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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화 〉 쓸모없는 도련님과 견습 기사 (57/90)

〈 57화 〉 쓸모없는 도련님과 견습 기사

* * *

"드디어 왔군."

"그러게 말입니다."

옷이 키메라의 피로 더워진 일행은 톤 왕국의 한 영지 앞에 서있었다, 영지의 성벽은 무언가 일이 있었는지 피로 물들어 있었고 병사들의 표정 또한 좋지 않았다.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헬하임 제국에서 오는 길이네."

"저 숲으로 말입니까?"

데브라의 말에 남자는 꽤 놀란 듯 눈을 크게 떴고 데브라는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됐고 들여보내 주겠나?"

"통행증을..."

"아 통행증이라면 제가.."

라틴이 앞장서서 자신의 번쩍번쩍한 통행증을 내밀려 했지만 데브라는 그의 손을 잡았다.

"자네 통행증은 안돼."

"예?"

"톤 왕국에 칠라렌 성국의 핵심 귀족이 나타났다고 하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

"자네를 사로잡으려 달려오거나 쫓아내려 안달이겠지."

"... 아.."

"현재 톤 왕국과 칠라렌의 긴장감은 최고조야 무슨 말인지 아나?"

"예.. 이해했습니다."

데브라는 라틴에게 충고를 해준 뒤 자신의 품속을 뒤적거렸다.

"이거면 되려나?"

데브라는 병사의 손에 자신의 백금패를 올려뒀고 병사는 놀란 듯 백금패와 그를 번갈아 보았다.

"데... 데브라...?"

"자유 기사 데브라네."

".... 무.. 문을 열어!"

병사가 자유 기사 데브라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알리자 영지의 기사들은 헐레벌떡 성문으로 뛰어왔고 데브라는 과한 관심에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와.."

"진짜 데브라잖아?"

"몇 개 없다는 백금 자유기사인가.."

기사들은 감탄사를 연신 내뱉으며 데브라를 바라봤고 일행은 부담스러운 관심 속에서 한 여관으로 들어왔다.

"아 어서 오세요."

"방 세 개만 주시오."

"예."

"식사는 세끼 모두 부탁합니다."

데브라는 은화 열 닢을 테이블에 놓고는 고된 몸을 의자에 뉘었다.

".... 이렇게 인기가 좋으시다니."

"... 뭐.. 기사들한테는 그렇지."

"항상 어딜 가던 이렇게 관심받으시는 겁니까?"

".... 항상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아마 아르티네의 영지 밖으로 너무 오랜만에 나와 다들 몰려든 걸 거야."

데브라는 실제로 오랜만에 톤 왕국에 등장했고 그의 파급력은 상당히 대단해 영지의 귀족 타미르에게까지 전해졌다.

"뭐?"

머리가 아픈 듯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타미르는 병사의 말에 고개를 들었고 병사는 희망에 찬 표정으로 그에게 다급하게 얘기했다.

"그.. 그 자유 기사 데브라가 저희 영지에 나타났습니다."

병사의 얘기를 들은톤 왕국과 헬하임으로 이어지는 숲을 지키는젊은 귀족 타미르는 눈을 크게 뜨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걸 왜 이제 전하는가!"

타미르는 다신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는 얼굴로 잠옷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옷을 챙겨 입었다.

"어.. 어디 가십니까 타미르님? 저희가 말씀드려 이곳으로..."

"귀한 분이 오셨다는데 당연히 내가 나가봐야지."

타미르는 헐레벌떡 성에서 뛰어나와 그들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향했고 데브라를 보기 위해 모여든 기사들과 영지민들을 뚫고 여관 안에 들어섰다.

"응?"

"헉.. 헉... 데브라님 맞으십니까?"

"... 그렇소만?"

"저는 이 영지의 주인인 타미르 자작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데브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 좋은 미소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타미르는 감격에 찬 눈빛으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이렇게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아 이렇게 안 하셔도 됩니다, 한 영지의 주인이 저에게 고개를 숙이다뇨."

"아닙니다, 데브라님이라면 어떤 대륙의 사람이든 이해할 겁니다."

"과찬의 말씀을.."

타미르와 데브라의 대화는 길어졌고 그들이 훈훈한 모습을 보이는 동안 따듯한 음식들이 테이블에 놓였다.

"아! 이곳에 있지 마시고 성으로.."

"아뇨 괜찮습니다, 저희가 민폐를 끼치려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니라."

"아.."

데브라의 몸에 묻어있는 키메라의 피를 보며 타미르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기사들을 물린 후에 의자를 가져와 일행의 옆자리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합석하게 되어.. 제가 항상 책으로만 봤던 영웅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듣고.."

"아닙니다."

"저희는 괜찮아요."

타미르의 예의 바른 모습에 칠러웨이와 피렌디는 고개를 내저었다.

"라틴 천천히 먹게."

"아.. 예! 따듯한 음식은 오랜만이라..."

"먹는 건 적당히 먹고."

"으음... 예!"

라틴이 배가 고팠는지 음식을 마구 입안으로 집어넣자 칠러웨이는 그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까 걱정했지만 이내 음식을 깨끗이 비우고 포크를 내려놓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이곳까지 어째서 오셨습니까? 그냥 오신 건 아닌 것 같고.."

"... 아 그게.."

데브라의 물음에 타미르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하지 못했고 데브라는 편하게 얘기해 보라는 듯 음식을 먹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저희 영지의 일을 해결해 주실 수 있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영지의 일..?"

"아.. 예."

"그런 건 다른 영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되는 것 아닌가?"

".... 그게.. 저희 톤 왕국은 귀족끼리의 사이가 상당히 좋지 않습니다.."

"음... 무슨 일인지 들어나 볼까?"

데브라는 팔짱을 끼고 타미르를 바라봤고 타미르는 조용히 품 안에서 구겨진 양피지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두었다.

"이건?"

"그게.. 얼마 전 영지에 양피지 하나가 키메라에 묶여서 배달이 됐습니다."

".... 키메라에?"

"예.. 키메라는 마치 의지가 있는 것처럼 성문 앞에 다가오더니 이 양피지만을 놓고 갔다고 하더군요."

"...."

타미르의 얘기를 듣고 데브라의 얼굴은 심각하게 변했고 칠러웨이 또한 식사를 멈추고 그의 옆으로 다가와 양피지를 훑어보았다.

[영지를 버리고 떠나라.]

".... 이건.."

"이 단어만 쓰여있었습니다.. 그리고 사건은 얼마 전에 벌어졌습니다."

"어떤 일이었지?"

"키메라가 공격을 해왔습니다, 상급 키메라가 열 마리 하급이 백 마리.."

".... 그래서 성벽이 그 모양이었던 거군."

"예.. 겨우 막아내긴 했지만 기사의 절반이 죽고 병사들 또한 피해가 막심합니다."

"키메라라면 멍청한 녀석들이라 성벽을 이용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 아뇨."

타미르는 그때의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는지 눈을 감았고 그의 옆에 서있는 한 기사는 이미 사라져 없는 자신의 팔 한쪽을 바라봤다.

"....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 거대한 몸으로 화살을 맞으며 성벽을 기어올라오는 키메라들을.. 저희는 막을 수 없었습니다."

".... 기어올라?"

데브라는 그의 얘기를 들으며 믿을 수 없었다, 키메라들이 영지에 나타날 때마다 그들은 멍청하게 성벽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으며 영지에 나타난 키메라들의 처리는 그만큼 쉬웠다.

"예.. 기어올랐습니다.. 일반 화살과 검으로는 그들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

"결국 영지의 기름을 모두 사용해 목숨을 바쳐 달려든 기사들과 함께 키메라들을 불태웠고 지금은 막아낼 여력이 없는 상태입니다."

"자네가 결국 하고 싶다는 얘기는.."

"데브라님은 전설이라 들었습니다, 저희를 한 번만 도와주십시요.. 부탁드립니다 이 모든 영지민을 대피시킬 수는 없습니다... 또한 영지를 잃는다면 분명 다른 귀족들 밑에서 이들은 천대받겠지요 그러니... 한 번만 도움을.."

타미르는 고개를 숙이며 데브라에게 부탁했지만 데브라는 곤란한 표정으로 피렌디와 칠러웨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브라이언 공작은 뭐하고 있지?"

".... 브라이언 공작님에게 연통을 보내보았지만 보내는 족족 숲 어디엔가 매복해있던 키메라들에게 전령들이 죽어나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 이런."

데브라는 그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결국 이곳을 통해 브라이언에게 도달하려면 숲에 있는 키메라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는 얘기였고 그만큼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데브라님."

"그래 칠러웨이."

"그런데 키메라가 지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말이 됩니까?"

".... 아니 역사적으로 그런 키메라들은 없었네."

칠러웨이의 말에 데브라는 고개를 내저었고 그의 말에 칠러웨이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짚히는 것이 있나 칠러웨이?"

".... 제가 칠라렌 성국에 머무를 당시 키메라를 만들던 장본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 정말인가?"

"예.. 겨우 죽이긴 했지만 그 후에 토벌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남자?"

데브라 또한 칠러웨이의 말에 무언가 생각이 나는 듯 턱을 괴고 그를 바라봤다.

"사에트."

"....!"

"그 남자의 이름은 사에트였습니다, 구울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냈고 제가 죽인 사람이 만들어낸 키메라들을 조종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사에트.."

사에트라는 이름을 되뇌며 데브라는 자신의 검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렌디 너는 여기 저 아이들과 있거라."

"네?"

"위험할 수 있으니 여기 있으라는 말이다."

"아.. 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진지한 모습에 피렌디도 당황했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고 그는 조용히 칠러웨이를 바라봤다.

"칠러웨이."

"예."

"갈 건가?"

잠시 고민하던 칠러웨이는 라틴의 몸에 묶여있던 검들을 풀고 자신의 허리춤에 맸다.

"당연합니다, 제가 겪었던 모든 일의 시작이 키메라들이니.. 어떤 녀석이 저들을 조종하고 있는지는 봐야죠."

"잘 생각했네."

"그리고 아르웬님도 이해하실 겁니다."

두 사람이 여관에서 나서자 남은 타미르와 피렌디는 멀뚱멀뚱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아.. 감사 인사를.."

"하아.."

타미르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그녀는 나중에서야 골치가 아픈 듯 손을 내저었다.

"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 똑같은 성격이 저렇게 만나가지고... 머리 아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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