듯 이미 피범벅이 되어있었고 칠러웨이는 그녀를 어깨를 붙잡았다.
"돌아가세요 부탁드립니다."
".... 칠러웨이 나는 괜찮아."
"그 상처가 뭐가 괜찮다는 겁니까?"
"...."
칠러웨이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그녀를 끌고 가 앉히고는 품에서 꺼낸 천을 그녀의 배에 덧대주었다.
"얼른 가세요, 엘로나님까지 잃기 싫습니다."
"하지만 도움이 될 텐데?"
"....."
"너와 같이 왔다는 리타라는 사람이 그랬어, 분명 내가 가준다면 도움이 될 거라고."
"그 뒤 얘기는 들었습니까?"
"... 아니."
"분명 리타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 상처로는 짐입니다.'라는 말을 하려 했을 겁니다."
".... 그래도 돌아가기는 싫어."
"하아... 왜..."
"같이 있고 싶다고 얘기했잖아, 더 이상 내 주변의 사람을 잃기는 싫어."
"...."
잠시 엘로나의 침울한 얼굴을 바라보던 칠러웨이는 어쩔 수 없이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내밀었다.
"어딘가 아프면 바로 숨겠다고 약속하세요 그럼 같이 가겠습니다."
"...."
"아니면 저 혼자가구요."
"알겠어."
칠러웨이가 내민 손을 엘로나는 맞잡았고 칠러웨이는 한숨을 쉰 뒤 기사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걸어가며 허리를 숙였다.
"어때 보여?"
".... 잘 모르겠습니다, 시신들은 한곳으로 몰아넣고 기사들까지 찾아 나서고 있는 것 같은데.."
"케미안도 살아있을까?"
"그래서 따라가는 겁니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성벽을 따라 걸었고 어느 순간 들려오는 검이 부딪히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엘로나?"
"...."
멀리 볼 수 있는 엘로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머리를 내밀었고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칠러웨이를 바라봤다.
"케미안이야."
".... 엘로나는 이곳에 있으세요."
"...."
"다시 얘기하지만 피가 흐르는 그 배를 부여잡고 싸우는 건 보기 싫습니다."
"알겠어."
엘로나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숨자 칠러웨이는 주변을 바라보더니 저 멀리 검을 휘두르고 있는 케미안을 바라봤다.
"... 잠시만 기다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