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소란스러움은 언제나 적을 불러온다
* * *
"...."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인이 조용히 정원에 앉아 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라님."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원의 적막함을 깨뜨리고 한 남자가 다가왔다.
"리에티... 왔나요?"
"많이 야위셨군요."
리에티는 잠시 멍한 표정의 엘라를 바라보더니 그녀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
".... 오늘은 무슨 일이신가요?"
"엘라님이 뵙고 싶어 왔을 뿐 이유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한 남자가 여인에게 하는 달콤한 말 같았지만 여인의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
"그런가요."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를 쳐다보던 여인은 정원 안에 날아온 새 한 마리에게 눈을 돌릴 뿐이었다.
".... 엘라님."
"... 네."
"무엇 때문에 이러십니까."
"...."
"무엇 때문에..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겁니까?"
리에티가 화를 억누르며 좋게 얘기했지만 엘라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고 그 또한 좋게 바라보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무슨..."
엘라가 조용히 얘기하자 리에티는 그녀의 몸에 이상이 있는지 살폈지만 엘라는 많이 야위었을 뿐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몸에는 이상이..."
".... 몸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뭡니까?"
"마음이... 마음이 너무 좋지 않아요."
"...."
결국 엘라의 말에 리에티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일어서십시요, 이럴 때는 활동을..."
"아뇨."
"...?"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 제가 바라지 않습니다 리에티."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쌓아왔던 분노가 터져 나오고 리에티의 목소리가 정원에 울려 퍼지자 정원을 가다듬던 정원사들은 자신이 하던 일을 멈추고 조용히 정원의 밖으로 조심스럽게 걸어나갔다.
"당신에게... 모든 걸 드리려.. 또 모든 걸 되찾아주려 노력했습니다."
"...."
"왜 저를 봐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저는..."
"저는!!! 당신을 위해 모든 걸 했단 말입니다!"
".... 모든 걸 했다고.. 하셨나요?"
잠시 리에티를 본 엘라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에 섰다.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전 아무것도 몰라요."
"....!"
"제가 당신에게 '관심'을 주길 원하는지 아니면 '권력'을 위해 당신이 저를 이용하는 건지."
"무슨...!"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구요."
"...."
"처음에는 고마웠죠, 성녀로 뽑혔지만 이내 뽑힌 다른 성녀들 때문에 뒷전으로 밀린 저를 챙겨주고.."
"그렇다면 알아주십시요, 제 충성심을!"
리에티가 무릎을 꿇으며 엘라에게 애원하듯 얘기했지만 엘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 후에 당신이 칠러웨이부터 일루안님까지 제거했던 것을 기억해요."
".... 그것은.."
"알아요 저를 성녀로 만들기 위함이었다는 것."
"...."
"하지만 당신은 교황님부터 고위층의 귀족들을 숙청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다른 성녀들까지 가둬두기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그건 너무나 당연한 절차입니다!"
"마리아."
".....?"
"마리아를 아시겠죠."
엘라의 얼굴은 아직까지 감정이 없었지만 리에티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원망이 담겨있었다.
"마리아는 저를 말 그대로 언니처럼 대해줬어요.. 아르웬 그 아이는 제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죠."
".... 그들이 당신을 밀어냈습니다."
"아니요."
"...."
"저를 밀어낸 건 라티엘 하나뿐이었습니다."
엘라의 말에 리에티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저 또한 탐욕에 눈이 멀었던 거죠.. 당신이 했던 말들을 들으며 제가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막상 당신이 쥐여준 칠라렌의 성녀라는 권력을 다시 손에 쥐고 나니 보이기 시작했어요."
"엘라님."
"이 모든 건 당신의 계획이 틀어져 만들어진 상황이 아닐까.. 나는 정말 바보 중의 바보였구나..."
"엘라님!!!!"
리에티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고 엘라는 움찔했지만 지지 않겠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당신은 성녀.. 이 성국의 단 하나뿐인 성녀여야만 합니다.. 누구에게도 자리를 줘서는 안되고 동일시되어서도 안돼요."
"...."
"전처럼 이 나라에 부흥을 일으키려 노력하고 올바른 성녀로 남도록 해주세요, 저는 당신을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당신을 위해 살아가고 있어요."
"리에티.."
"당신의 예전 모습이 저에게는 잊히지 않습니다.. 자신감 넘치게 살아가며 자신의 모든 것들을 나누어주고... 또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는 당신을..."
"저는..."
"그만! 그만하십시요! 제 마음은 바꿀 수 없습니다, 이 나라를 강대하게 만들고 당신을 저 위대한 키로스 신이 내린 아이이자 사자로 만들겠어요.. 아무것도 듣지 않을 겁니다."
"...."
"모든 건 당신을 위해서 세워졌습니다.. 약간의 방해가 있었지만 이건 신이 내린 운명대로 흘러가는 겁니다.. 우리를 방해하는 저 모든 적을 해치우고 제가 교황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당신이 평생을 성녀로 살아가는 것도... 또 모든 대륙을 하나로 만들어 위대한 키로스 신의 뜻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가득하게 만드는 것도..."
"그만.. 그만해요!"
엘라가 소리를 지르며 리에티에게 벗어나려 했지만 그는 엘라가 도망치지 못하게 더더욱 힘을 주었다.
"저는 일루안님과 함께 할 때부터 다짐했습니다.. 당신을 위한 적들을 모두 해치우겠다고 그게 저 큰 제국이더라도 짓밟아버리겠다고... 뜻을 함께하는 키로스의 신도들과 함께 당신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절대.. 절대... 절대... 놓지 않겠습니다.. 그 누구라 하더라도 목에 칼을 집어넣고 가슴에 성수를 뿌린 말뚝을 박아 넣겠습니다."
리에티의 광기 어린 집착에 결국 엘라는 그를 뿌리쳤고 엘라의 원피스는 쭉 찢어졌다.
"엘라님이 원하신다면 모든 걸 하겠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부정하지 마십시요.. 당신을 위해 모든 건 준비됐습니다.. 신도들도, 기사들도, 어린 귀족들도.. 또 저도.."
엘라는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가리려 노력했지만 리에티는 새하얀 엘라의 피부를 매만지며 그녀의 턱을 잡았다.
"저는... 후회해요."
".... 후회?"
"그때 숲에서 도망칠걸.. 그를 따라갔다면 저는 지금보다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
"아르웬이 아닌 제가 그의 옆에 있었겠죠... 저를 따르는 아빌론과 같이... 칠러웨이와 같이 이 대륙을 돌아다녔을 거예요."
"엘라!!!!!!"
칠러웨이의 이름이 나오자 결국 리에티는 엘라의 뺨을 때렸고 엘라의 고개는 획 돌아갔다.
"..... 그 이름.. 꺼내지 마시길."
"..... 저는.."
"한 번 더 그 이름을 얘기하면...!"
"저는 그가 보고 싶어요.. 도망치고 싶다는 표정을 하고 있어도 제 목숨을 살리러 와주는... 따듯하고 보잘것없는 모닥불에 미소를 짓던 그가... 그리워요."
"미쳤군요."
"이렇게도... 그가 생각날 줄 몰랐어요.."
"정말 미쳤군요.. 엘라...!"
"칠러웨이가... 흡!"
엘라가 무어라 더 이야기하려 했지만 리에티는 엘라의 입에 강제로 키스했고 엘라는 발버둥을 치며 그에게 벗어나려 했다.
"읍... 읍! 무슨 짓을...!"
엘라는 그를 밀쳐내고 뒤로 물러났지만 리에티는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어차피 모든 건 끝났습니다.. 당신이 그곳에서 모든 상황을 긍정한 순간 이 일들은 멈출 수가 없게 됐습니다."
"....."
"당신을 가질 겁니다."
"그.. 그런...!"
"아주 어릴 때부터 당신을 보며 키로스님에게 기도했죠.. 저에게 모든 걸 달라고."
"....."
"모든 걸 준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을 제 것으로 만들겠다고... 그리고 저를 무시했던 개 같은 귀족들 또한 죽여 그 머리를 성에 걸어두겠다 약조했습니다."
"리에티.."
"그러니! 당신을 위해 이 손에 많은 피를 묻힌 저를 위해 살아가고 성녀가 되시란 말입니다!"
"리에티 그만해요.. 제발!"
"당신이 저에게 빵 하나를 건네준.. 그 순간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그만.. 그만!!!"
엘라가 빼액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주변에 있던 물건을 던졌지만 리에티는 아무렇지 않게 맞고는 엘라에게 다가가 귓속에 속삭였다.
"기대하시길."
"아아..."
정원에 인기척이 들리자 리에티는 정원에 걸린 흰 천을 떼어 그녀에게 덮어준 후 빠른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갔지만 엘라는 모든 걸 잃은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엘라님?"
"...."
"무슨 일이십니까 엘라 성녀님!"
한 정원사가 두리번거리며 수풀 속에서 나오더니 뺨이 부풀어 있는 엘라에게 달려갔다.
"아..."
"엘라님 정신 차리세요!!"
"벡커."
"예 저는 여기 있습니다."
그 정원사는 벡커였지만 몸 이곳저곳이 상처투성이였고 그는 누군가에게 들킬세라 주변을 살피며 얼굴을 가리고 엘라에게 다가왔다.
".... 미안해요."
"무엇이 말입니까?"
"일을... 일을 이렇게 만든 게 모두 저예요.."
"...."
엘라의 반응을 보며 벡커는 대충은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아버지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토닥여주었다.
"괜찮습니다... 이건 모두 키로스님의 뜻... 교황님 또한 모두 받아들이셨던 일입니다."
".... 교황님은... 교황님은 편하게 가지 못하셨겠죠..? 저 같은 사악한 아이 때문에..."
"엘라님."
"...."
"교황님은 다섯 성녀를 모두 사랑하셨지만 특히 엘라님을 더더욱 아끼셨습니다."
"..... 아아아.."
"엘라님 저를 보십시요."
벡커는 엘라의 눈물을 소매로 닦아준 뒤 그녀의 손에 교황이 가지고 있던 목걸이를 쥐여주었다.
"이건..."
"교황님이 리에티가 찾아오기 전 무언가 알고 계셨는지 저에게 몰래 건네주셨던 물건입니다."
"...."
"모든 걸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죽음도 이 일들도.. 리에티가 자신의 야욕을 위해 권력을 잡을 것이라는 것도."
".... 왜 교황님은 모두 알면서도..."
"그저 신의 뜻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
"대륙에 퍼져있는 고통 끌어내어 끝내기 위한 싸움이니 버티라고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엘라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상처들로 엉망인 벡커의 얼굴을 바라봤고 벡커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다시 토닥여줬다.
"이제 때가 된 것 같습니다."
"... 네..?"
"교황님이 말씀하셨던.. 제가 움직일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 저는 모르겠어요.. 뭐가 뭔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제 주인의 마지막 명령을 받는 것뿐."
"...."
"그리고 리에티의 말에 엘라님이 오해하신... 엘라님을 버리고 네 성녀를 택했다는 그런 오해를 풀어드리기 위해 저는 직접 움직이는 겁니다."
"벡커님.."
"저는 이제 톤 왕국으로 향합니다."
벡커는 정원에 숨겨져 있던 자신의 검을 챙겨 등에 매고는 꽃을 하나 꺾어 엘라의 다른 손에 살며시 얹어주었다.
"엘라님, 저를 살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 은혜 꼭 모두 갚도록 하겠습니다."
"아아... 가지 않으시면 안 되나요? 교황님이 믿던 사람은 이제 당신 밖에 없는데... 너무.. 너무나도 불안한데..."
"저도 교황님을 대신해 엘라님의 곁에 있고 싶지만... 저 또한 모든 게 궁금합니다."
".... 벡커님의 뜻이 그렇다면.."
"엘라님."
"네.."
"모든 성녀를 나쁘게 보지는 마십시요."
"....."
"아빌론이나 사밀라말고도 의지할 곳이 부족하시다면 아직 많은 사람이 길을 잃은 채 이 성국에 남아있고 모든 귀족들이 젊은 귀족들에게 숙청당한 뒤이지만 아직 하몬 백작과 라스몬드 공작은 그 힘이 남아 있어 아무도 건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일루안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지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셨습니까?"
"네.. 이해했어요.."
"그러니 울지 마시길.."
엘라의 눈물에 벡커의 마음 또한 아파졌지만 벡커는 마음을 다잡았고 그녀에게 교황에게 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 꼭...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세요.. 벡커.."
"예, 약속하겠습니다."