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자유를 사랑한 기사의 검은 제국을 향한다
* * *
"어쩔 수 없군요."
바튼은 아르웬이 들고 있던 검보다 더 큰 그레이트 소드를 뽑아들더니 천천히 앞으로 걸어왔고 브라이언은 그를 보며 씨익 웃었다.
"바튼 공작, 후회는 없나?"
"제가 말입니까?"
"저기 저 사람이 안 보이는 건가?"
"...."
바튼은 주저앉아 있는 데브라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이내 그의 표정은 늘 그래왔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없습니다."
"그럼 됐네."
말이 끝나자마자 브라이언의 검이 휘둘러져왔고 바튼은 그의 검을 쉽게 막았지만 브라이언이 들고 있던 아르웬의 검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
"잊진 않았겠지."
"물론!"
두 개의 검을 휘두르며 자신을 공격하는 브라이언의 모습은 상당히 위협적이었지만 바튼은 익숙한 듯 계속해서 그의 공격을 막아내며 압박에 벗어나려 애를 썼다.
"롤란!!!!"
그 순간 바튼의 외침에 대기하고 있던 롤란이 브라이언에게 다가왔지만 데브라를 위로하고 있던 칠러웨이는 능숙하게 브라이언의 옆에 서서 그를 막아 세웠다.
"실력 대 실력인데 둘은 너무 비겁하지 않나?"
"흥!"
"롤란! 다른 기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게!"
바튼이 브라이언의 검을 힘겹게 막으며 소리치자 롤란은 손을 들어 올렸고 두란트들을 에워싸고 있던 제국의 황실 기사단은 방향을 바꿔 브라이언과 칠러웨이에게 다가왔다.
"....!"
"죄를 지었어."
하지만 그들의 앞에 헝클어진 흰머리로 아무런 표정도, 감정도 없는 빈 눈동자를 한 채 한 남자가 걸어왔고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은 자리에 멈춰 섰다.
"제길..."
"그러게 말했지 않았나, 자네들은 실수한 거라고."
"..... 상관없습니다, 폐하가 일어나 결정하신 일이니..."
"자네는 그 충성심이 문제야."
바튼과 브라이언의 공방전이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기사들은 자신들의 앞을 막아선 데브라를 상대로 누구 하나 먼저 나서지 않았다.
"바.. 바튼님이 위험하다! 상대는 늙은이 하나! 우리는 백이 넘는 숫자다!! 겁먹지 마!"
"나는.. 죄를.. 지었어 아주 큰 죄."
한 기사의 외침에 용기 낸 다섯 명의 기사의 목은 순식간에 바닥에 떨어졌고 그들의 피가 데브라에게 튀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들을 잃고 친구의 딸까지 잃었으니 이제 미련이 없다."
"...."
"이제 나에게 지킬 것은 너희 제국에 남은 나의 아이들뿐."
기사들이 주춤거리고 있을 때 텅 빈 데브라의 눈에서 초점이 돌아왔고 그들을 향해 데브라는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마... 막아!!!!"
"끄아아악!"
도륙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데브라는 그들을 단 한 합도 내주지 않은 채 목숨을 빼앗아갔고 자신만만하게 덤벼오던 젊은 기사들의 검은 두 동강이나 바닥에 떨어졌다.
"바튼."
".... 예 롤란."
"일단 후퇴하지."
"파울로님의 명령은 이곳에서 성녀를 낚아오는 거였습니다, 이곳에서 물러난다면..."
"정신 차려 바튼, 제국에서 데브라와 브라이언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자네와 나 외에 아무도 없어 여기서 우리 둘 다 죽어버리면 전쟁 전에 황자님이고 폐하고 모두 작살 날지도 몰라."
"...."
바튼은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브라이언을 자신에게서 떨어뜨리고는 말위에 올라탔다.
"그 몸집에 맞는 말이 있을 줄이야."
"아무리 하프라도 맞는 물건은 있는 법이지요."
두란트와 인간의 하프인 바튼을 올려다보며 브라이언은 미소를 지었지만 바튼은 그의 미소가 불쾌한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지금은 자네와의 친분 때문에 그냥 보내주지만 다음은 없네."
"...."
"데브라님이 더 화를 내시기 전에 제국으로 돌아가 전쟁 준비를 하게, 그곳에서 만나지 바튼."
"...."
"자네와 롤란의 기사들은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아무래도 시간 끌기 밖에 안될 테니... 나조차 제대로 상대하기 버거운 상대인데 이길 수 있다면 남게."
"후퇴한다! 달아날 수 있는 자들은 빠르게 협곡에서 빠져나간다!"
바튼은 미련 없이 롤란과 함께 사라졌고 칠러웨이는 그들을 따라가려 했지만 브라이언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짓입니까?"
"자네는 남자가 아니던가?"
".... 맞죠."
"남자라면 도망가는 상대의 뒤는 잡는 게 아니야, 전장에서라면 몰라도."
".... 쳇."
남자라는 말에 약한 칠러웨이를 어느 정도 파악한 브라이언의 말에 그는 뒤쫓아가는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어떡하실 겁니까? 브라이언."
"글쎄."
이미 피를 뒤집어쓰고 기사들의 머리를 든 채 살기를 내뿜고 있는 데브라를 보았다.
"사.. 살려... 크억!"
한 기사가 발버둥 치며 그에게 벗어나려 했지만 데브라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목을 베어버렸고 남은 제국의 기사들은 주저앉은 채 벌벌 떨거나 울음을 터뜨렸다.
"... 저래서는 기사라기보다.."
"인간의 본성이네 칠러웨이."
처음 황실의 기사들을 봤을 때 봤던 당당한 태도는 어디 갔는지 그들은 사자 앞의 토끼와도 같았고 데브라는 조용히 그들의 목을 베어냈다.
"데브라."
"막지 말게."
"그만하십시요."
하지만 보다 못한 칠러웨이가 나서자 데브라는 그를 노려보았지만 칠러웨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 중에는 명령을 받고 나온 기사들도 있습니다, 무고한 이들이라는 거죠."
"아르티네와 내 아들을 죽이는데 동조한 이들인데 자네가 나라면 봐줄 수 있겠나?"
"이들은 아직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지금 동료를 잃은 우리의 적은 헬하임 제국의 황제와 황자 아닙니까?"
"비키라고 말했네."
데브라가 으르렁거리며 검자루를 움켜쥐자 칠러웨이는 몸을 움찔거렸지만 그의 앞을 비켜서지는 않았다.
"칠러웨이 말이 맞습니다, 그만하시길."
".... 브라이언 자네까지 이해 못 해주는 건가?"
"이미 많이 죽이셨습니다."
"... 자네가 나라면 어땠을 것 같나?"
"지금은 그만했을 것 같군요."
쩌엉!
브라이언의 말에 데브라가 검을 휘둘렀지만 브라이언은 검을 막아내고는 그의 가슴을 발로 찼다.
"...."
"그만하시라 말씀드렸습니다, 당신과는 싸우기 싫습니다.. 지금은 성녀가 먼저입니다."
"내 아들이 죽었다고 이야기했잖나!!!!!"
브라이언의 검을 부술 듯 데브라의 검이 쏘아져 들어왔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그의 검은 브라이언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만하라는 겁니다!"
"이 아이의 아내가 저기서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시신만 가져간다면!!!!"
"...."
"도대체.. 도대체 아비로써 내가 이 아이에게 뭐가 되겠나!"
데브라의 검이 다시 한번 휘둘러지고 브라이언은 한숨을 쉬며 막으려 했지만 그의 앞에는 이미 칠러웨이가 서있었다.
"....!"
그가 서있는 것을 보며 데브라는 검의 궤도를 틀려 했지만 이미 늦은 타이밍이었고 결국 칠러웨이의 팔이 저 멀리 떨어져 나갔다.
"그만하세요."
".... 칠러웨이.."
"데브라님 마음을 브라이언 공작과 제가 모르는 게 아닙니다."
"...."
"지금은 때가 아니니 그만하라는 겁니다, 저기 어린 두란트들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두란트.."
"그래요 일단 톤 왕국으로 저들을 피신시키고 나서 복수를 해도 늦지 않습니다, 저도 도움을 받았으니 똑같이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돌아가시죠."
"...."
칠러웨이의 말에 데브라는 얼굴을 감싸 쥐고 주저앉았고 브라이언은 걱정된다는 듯 칠러웨이에게 다가왔다.
"괜찮나?"
"금방 다시 붙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피가 실처럼 쭉 늘어나더니 팔을 붙였고 칠러웨이는 그 모습이 익숙하지 않은지 팔을 잠시 움직여 본 후 데브라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가시죠."
"...."
"곧 해가 지겠습니다, 키메라들이라도 나오면 저기 체체로님한테 혼납니다."
"피렌디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네.. 칠러웨이.."
"늘 하던 대로."
"...."
"늘 하던 대로 하십시요, 데브라님... 아드님은 잘 묻어주면 되고요."
"아아..."
데브라는 자신만만했던 페르온을 혼자 보낸 것이 후회되는지 눈물을 흘렸고 브라이언은 그가 안타까운 듯 등을 두들겨주었다.
"칠러웨이."
"예."
"데브라님은 나와 함께 가겠네, 자네는 성녀를 두란트들과 함께 왕국으로 데려가게."
"괜찮으시겠습니까?"
"아까 못 봤나? 헬하임 제국의 기사들이 더 나타나면 나보다는 데브라님에게 몰살당할걸세."
".... 그건 그렇죠."
두 사람의 무력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봤던 칠러웨이는 그들을 뒤로하고 두란트들이 지키고 있는 아르웬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르웬."
"...."
"아르웬."
"으음..."
그녀의 눈이 떠지고엘라의 오드아이와는 다른 느낌의사파이어 같은 푸른 눈동자가 그를 바라봤다.
"칠러... 웨이?"
"예, 뭐 하는데 이렇게 오래 주무십니까?"
칠러웨이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자 아르웬은 기다렸다는 듯 그를 껴안았다.
"미안해... 미안해.."
"뭐가 말입니까?"
"또... 칠러웨이의... 친구를... 지키지... 못했어.."
그녀의 더듬거리는 말투에서도 그녀가 얼마나 칠러웨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느껴지게 했고 칠러웨이는 조용히 그녀의 등을 툭툭 두들겼다.
"...."
페르온의 시신은 정말 많은 검에 공격당한 듯 찢어졌다는 표현이 들 정도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고 그의 옆을 지키고 있던 체체로 또한 안타까운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프.. 아니 그 엘로나라는 여자와 아르웬 성녀, 페르온이 열심히 싸워주어 우리가 살 수 있었네.. 그냥 우리를 내버려 두고 톤 왕국으로 향했으면 모두가 살았을 텐데."
"그렇겠죠 체체로.... 지나치다가 연을 맺은 저도 못 버린 분입니다."
".... 데브라가 젊은 시절 이 아이를 데려왔을 때 분명 지 아비처럼 클 거라 장담했었는데... 아까운 사람을 잃었군."
".... 좋은 곳으로 가실 겁니다."
"그래야 할 텐데."
아직 절반 밖에 안 감긴 눈을 감겨주며 칠러웨이는 자신의 품 안에서 울고 있는 아르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체체로는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키로스 신이여.. 페르온을 불쌍히 여기어 좋은 곳으로 인도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