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6화 〉 쓸모없는 도련님과 견습 기사 (56/90)

〈 56화 〉 쓸모없는 도련님과 견습 기사

* * *

"잘 따라오고 있구만."

"예."

숲 바위 위에 앉은 두 사람은 얼굴에 피를 묻힌 채 여유로운 표정으로 뒤를 바라봤다.

"핀도 어느 정도 하급 키메라들은 처리할 짬이 됐군."

"잘 가르쳐 주신 덕 아니겠습니까?"

"하하, 원래 검술은 맞으면서 배우는 거라 말이지."

핀은 키메라들의 공격을 피해내며 옆에 서서 가르침을 주는 피렌디와 함께 합을 맞춰 하급 키메라들의 머리를 날리고 있었고 데브라와 칠러웨이는 능숙하게 이따금 나타나는 상급 키메라들을 쓰러뜨렸다.

"라틴님."

"끄... 끝났나?"

"예."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나온 라틴은 처음 봤을 때 기름진 모습과는 달리 어느 정도 살이 빠져 있었고 그는 아무런 불평불만도 없이 데브라와 칠러웨이가 가지고 있던 짐들을 나무뿌리 바깥으로 끄집어 냈다.

"잘 숨어 있었군."

"... 칠러웨이 덕분입니다."

"감사 인사까지? 놀랍네..."

".... 여러분 덕분에 살 수 있었으니.."

"네가 잘 피한 덕이지."

"칠러웨이님이 말씀하신 나무뿌리 밑이 이렇게 안전한지 몰랐습니다."

라틴은 꽤나 고초를 겪었는지 건방지던 전의 모습과는 달리 고개를 꾸벅 숙였고 능숙하게 짐 안에서 요리할 재료들을 꺼냈다.

"네게 그런 취미가 있을 줄이야."

".... 저를 인정해주시는 분들도 여러분이 처음입니다.. 하하.."

라틴은 숲을 지나오다 형편없는 데브라의 요리 실력을 보고는 자신이 국자를 잡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작은 백팩 안에서 향신료 몇 개를 꺼내어 음식을 만들었었다.

"요리뿐만이 아니라 약초학까지 익혔으니.. 이것 참.. 피렌디 저 정도면 치료사를 해도 되지 않겠나?"

"뭐... 효능까지 달달 외울 정도니 가능하지 않을까요?"

라틴은 남부럽지않을 약초학과 요리 스킬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얼마 전 피렌디의 팔에 상처가 나자 어디선가 보지도 듣지도 못한 풀을 구해와 그녀를 치료해 준 적도 있었다.

"음.."

"맛있나 피렌디?"

"네.. 뭐 맛있네요."

"항상 먹지만 놀란단 말이야.."

또한 과일과 약초, 버섯 등 다양한 식물들을 볼 줄 알았고 그것들을 적절히 섞어 요리를 만들어 일행의 입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라틴님께서는 요리하는 것이 취미십니다, 가끔 기사들에게 기분 전환삼아 요리를 해주시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하하.."

핀이 칭찬을 하자 라틴은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간단한 재료들을 섞어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다.

"인간은 누구나 쓸모가 있다는 키로스님의 말씀이 이해가 가는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보기와는 다르다는 말이 이렇게 쓰일 줄이야."

데브라와 라틴의 말에 피렌디 또한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라틴은 계속되는 칭찬에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천천히 드세요, 일부러 오늘은 많이 해놨습니다."

"오오! 육포를 넣으니 이런 식감이.."

라틴의 말에도 데브라는 육포와 약초, 피렌디의 수제 건과일로 이루어진 샐러드를 누가 뺏어갈세라 입에 우걱우걱 집어넣었다.

"이런 재료로 샐러드를 만들어 이런 맛을 낼 정도면 엄청난 실력인데.. 라틴 너 재능이 있구나?"

"... 하하 네.. 하지만 아까 얘기했듯이.. 칭찬해 주는 건 여기 저를 보호 해주는 핀과 기사들 뿐이라.. "

"왜 영지에서도?"

"... 다른 사람에게는 못해주거든요.. 해줘도 칭찬받지 못하고.."

"이런 실력을 아무도 칭찬해 주지 않는다고..? 말도 안 되는데?"

칠러웨이의 칭찬에도 라틴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개를 숙였고 핀은 그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칠러웨이는 잘 모르겠지만 요리를 한다는 건 굉장히 취급이 좋지 않아."

"... 예?"

"하인들은 거의 노비 출신이나 평민 출신들이 많아 그러니 주방 안도 똑같은 취급을 받지, 귀족들이 손에 물을 묻혀가면서까지 요리를 할 거라고 생각해?"

"그건 아니겠죠."

"그래, 그들은 늘 그렇듯 라틴이 익히고 있는 약초학부터 요리까지 모두 천한 이들의 일들이라고 보고 있어.. 그들을 치료해 주고 먹여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 채."

"...."

피렌디의 말에 칠러웨이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된 듯 고개를 끄덕였고 핀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라틴을 바라봤다.

"라틴님이 요리를 하는 것도 늦은 밤일 경우가 많습니다... 라틴님의 아버지께서..."

"밤에 많이 먹는다 이거구만.. 어쩐지 살이 계속 찌더라니.. 밤에 먹는다고 해서 낮에 안 먹는 것도 아니잖아?"

"예.. 그렇긴 하지만 밤에는 요리를 연구해야 하기 때문에 라틴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핀, 그만..."

"앞으로 밤에 먹는 건 줄이도록 해, 자기 전에 왕창 먹고 누우면 더 살찐다는 말이 있어."

"아 네."

라틴은 핀의 그릇을 채워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칠러웨이는 요리를 입안에 넣으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요리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데.. 왜 이해하질 못하고 인정을 안 해주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네."

"....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의 아버지께서는 굉장히 고지식한 분이라.."

칠러웨이의 말에 라틴은 조금 감동을 먹은 듯 그를 바라봤고 핀 또한 그런 칠러웨이에게 감사한 표정이었다.

"고지식해도 자식이 무언가를 하면 응원해 주는 게 맞는 거 아냐?"

"..... 예 그렇죠."

씁쓸한 표정의 라틴이 안타까운 듯 데브라는 그를 바라봤지만 칠러웨이는 조금 생각이 다른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봤다.

"라틴."

"예?"

"나는 사람이 살아가려면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고 생각해."

".... 예."

"너희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예.. 감사합니다."

칠러웨이의 말에 라틴은 조금 위로가 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어느새 그릇을 다 비운 일행은 다시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톤 왕국은 이제 금방이야, 뭐 별일이 안 일어나는 이상 너희들은 칠라렌 성국으로 돌아가겠지."

"예."

"내가 살면서 느낀 게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못 살면 나중에 후회한다는 거야."

"...."

"누가 뭐라 하든 해, 핀이 너를 따르듯이."

"알겠습니다."

라틴은 칠러웨이를 보며 자신의 품속에 있는 '약초학의 정점'과 '요리의 정점'이라는 책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너는 칠라렌 성국의 어디서 왔어?"

"... 저는 라스몬드 공작의 아들입니다."

그의 말에 데브라는 놀란 듯 그를 획 돌아봤고 피렌디 또한 입을 떡 벌렸다.

"라스몬드라 했나?"

"예.. 그렇습니다만..."

"라스몬드 공작이 어떤 사람이길래 그러십니까?"

칠러웨이가 궁금한 듯 묻자 데브라는 이마를 짚으며 무언가 고민하듯 말을 멈췄다.

".... 라스몬드 공작가면 말 그대로 칠라렌 성국의 돈줄이야."

"예?"

"칠라렌 성국의 돈 3할이 그 공작가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세, 풍요로운 영지와 공작의 그 뛰어난 머리는 예술, 건축, 상인들까지 모두 휘어잡고 있다네."

"그 정도로 대단한 집안이었어?"

칠러웨이가 놀란 표정으로 라틴을 바라보자 라틴은 볼을 긁적일 뿐이었다.

"허어.. 자신의 아비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고 있는 건가?"

"저..."

"자네의 견습 기사가 왜 이렇게 실력이 좋은가 했더니 라스몬드 공작가면 이해가 가는구만."

데브라는 견습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기사와 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핀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한참 멀었습니다.. 그리고 라틴님은 이번에 친구분과 처음 공작님의 명령에 밖으로 나오신 겁니다."

".... 영지에서 처음 나온 거란 말인가?"

"예..."

"허어..."

라스몬드라는 이름이 나올수록 라틴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져 갔고 핀은 그런 그가 걱정이 되는 듯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라스몬드님은 라틴님을 굉장히 부끄러워하셨습니다.. 그래서 항상 혼자만 행동하셨고 그것은 부인이 돌아가신 뒤로 더 심해졌습니다."

".... 이해가 되긴 하네."

핀의 말에 피렌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은 '천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취미를 가졌거나 배움을 추구하는 이들을 천대했고 그것은 칠라렌 성국에서 영향력이 있는 라스몬드 또한 마찬가지 일 것이었다.

"그런데 왜 톤 왕국과 헤라임 제국의 경계에?"

"... 그게.. 기사들이 실력이 좋기에 저희도 키메라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신나는 바람에..."

"아무리 그래도 생각은 했어야지."

".... 이번 기회에 남자다운 일을 해보라고 하셔서.. 그곳까지 가 키메라들의 머리를 가져오면 칭찬해 주시지 않을까 했습니다.."

"자네는 지휘관을 하기에 부적합하겠군."

라틴의 말에 데브라는 한숨을 쉬었고 칠러웨이 또한 바보 같은 그의 행동에 목숨을 잃은 기사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리에티님께서 성국의 모든 영지에 키메라 토벌을 명하셨지만 이미 미네르 숲은 씨가 말랐습니다."

"그래서 이곳까지.."

핀의 말에 데브라는 얼마 전 있었던 성국의 대규모 토벌을 떠올리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 칠러웨이를 바라봤다.

"칠러웨이 자네.. 분명 일루안 후작과 함께 토벌대에 있었다고 했지."

"예.. 뭐.."

"배반자 일루안 후작과 함께 말입니까?"

핀의 말에 칠러웨이의 몸이 움찔했고 그의 손에는 굵은 핏줄이 섰다.

".... 배반자가 아냐."

".... 하지만 토벌을 하고.."

"라틴님!"

라틴이 무언가 기억이 났다는 듯 이야기에 끼어들려 하자 핀은 무언가 눈치를 챈 듯 그의 입을 막았다.

"너희들 그 자리에 있었어?"

"....."

"없었으면 아무 말도 하지 마."

칠러웨이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자 데브라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칠러웨이 힘 풀게."

"...."

"내가 자네를 처음 봤을 때 의심을 하긴 했지만 아닌 걸 알아."

".... 감사합니다."

"게다가 나는 정보를 어느 정도 받고 있어서 거의 모든 걸 알고 있지만 나와는 달리 자네는 일루안 후작을 따른 반란군으로 알려져 있네."

".... 예."

"저들이 자네를 보고도 안 놀란 이유도 라틴은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던 공작의 부끄러운 아들, 그리고 견습 기사라서네."

"...."

"그러니 저들이 놀라고 자네에게 무례를 범한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게."

"이해합니다.. 저는 뭐라고 들어도 괜찮지만.. 일루안님은 안됩니다.. 반란군 수장으로 불려서는..."

"...."

칠러웨이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고 데브라는 라틴과 핀을 돌아봤다.

"죄송합니다."

"아닐세 자네들은 잘 몰랐으니, 이 친구는 그 토벌대에 있던 친구야 일루안 후작과 상당히 친했고."

"아.."

"다음부터 조심하면 되니까."

"예."

"자네들을 이 친구가 받아준 건 조금 놀랍긴 했지만 이 친구가 악감정이 있는 건 지금 자네가 얘기한 '리에티'라는 자일세."

"...."

라틴과 핀은 그 말에 놀란 듯 돌아서 분을 삭이고 있는 칠러웨이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계속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자네들에게만 얘기해 주지."

"... 무엇을.."

"전쟁이 일어날 거야, 아주 큰."

".... 저.. 전쟁 말입니까?"

상당히 놀란 듯 라틴의 볼살이 떨려왔고 항상 강한 얼굴이었던 핀의 얼굴에도 걱정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라틴 자네도 살을 빼고 핀 네 녀석은 나에게 최대한 실전을 배워."

"... 정말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까?"

"지금 너희의 성녀는 톤 왕국으로 향했어, 성녀를 뺏으려는 헬하임 제국과 하나의 성녀만 남기려는 칠라렌 성국.. 과연 어떻게 될 것 같나? 이대로 조용히 모든 게 흘러갈까?"

데브라는 고개를 내저었고 앞을 지나쳐가는 칠러웨이를 따라 발을 움직였다.

"돌아가면 무조건 살 준비부터 하게.. 칠러웨이가 톤 왕국에 도착한 그 순간 자네의 아버지인 라스몬드 공작부터 브라이언 공작과 리에티, 헬하임 제국의 황제와 황자들... 모든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움직일 걸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