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자유를 사랑한 기사의 검은 제국을 향한다
* * *
"하아... 하아.."
차가운 바닥 위에 얇은 천만 걸친 채 거친 숨을 내몰아 쉬고 있는 여인은 엉망진창이었지만 눈빛만은 살아있었다.
".... 아르티네."
"....?"
"아르티네인가?"
완전히 쉬어버린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아르티네는 고개를 치겨들고는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옆방에 귀를 댔다.
"아.. 르티네.."
"팬저우드 후작님!?"
"쉿.. 너무 큰 목소리로 말하지 말거라."
아르티네의 큰 목소리에 팬저우드는 목소리를 낮추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고 아르티네는 자신의 실수에 입을 막고는 작은 구멍으로 벽에 기대어 앉아있는 그를 봤다.
"몸은.. 몸은 괜찮으신가요?"
".... 후후.. 데브라와 함께한 시절이 얼마인데 이 정도야 거뜬하지."
".... 정말.."
아르티네는 갑작스럽게 올라오는 눈물에 울컥했지만 팔로 눈물을 슥슥 닦고는 벽에 기대었다.
"팬저우드님까지 잡는다는 말이 있었는데... 저항이라도 하시지."
"영지민들이 있는데 어찌 저항을 하겠나?"
".... 그건 그렇죠.."
팬저우드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아르티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짧아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고문을 당하고 온 것 같은데... 너는 괜찮은 거냐?"
".... 네.. 파울로.. 그 새끼... 저를 가지고 놀고 있어요."
"아르티네, 목소리가 너무 크다고 했지 않느냐."
"...."
큰 목소리로 아르티네가 파울로의 욕을 하자 팬저우드는 실소를 지으면서도 그녀의 안위를 걱정해 말을 자중시켰지만 아르티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처형당할 몸인데.. 욕 좀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 그건 그렇구나."
팬저우드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아르티네가 안타까운 듯 아르티네가 기대고 있는 벽을 조용히 바라봤다.
"파울로는 우리를 가두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더냐?"
"....."
"무슨 말을 하긴 했나 보구나."
"... 그 녀석이 가만히 있겠어요..?"
"이 황자 님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긴 하지."
아르티네는 고문실로 찾아와 자신의 배에 주먹질을 하며 미소를 짓던 파울로를 떠올리고는 눈을 감았다.
"자신에게 온다면 풀어준다고 이야기했어요."
".... 역시나 그건가?"
".... 네.. 황비가 되라고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어요.. 아직 황제는 죽지도 않았는데."
"이번에 치료사가 들어간 후로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는 것을 들어보면... 아마 파울로가 그 독에 연관이 있겠지."
"바튼이 찾아와 조금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과거에는 맑았던 정신으로 황좌에 앉아계셨던 분이 갑자기 성녀 이야기를 들으니 미치광이처럼 발작하셨다고 해요."
"..... 바튼 녀석도 아직은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았구나.. 너에게 그런 이야기까지.."
".... 그는 충직함의 표본이니까요,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정도는 구분할 줄 아실 겁니다."
두 사람을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들이 갇혀있는 감옥의 창살을 바라봤다, 최악의 범죄자들만이 온다는 황실 최하층 바로 위 감옥에 있는 그들에게 찾아올 수 있는 이들은 드물었고 검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데브라가 자유기사들을 모두 끌어온다고 하더라도 탈출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갈리드 폐하는.."
"이 아래층에 계시지."
".... 검은 물의 감옥에.."
"그래.. 그 최악의 곳에 계신다."
"갈리드 폐하라면 조금이나마 정신을 유지하시겠죠."
".... 아니면 완전히 미치거나."
헬하임 제국 황실의 최하층에는 과거 발견한 일명 '검은 물'이라고 불리는 것이 가득 차 있었는데 황제들은 반역을 일으키거나 연쇄살인 등을 일으킨 이들을 그곳으로 보내곤 했다.
"과거 반역죄를 일으켰다는 명목으로 갇혔다 겨우 누명을 벗고 풀려난 자의 말을 들었을 때 사람이 갈만한 곳이 아니더라고 하더구나.. 마실 물도 벌레조차 다니지 않는 그곳에서 하루만 더 있었어도 미쳤을 거라고.."
그곳에 다녀와 처형장으로 끌려온 이들은 모두 몸이 검은 물로 뒤덮여 있었으며 그 역한 냄새와 독한 점성으로 인해 몸에서 제대로 씻기지도 않았다.
"상황을 뒤집으려면... 어떻게 해아 할까요..?"
"우리로써는 방법이 없지, 이런 곳에 갇히면 연락조차 불가능하니."
".... 데브라가 헬하임으로 와 저희를 구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아마 그는 우리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을 거다."
"...."
아르티네는 자신의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가지고 톤 왕국과 이어진 협곡으로 급히 떠난 바튼을 떠올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제 머리카락을 잘라갔어요."
".... 머리카락을?"
"네."
"... 네 밝은 금발은 특이하니 데브라도 한 번에 알아볼 수밖에 없을 거야."
"죽은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서 가져갔을 수도 있겠군요."
두 사람의 침묵이 잠시 이어졌고 팬저우드 후작은 잘린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봤다.
"나도 손가락이 잘렸어."
".... 용케 살아계시네요."
"손가락 정도야 잘린다고 죽지는 않아, 하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 제대로 된 치료사가 치료를 해주는 것이 아니니.. 상처가 분명 썩겠지.."
"그렇겠죠.."
팬저우드가 손가락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하자 마음이 아픈 듯 아르티네는 그에게 들리지 않게 조용히 눈물을 흘렸고 팬저우드는 그녀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희소식은 너를 얻기 전까지는 파울로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거다...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알겠지?"
".... 시간을 끌어야 한다 그 말씀이신가요?"
"최대한, 선을 넘지 않을 정도로 그를 다뤄.. 갈리드 황자님을 위해 누군가는 이 황성을 칠 기회를 보고 있을 거다 파울로는 귀족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멍청하다고 소문이 나있으니 그가 황제 폐하를 죽이고 황제가 된다면..."
"나라가 휘청이겠죠."
아르티네는 잘 알겠다는 듯 마음을 고쳐잡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갈리드 폐하 또한 구출해 내야 하니.. 일단은 방법을 생각해야 하네."
"...."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면 데브라는 분명 다시 돌아올 거다, 아직 너에게 속죄하지 못한 것도 있으니 그는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 다른 나라에서라도 검을 잡을 거야."
"그리고 자유 기사들은 그의 움직임에 따라서 모여들겠죠."
"현재로서는 가장 큰 확률로 그는 톤 왕국에 들어갔겠지.. 그곳의 브라이언 공작이라면 분명 헬하임 제국을 칠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또한 성녀를 지키려면 그렇게 꼭 해야 하고."
"잡히지 않았을까요?"
"두란트들을 그렇게 무시하지 말거라, 그들의 피를 이어받은 바튼을 보면 알겠지만 전장에서 하루 종일 싸워도 지치지 않는 몸을 가졌어."
"순종이라면.."
"더 오래 싸울 수 있겠지.. 하지만 바튼 그 녀석은 엄청난 녀석이라 이미 두란트들을 벗어났으니 논외로 치고."
"...."
과거 자신의 영지에 홀로 지원을 온 그는 대량으로 나타난 코루들을 단신으로 쓸어버렸고 침묵의 숲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그는 삼일이 넘는 시간 동안 영지를 침략해온 코루들의 시체를 몇 천마리나 쌓아올렸었다.
"괴물이죠.. 그 사람은."
"황제는 가장 중요한 무기를 얻었었지만 자식 복이 없었으니.. 참 아쉬울 따름이지."
"갈리드 황자님을 세우셨다면..."
"파울로는 그래도 자신의 편을 만들어 황제를 쳤을 게다."
"...."
"칠라렌 성국의 라스몬드 공작과 연락도 얼마 남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일이 터지다니.."
팬저우드는 성녀의 문제 때문에 자신이 보냈었던 전령을 떠올리고는 한숨을 쉬었고 아르티네 또한 갈리드와 계획하고 있던 파울로의 제거 작전이 무로 돌아가 머리가 아파졌다.
"어이 떠들지 말라고."
쾅쾅!
의자에 앉아 졸고 있던 병사는 두 사람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자 창살에 다가와 몽둥이를 휘둘렀고 아르티네와 팬저우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찌하면.."
팬저우드는 한숨을 쉬며 이미 사라진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의 단추를 보았다.
"...."
무언가 생각이 난 듯 팬저우드는 단추와 간수를 번갈아 바라봤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는 있나 보구나 아르티네."
"... 네?"
"먹히면 좋으련만..."
"조용히 하라니까!"
잠에서 깬 병사가 화가 난 얼굴로 다시 다가오자 팬저우드는 창살에 가까이 붙어 그에게 얼굴을 디밀었다.
"뭐 하는 거야? 때려달라고?"
"자네,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지 않나?"
".... 무슨 개소리야."
"이 어두운 곳에서 나가 햇살이 비치고 따듯한, 더 좋은 곳으로 가고 싶지 않냐는 거지."
".... 계속해 봐."
팬저우드의 말에 병사는 그의 창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팬저우드는 10개의 단추 중 하나를 뜯어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뭐야 이 더러운 건.."
"내가 이리저리 뒹굴고 피가 많이 묻어 잘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 단추는 보석이네."
"..... 보석?"
병사는 단추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전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팬저우드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에 다른 단추를 하나 더 올려주었다.
"그 단추는 에펜헤임이라 불리는 보석 중 하나일세, 빛도 투과하지 못하고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새까만 보석이라 인기가 좋지."
".... 믿어보지."
"그 두 개는 내 얘기를 들어주는 값이라고 생각해 주게."
"... 음음."
병사는 팬저우드의 말에 손을 다시 내밀었고 팬저우드는 능숙하게 그의 손바닥 위에 하나의 에펜헤임을 더 올렸다.
"그 정도면 자네 식구들이 평생 써도 남을 돈일세."
".... 이게 그렇게나 비싸다고?"
생전 처음 받아보는 큰돈에 놀란 병사였지만 이내 그의 입은 귀에 걸려 내려오질 않았다.
"자네가 간수장이 아니라 열쇠가 없어 이 단추들을 강제로 뜯어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 뭐.. 그렇지."
"내 옷에는 그것 말고도 다른 보석들이 많이 달려있어."
".... 원하는 게 뭐지?"
이미 침을 질질 흘리며 창살로 다가온 병사는 팬저우드에게 귓속말로 무언가 듣자 고민하는 듯하더니 머리를 벅벅 긁었고 팬저우드는 그의 손에 하나의 에펜하임을 더 얹어주었다.
".... 자네도 귀족들과 똑같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이네, 딱 서신 몇 개만 보내주고 한 사람만 살리면 되네."
"으으으음...."
"내 어차피 죽을 목숨인지라 나를 살려달라는 어려운 부탁은 안 하지 않나? 그냥 몇 가지만 챙겨주면 되네."
"으으음...."
병사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에펜하임을 주머니 안에 넣고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신을 전해주고 그 증표를 받아오면 된다는 얘기지 그리고 네가 얘기한 사람만 안 죽을 정도로만 살려놓으면 되는 거고."
"맞네."
".... 좋아 까짓것... 어렵지 않은 부탁이니 들어주지 하지만 약속한 건 잊지 마."
"이봐! 교대다!"
"잠깐 기다려! 금방 갈게!"
교대시간이 다가왔는지 병사는 팬저우드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간수와 이야기를 나누며 계단 위로 사라졌고 아르티네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맨날 좋은 옷만 입으시더니.."
"그날따라 가장 비싼 걸 입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 과소비하는 습관이 저희를 살릴 수도 있겠네요."
"나도 그러길 비네 아르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